소설리스트

66화 (6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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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한마디씩 주고받던 두 사람이 이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더 이상 아팠던 일에 울음을 참거나 먹먹한 코끝을 문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들도 이미 나이를 먹었고 정하 역시 그늘 한 점 없는 다정한 웃음을 반짝였다.

“하여튼 다 끝났으니까 너도 나도, 정하도 인하도.”

“응.”

조금 전보다 더욱 의미심장한 미소가 오갔다. 어떻게든 견디니 이런 날이 오기는 오는구나. 새삼 감회가 새로운 희림이 소리 내어 웃자 연주는 으이그, 그녀를 흘겼다.

“잘도 웃음이 나겠다. 솔직히 나 저 감독인지 뭔지 하는 놈 때문에 얼마나 짜증 났는데.”

“나라고 다르겠니.”

“그래도 희림이 네 성격에 잘도 참는다 싶었지. 하루에도 열 번씩 더 엎고도 남을 애가.”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저기요, 나 한희림이라고! 안온마을 청년회 회장, 상가 번영회 회장!”

본인이 먼저 그 지긋지긋한 호칭을 가져다 붙이는 것을 보면 정말로 기분이 좋기는 한 모양이었다. 세상 사는 것이 다 그런 거 아니겠냐, 그리 둘러대기에는 이번 일에 얽힌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동네 할머니들 얼마나 기대가 큰데. 그리고 이거 잘돼야 상가 사람들도 다 같이 좋은 거고.”

“강인하네 카페에 좋은 거 아니고?”

“안정하네 책방도 만만찮게 좋을 거 같지 않아?”

크로스.

사심 가득한 여자들의 의미심장한 눈짓이 오갔다. 두 주먹을 가볍게 부딪친 그녀들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각자 남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만 더 눈 감고 귀 막고 참으면 되니까.”

“오오, 한희림 어른 다 됐네?”

“응. 그러니까 그만 넌 가봐. 이 언니가 혼자 감당해볼 테니까.”

마침 눈이 마주친 성진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희림이 얼른 연주를 자신의 뒤로 떠밀었다. 안 그래도 피디가 요즘 기분이 썩 좋지 않았으니, 괜히 이곳에 있다 마음 상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여전히 마음고생 중인 연주에게도, 인생의 크나큰 결정을 하루 앞둔 제게도.

“여어, 희림 씨 여기 계셨네.”

“네에, 피디님.”

두 손을 모은 희림이 얼른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미소로 그를 맞았다. 지난번 일로 제게 괜히 퉁퉁대긴 하지만 그래봐야 마지막이다. 사람 기분 맞춰주는 일에는 이력이 난 그녀였으니 한 사람쯤 더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아니에요. 희림 씨가 수고 많이 했죠.”

그래도 마지막답게 성진 역시 의례적인 인사말이나마 그럴싸했다. 그가 서점에서 나오는 스태프들을 보며 목을 우드득 돌렸다.

“오랜만에 시골 촬영이라 이래저래 좀 피곤하긴 하네요. 불편한 것들도 많고.” 

“네에.”

“그나저나 희림 씨가 참 아깝긴 하네.”

또 시작이겠거니.

마지막까지 거르지 않는 그의 쓸데없는 참견에 희림이 입술을 맞물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다 보니 새로울 것도 없었다.

“듣자 하니 대학도 좋은 데 나왔다던데 이런 데서 이러고 있을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하하.”

“뭐가 좋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나 이해가 안 가서 그러지.”

쯧쯧 혀까지 차는 그를 희림이 어쭙잖은 웃음으로 응대했다. 점차 등 뒤 연주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긴 했지만 이번에도 어떻게 잘 붙들어놓았다. 약속했잖아. 제발 조용히 넘어가자는 희림의 눈짓이 간곡했다.

“뭐 꼭 누구 이해를 바라는 건 아니니까요.”

“에이, 그래도 이 동네 사람들 만나보니 너무 갑갑하던데. 어제는 한울산에 갔는데 웬 할머니들이 그렇게 기웃거리는지, 정말 지치지도 않으신가 봐요. 체력은 둘째 쳐도 그 나이면 눈치들은 좀 있을 법한데. 아니다, 그 나이라서 없으신 건가?”

“…….”

참자, 참을 수 있다.

움찔거리는 연주의 움직임을 따라 막아선 희림은 희미하게나마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말이 험해 그렇지 아주 없는 소리도 아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주지 않으면 더욱 좋겠지만 그건 저 남자 사정이고, 자신은 굳이 그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다 잘 끝났으니까 저도 서점에 좀 가서,”

“아니, 그래서 말인데 저 서점 주인 말이에요.”

“……네?”

그의 턱짓을 따라 희림의 고개가 서점을 향했다.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멀리서 봐도 여전히 얼굴이 붉은 정하는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는 그를 보며 희림은 무심코 입가를 따라 올렸다.

“정하요? 안 그래도 준비 많이 했다고 그랬는데 잘했나 모르겠어요. 그래도 정하야 뭐든 열심히 하니까,”

“그거야 그렇다 치고, 혹시 저렇게밖에 안 되나?”

“……저렇게라니요?”

되묻는 희림의 얼굴이 점차 혼란스러워졌다. 처음 말을 꺼낼 때부터 어딘가 이상하다 싶긴 했다. 성진 같은 사람을 잘 안다고는 못 해도 그 높은 콧대에 굳이 정하를 마음에 둘 것 같지도 않아 안심하고 있었더니,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혹시 정하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아니. 차라리 실수라도 하면 낫게요.”

“…….”

“보니까 다리를 좀 심하게 저는 거 같은데 저렇게 억지로 괜찮은 척할 거 없이 이참에 아예 콘셉트를 불쌍하게 잡는 게 어떨까 하는데.”

주절주절, 성진이 아쉽다는 얼굴로 턱을 문질렀다. 두 여자가 말이 없어졌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요새 시청자들이 그런 거에 감동 느끼고 그러잖아요. 장애 극복하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거.”

“…….”

“그래서 제 생각엔 이왕 서점 홍보도 할 겸 차라리 콘셉트를 제대로 그쪽으로 잡아서 처음 화면 잡힐 때부터 힘들게 절뚝거리면서 걸어오는 편이,”

“닥쳐, 이 미친놈아!”

“……지금 뭐라고 한 거예요?”

눈이 뒤집힌 연주가 드디어 전면으로 나서자 성진 역시 기가 찬 듯 눈살을 찌푸렸다. 생전 처음 듣는 욕설에 헛웃음을 터트린 그가 이내 팔을 걷어붙였다.

“나 참, 내가 희림 씨 친구라니까 좋게 봐줄려 했더니 이 여자가 지금 어디서!”

“왜! 치려고! 그래 쳐봐! 내가 너 같은 놈은, 으읏.”

“비켜, 조연주.”

“…….”

숨소리도 내지 않고 서 있던 희림이 연주의 팔을 강하게 끌어냈다. 단순히 친구를 말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넌 나와 있으라고. 조연주.”

이미 가라앉은 눈빛과 숨소리가 지극히 고요했다. 잠깐이나마 그녀에게 압도된 듯 성진이 들어올린 팔을 주춤거리는데, 희림은 그대로 그의 멱살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 입 다시 한번 나불거려봐. 이 불쌍한 새끼야.”

◇ ◆ ◇

사고는 늘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갑작스레 하우스를 뚫어버린 초가을의 우박이라든가, 몇 날 며칠 묶어둔 짚단을 쓸고 가는 태풍이라든가, 막 씨를 뿌린 들판에 내리는 늦겨울의 눈 같은 것들. 어디 이래도 네가 견딜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는 하늘의 농간처럼 불가항력으로 숨통을 죄어왔다.

내게는 그녀와의 이별이 그러했다.

‘겨울’ 종장, 오지 않는 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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