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1/80)

70화

“말씀드린 사안들은 그렇게 처리해주시면 됩니다. 버스나 관련 업체 사람들 입단속 단단히 시키시고요.”

“네, 상무님.”

“그나저나 제작사가 어디라고 했죠?”

자신이 머물렀던 사무실 앞에 선 인하가 박 비서를 돌아보았다. 무심한 듯 굴어도 그 안에 담긴 강경함을 숨길 수는 없다. 이미 인하와 합을 맞추어온 지 수년째인 박 비서답게 질문 하나에도 자세가 달라졌다. 상무님이 정말로 제작사가 어딘지 몰라서 물어보리라는, 그런 순진한 생각은 버려야 했다.

“어째서 그러십니까? 혹시 그쪽에도 연락하실 생각이라면,”

“그냥 알고 싶어서요. 여러모로 규모나 상황이 어찌 되는지. 뭐 직원 관리 같은 것도 좋고요.”

“아…… 네.”

‘여러모로’. 그 속에 숨겨진 뜻이 무시무시했다. 강인하라는 남자를 잘 아는 만큼 긴장도 커진 박 비서가 바로 휴대전화를 체크했다. 대체 일이 어찌 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닌 듯했다.

“혹시 곤란할까요?”

“아, 아뇨. 말씀하셨던 사항들은 상무님 뜻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제야 넌지시 웃는 인하의 웃음이 만족스러웠다. 설령 곤란하다 해도 그에게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에 관한 일을 제외하고는 그저 돈과 시간이 얼마나 더 들어가느냐,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제 일에 들어가는 비용은 제 개인 계좌에서 처리해주시면 됩니다. 혹여 인수의 단계까지 가야 한다면 그때는 제 지분을 처리하면 되고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회사에서는……. 상무님 입지를 생각하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슨 종이 한 장 내다 버리는 것도 아니고, 더없이 깔끔하게 제 몫의 주식을 처분하겠다는 인하의 선언에 박 비서의 입이 벌어졌다. 최후의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지분을 팔면 회사 내 그의 입지에도 변동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상무님께서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는데요.”

“그러니 돌아갈 곳도 남아 있는 거겠지요.”

“…….”

그 날카롭던 남자의 눈이 어딘가를 떠올리며 부드럽게 휘었다. 하지만 시종일관 안절부절못하는 박 비서의 얼굴에 그는 다시금 진지해졌다.

“혹시 회사에 저 모르는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상무님 빈자리가 생각보다 크다 보니까요. 진행하시던 일들도 나름대로 사력을 다해 이어받아 진행 중이긴 한데 상무님 계실 때만큼은 아니다 보니……. 그리고 건설사나 합병 건도 자기들은 분명히 상무님 하나 믿고 진행했는데 지금 어디에 계시냐 찾기도 하고.”

요는 회사에 그의 손과 얼굴이 필요한 일들이 몇 가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사람 하나 빠졌다고 흔들릴 규모는 아니지만 그만큼 하나하나의 일들에 오가는 금액들이 막대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는 절대로 상무님께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럼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사, 상무님.”

“회장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 이상 제가 나설 일은 아닌 거 같네요.”

조금은 씁쓸하게 웃던 인하가 어깨가 축 처진 박 비서를 놓아두고 먼저 복도를 걸어나갔다. 이미 제 손을 떠났고, 처음부터 그러기로 약속된 일들이기도 했다. 아버지께서 아무 말 않는 일에 제가 먼저 나서는 것은 안 그래도 서먹한 부자 관계에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뚱한 얼굴로 ‘네가 웬일이냐.’ 쳐다볼지도 모른다.

“…….”

그리 생각하니 공연히 뒷목이 뻐근해졌다. 얼마 전 예상치 못한 일이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아버지는 먼저 입 밖에 꺼낸 적 없으셨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고개를 젓던 인하의 앞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인하 네가 여기 웬일이냐.”

“아, 회장님.”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만난 아버지였지만 따지고 보면 하루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시는 분이었다. 너무도 당연한 일에 헛웃음을 삼킨 인하가 회사이니만큼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다.

“잠시 일이 있어 들렀습니다.”

“그래?”

“네.”

“…….”

아무래도 청연에 너무 잘 적응해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데면데면함이, 이제 와 견딜 수 없을 만큼 어색한 걸 보면.

“이제 일 다 마쳤으니 돌아가보려고요.”

“……그렇구나.”

“네. 그럼 회장님께서도 들어가보시죠.”

“그런 거 말고 다른 건 없느냐?”

“…….”

“아니. 혹시 또 다른 일은 없는 건가 해서.”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입구 한켠으로 비켜서는 그에게로 향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제법 다급했다. 천천히 시선을 들던 인하의 목젖이 아주 길게 넘어갔다.

“아뇨. 괜찮습니다. 다른 일은요.”

“혹시 다시는 안 올라올 생각은 아니겠지?”

“……왜 그리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 싫을 거 아니냐.”

아버지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올 줄은 미처 몰랐던 인하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나마 청연 할머니들의 온갖 두서없는 질문에 단련이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뇨.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하야.”

“원망한 적은 있었지만요.”

솔직함, 그 이상의 대답은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렇게 편하게 술술 나오는 걸 보면 한 번쯤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회사에선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던 그의 찬바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10년 전엔 다시는 안 뵐 수 있으면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아버지와 한 약속이 아니었다면요.”

“……변명 같겠지만 그때는 나 때문에 네가 그런 곳에서 허송세월하는 걸 볼 수가 없었다. 언젠가 너도 성인이 되면 내 뜻을 알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아뇨. 솔직히 아버지 뜻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꼭 그 방법밖에 없었을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어렸고 힘이 없었다. 갓 성년을 앞두고 처음으로 도움을 요청한 제게 아버지의 요구사항은 꽤나 잔인했다. 그럼에도 그 뜻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 스스로가 사무치게 무력하게 느껴졌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만 오늘 와서 보니 어쩌면 아버지의 뜻이 아주 조금은 옳을 수도 있겠다 생각은 듭니다.”

“인하야.”

“그때 그러셨지요? 아버지 말대로 살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

“그 누구에게도 고개 숙일 필요도, 싫은 소리를 할 필요도, 제 사람이 다치는 일도 없을 거라고요.”

과연 겪어보니 그렇더라며, 회사에서는 극도로 드물었던 인하의 미소가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아들을 멍하게 바라보던 강 회장이 뒤늦게 그를 잡을 듯 손을 내밀어보았지만 이미 인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있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예의를 갖춘 인하의 모습이 그렇게 사라졌다.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뒤에서 머뭇거리던 박 비서가 허겁지겁 그를 쫓아가려 나서자 강 회장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

“아, 회장님.”

박 비서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크게 중요한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보고 있으면 긴장되는 부자 관계였다. 서로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구는 것 역시 변함이 없었다.

“오늘 인하가 제 몫을 얼마나 넘기겠다던가?”

“……네?”

“뻔하지. 회사라면 뒤도 안 돌아볼 놈이 먼저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그만한 생각도 없었으려고.”

차마 아들 앞에서는 나오지 않던 희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실 인하가 회사에 도착한 순간부터 사무실을 나서기 직전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꿰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그게. 아주 만약의 경우일 뿐이라서요.”

“그러니까 그 만약이 얼마나 되냐는 말일세.”

“죄송합니다. 상무님께서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회사나 가족분들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고 처음부터 못을 박으신지라.”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박 비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제 아들의 소신과 고집에 영향을 받았을 그에게, 강 회장은 노여운 기색 대신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회장님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면 강 회장으로서도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럼, 팬으로서는?”

◇ ◆ ◇

농민일보 막간 소식, 안온마을의 봄맞이 나들이

오는 봄을 맞아 안온마을 주민들이 3박 4일간의 온천 여행을 떠났다. 주식회사 한울 산업에서 후원하는 이번 여행은 ‘제1회 농업 환경 주거 개선 및 원예 우수 마을 선발’의 부상으로 2개월간 비밀리에 이루어진 심사 끝에 안온마을이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안온마을의 주민인 김명혜 할머니는 ‘모든 주민이 하나로 뭉쳐 안온마을의 쾌적한 환경을 위해 열심히 장미와 참외를 심은 것이 큰 효과를 본 것 같다.’며 자축했다. 다소 갑작스런 발표와 여행에도 99%의 놀라운 참석률을 보였으며 여행은 상황에 따라 기간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