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70/80)

69화

놀라움에 반색했던 희림은 금세 눈의 초점을 잃고 멍해졌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제가 너무 강인하의 생각에만 빠져 있었나 보다.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어 그제야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순둥이 정하야말로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너 좋아해. 희림아.”

그날 하루는 그 말 한마디로 끝이 나버렸다. 더 이상 다음 날을 기다리는 설렘이라거나, 두근거리는 가슴 같은 건 없었다. 제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모른다. 넋이 나가 겨우 몇 마디 중얼거리는 제게 정하는 늘 그래왔듯 다정한 웃음으로 마주했다.

잘 알겠다고, 미안한데 오늘은 너 먼저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그런 친구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머뭇거리며 상점 밖으로 나와서도, 몇 걸음 더 가다가도 돌아보기만 했다.

지금이라도 같이 가자 데리고 나와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결국 그러지는 못했다. 안정하는 어린애가 아니었고, 자신은 그 마음을 책임지지 못할 테니까.

그럼에도 다시 한번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자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을 것이다. 네 마음은 네 마음이고, 나는 네 친구니 꼭 데려갈 거라 떼썼을 것이다. 안 간다고 하면 욕을 하고 때려서라도 질질 끌고 함께 갔을 것이다.

그날이 두 다리로 멀쩡하게 서 있던 정하의 마지막 모습일 줄 알았더라면.

또한 인하에겐 그 마지막조차 없어질 거란 걸 알았더라면.

짙푸른 어둠 속에 희림이 눈을 떴다. 울다 잠든 탓인지 한참 동안 잊고 살던 일이 떠오른 탓인지, 눈꺼풀이 뻑뻑했다. 그도 아니면 바뀐 잠자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인하의 하얗고 폭신한 침구가 낯선 듯 낯익었다. 하지만 텅 빈 옆자리에는 도무지 태연할 수가 없었다.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 그녀가 집주인을 찾아 나서려는 그때 문이 열렸다.

“일어났어?”

“아…… 뭐야.”

희뿌연 조명에 비치는 인하의 얼굴에 희림은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괜히 울컥한 그녀가 고개를 파묻자 놀란 그가 얼른 침대맡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굽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네가 없어진 줄 알았다는 말을 삼킨 희림이 무릎 위로 고개를 기대었다. 눈가가 푸석한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 앞에서 인하가 흘러내린 머리를 귓가에 넘겨주었다.

“그럼 됐어.”

“응.”

“할머니는 걱정하지 마. 연주가 어제 연락해서 며칠 군청에서 지도자 교육 받는 것 때문에 같이 있을 거라고 했대.”

“……언젠가는 아실 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인하의 손이 그녀를 더욱 넓게 감쌌다. 그런 고민은 할 필요도 없다는 듯, 서서히 희림의 뺨을 끌어당긴 그가 조용히 이마를 맞대었다.

“한희림. 넌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전부 머리에서 지워버리라고.”

“어, 어떻게 그래. 앞으로 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내가 할게. 네 생각.”

“…….”

숨결이 마주 닿는 좁다란 공간에서 그의 목소리가 호수처럼 울렸다. 아직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어쩐지 눈가가 시큰했다. 숨을 참은 희림이 울음을 삼키자 인하가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감옥 갈까 봐 그렇게 서러웠어?”

“……웃지 마. 넌 내 심정 모른다구.”

“아아.”

버릇처럼 내뱉는 추임새가 오늘은 그리 얄밉지가 않았다. 입가의 엷은 웃음과는 달리 더욱 제 허리를 가까이 감싸는 인하의 손은 한없이 따스했다.

“그럼 천하의 한희림이 그렇게 우는데 나는 어땠을까.”

“…….”

“감옥이 그렇게 무서웠어?”

“아니. 너랑 헤어질까 봐.”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녀의 눈가에 다시금 서러운 눈물이 고였다. 모든 표정이 굳어버린 건 인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희림의 뺨이 엷게 떨려왔다.

“음……. 할 말이 있는데 또 그 말을 못 하고 가버릴까 봐. 그래서 그랬어.”

“한희림.”

“감옥은…… 뭐 거기도 사람 사는 데니까.”

흐읍, 의연한 말과는 달리 또다시 울음이 터져버렸지만 희림은 얼른 눈가를 닦아냈다. 이 정도 일로 감옥까지 가기는 힘들다는 이성도 남의 일일 때나 따져볼 수 있는 법이다. 어차피 서울이든 청연이든 감옥이든, 제게는 매한가지 아닌가.

강인하가 없는 세상은 어디든.

“내, 내가 약속 먼저 했잖아. 할 말 있다고. 그런데 유치장에 가면 이제 얼굴 보기 힘들 거 같고……. 네가 나한테 질려서 면회 안 오면 아무런 방법이 없는 건데.”

“내가 너한테 질린다고?”

“……흐으윽, 감옥 간 여자친구를 누가 좋아해.”

이 바보야!

정말이지 제가 생각해도 그럴 수가 없어 희림의 숨죽인 울음이 더욱 서러워졌다. 강인하가 아무리 제게 푹 빠졌다 해도 그것까진 장담할 수 없다. 설마, 그러려고. 시도 때도 없이 도망갈 생각만 하다 이젠 아주 감옥까지 가게 생겼는데. 울컥함에 희뿌옇게 차오른 시야로 인하를 살펴보던 그녀가 작게 입을 벌렸다.

“아…….”

그제야 새벽에 어울리지 않는 그의 단정한 셔츠 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손으로 붙들고 있던 것이 타이라는 것도 지금 알았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그녀가 저도 모르게 인하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어디 가?”

“응. 서울에 좀.”

“서울에 왜? 이 시간에 왜?”

그녀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당장 그가 없는 침대의 옆자리에도 이렇게 허전한데, 인하가 없는 청연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침착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멋대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가야 하는 거야?”

“응. 너 감옥 안 보내려면.”

“……흑.”

감옥 소리에 다시 희림의 눈가가 찰랑거리자, 인하의 미소가 쓰게 번졌다. 무얼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인하의 손이 머뭇거리듯 그녀의 뺨에 닿았다.

“원래 일이 좀 남았기도 했고 이참에 한 번에 처리해버리고 오려고.”

“아…… 그랬지. 나 때문에.”

속삭이듯 내뱉은 그녀의 음성에 자책이 가득했다. 내일 오기로 했던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거였는데. 왜 그 당연한 사실도 늘 강인하 앞에서는 잊고 마는지 모른다.

“화났지?”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전화했다면 그랬겠지.”

서서히 몸을 일으킨 인하가 희림의 고개를 받쳐 들었다. 더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손목시계를 바라본 그가 최대한 담담히 입을 떼어냈다.

“다녀올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

“당분간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 필요한 건 내가 다 보낼게. 키는 선반에 뒀으니까 네 가방에 잘 챙겨두고.”

고저 없이 담담한 인하의 음성이 천천히, 최대한 느릿하게 이어졌다. 그러고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으로 주저하던 그가 돌연 그대로 밖을 나섰다.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나서는 걸음이 남은 미련을 떨쳐내듯 속도가 붙었다. 가차 없이 문고리를 잡는 순간, 울컥하는 눈물이 그의 등에 닿았다.

“가지 마!”

“…….”

“안 가면 좋겠어.”

어느새 달려 나온 희림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힘겹게 눈을 감은 인하의 가슴이 멈춰버린 숨과 함께 굳어버렸다. 어떻게 안심시켜줘야 하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가 없다. 당장 그녀를 두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 아는 만큼 어려웠다.

첫발을 어떻게 떼어내야 하는지, 어떻게 돌아보지 않아야 하는지도, 모든 것이 힘겹기만 했다. 그럼에도 가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것은 절망스러웠고.

“강인하. 너 내가 왜 이러는지 알잖아.”

“……한희림.”

“그냥 이렇게 같이 있을 수만 있으면 돼. 난 그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어.”

“아니. 난 이제 그 정도로 안 돼.”

“…….”

“그래서 가야 하는 거야.”

딸깍, 적막 속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베어내듯 아팠다. 더 이상은 말릴 수도, 그럴 기력도 없었다. 시퍼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 희림이 벌써부터 시려오는 두 팔을 감싸 안았다.

정말로, 감옥은 갈 곳이 못 되겠구나.

어둠 속에 홀로 남아 떠나는 이를 바라만 봐야 하는 거라면, 더는 못 할 짓이다.

◇ ◆ ◇

가장 싫어하는 이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을 때, 나는 아직 내가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다. 또한 그것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였을 때, 나는 어른이 되는 순간이 그리 머지않았음을 깨달았다.

얼마 남지 않은 그 순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다면, 아마 평생 어른이 되지 않는 편을 택했겠지만.

‘겨울’,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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