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희림아, 걱정 마. 나 너 감옥 안 보내.”
“……어?”
“만약에 합의금 달라고 하면 이걸로 주면 돼. 내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왔는데 대충 이 정도면 될 거래.”
“…….”
내내 넋이 나가 있던 희림이 연주가 내미는 통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얘가 뭐라는 거야. 아무런 현실감이 없어 눈만 깜빡이던 그녀가 뒤늦게 놀라 그것을 밀어냈다.
“야, 미쳤어? 너 이거 결혼할 때 쓴다고 모아놓은 거잖아. 조연주 너한테서 적금 빼면 뭐가 남는다고!”
“……내가 두 가지 결심을 하고 왔어. 하나는 오늘 희림이 네가 뭐라 지껄이든 참는 거고 두 번째는 오늘 기사 안 쓰는 거.”
“야, 너.”
“한희림 네가 설령 그 자리에서 수갑 차고 연행돼도 나 절대 기사 안 써!”
내가 바로 이런 친구라고!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최대한의 우정을 증명한 연주가 가슴을 두드렸다. 감당이 안 되는 희림이 두 손에다 얼굴을 파묻었지만 연주는 끝까지 진지했다.
“그러니까 너도 오늘 그냥 간 쓸개 다 빼놨다 생각하고 참아. 눈이랑 귀 다 막아버려. 어떻게든 합의는 해야 할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야, 괜찮아. 솔직히 안정하가 네 합의금 문다고 결혼할 돈 써버렸다는데 나한테 혼수 왜 안 해 왔냐고 구박할 애는 아니잖아.”
“……언제 또 진도가 결혼까지 갔는데.”
“그냥. 혹시나 네가 정하한테 말해줄 생각이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는 거지.”
수년간 모은 돈을 내어놓으면서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던 연주가 이것만큼은 실속을 차렸다. 한결같은 친구의 모습에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은 희림이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런데 말이야.”
“정하 잘 있어.”
“아……. 그렇구나.”
“내가 못 오게 했어. 정하 너 보면 희림이 진짜 기분 그럴 거라고. 그럴 시간에 둘이 같이 합의금이나 열심히 벌어놓자고.”
똑 부러지는 연주의 윙크에 희림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됐다며, 마지막 짐까지 가뿐하게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마지막 통화 속, 한 사람의 목소리는 차마 떨쳐낼 수가 없는지라 계단을 오르는 걸음마다 울려 퍼졌다.
- 한희림, 오늘 가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강인하.”
- 회장님이 그 정도도 못 하는 자리면 매력 없잖아.
“아니 이게 누구신가. 그 잘난 회장님이 오늘도 아주 당당하시네!”
“…….”
멋대로 인하의 속삭임을 뒤덮은 성진의 비아냥은 언제 들어도 불쾌했다. 따라온 조감독이 그를 말리려 했지만 애초에 이러려고 작정한 사람을 말리기는 힘들었다.
“내가 말로만 고소한다 하고 넘어갈 줄 알았나 본데, 어림도 없지!”
“……네. 아주 잘하셨네요.”
“이봐, 한희림 씨. 당신 이제 끝이야. 취업 실패하고 꼴랑 이런 시골에 처박혀서 회장님 소리나 들으니 뭐라도 된 줄 알지? 거기서 빨간 줄까지 그이면 인생 어떻게 될지 상상이 안 가?”
“와, 저 인간이 진짜 말이면 단 줄 아나.”
“조연주!”
참아, 참으라고!
희림은 성진을 보자마자 눈을 희번덕거리는 연주의 팔을 잡아끌었다. 제 한 몸도 감당이 안 되는 지금 연주까지 더할 수는 없다.
“나보고 참으라면서. 원래 저런 놈인 거 다 알면서 왜 그래.”
“뭐? 저런 놈?”
버럭거리는 성진의 고성이 높아졌다. 며칠 전 파출소에서 희림의 기세에 잠시라도 짓눌렸던 것을 갚기라도 할 것처럼 팔을 걷어붙였다.
“아주 끝까지 가보자는 건데 그래! 내가 어디 합의해주나 보라고! 그리고 친구인가 뭔가 당신! 너도 내가 가만히 두나 봐! 꼴같잖게 기자랍시고 설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어디 두고 보자고! 아주 억만금을 싸 들고 와도 눈도 깜빡 안 할 테니까!”
“이잇!”
나름대로 전 재산을 털었지만 억만금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연주가 이를 갈았다. 분한 숨을 쌔근거리는 그녀들을 두고 성진은 더욱더 기세를 올렸다.
“참, 그 잘난 애인은 또 어디에 가셨냐? 얼굴만 번지르르해서는 이런 일에는 쏙 빠지는 거 보니 알 만하다, 알 만해!”
“이보세요!”
“왜! 꼴에 남자친구라고 편이라도 들어주고 싶어? 이보세요, 한희림 씨. 사람 보는 눈이 그 모양이니 지금 이 꼴로……. 뭐, 뭐야.”
발을 굴러대며 희림에게 다가서던 성진이 순간 주춤하며 고개를 돌렸다. 차곡차곡 규칙적으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묘하게 위압적이었다. 좁은 입구를 꽉 메우고 있는, 양복을 입은 열댓 명의 남자들은 보기에도 심상치가 않다.
“…….”
무슨 영화라도 찍나.
오늘 하루 눈을 감고 귀를 막으려 했던 희림조차 잠시나마 넋이 나갔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얼굴 한 번쯤은 마주쳤을 자그마한 동네에서, 단 하나도 눈에 익은 이가 없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신을 몰라야 할 이들이 제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혹시 한희림 씨 되십니까?”
“……아, 네에.”
마치 홀린 듯 바라보던 희림이 제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어느새 둘러싼 남자들이 더욱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회장님.”
◇ ◆ ◇
한희림의 인생에는 늘 예상치 못한 회장직이 함께했다. 안온마을로 주소를 옮긴 날 자동으로 당선된 청년회 회장이 그러했고, 상가가 무너진 두 달 전 임명된 상가 번영회 회장이 그러했다. 그렇지만 인생 처음으로 경찰서에 발을 들인 날 듣게 된 회장님 소리는 감회가 새롭다 못해 경이로웠다.
“이제부터는 저희한테 맡기시면 됩니다. 회장님.”
“아…….”
나 또 뭐 하나 된 모양이로구나.
이제 웃음조차 나지 않는 희림이 입술을 꼭 맞물었다. 영화를 찍나 싶었더니 정말 영화를 찍는 것 같기도 하다. 온통 머릿속이 새하얘져 따로 자초지종을 알아볼 겨를도 없었다. 당사자인 그녀만큼이나 황당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성진이 다짜고짜 끼어들었다.
“하아, 이게 다 뭐야!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어이가 없네.”
“김성진 씨 되시겠군요.”
“네, 그렇긴 한데 도대체 이게 다 뭡니까. 동네 소꿉놀이에도 정도가 있지,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찾아와서 회장님 어쩌고 해대면 뭐 제가 주춤하기라도 할 거 같습니까?”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원하는 사항 요구하시고 협의하시면 될 문제니까요.”
“흥, 협의는 무슨…….”
코웃음을 치던 성진이 대표로 선 남자가 내민 명함을 못마땅하게 받아 들었다. 그래봐야 어디서 동네 깡패들이나 불러 모았겠거니, 무성의하게 명함을 훑던 그의 얼굴이 점차 굳어갔다. 단순한 놀라움보다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직함과 사명에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변호사시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한울 그룹의 법무팀 팀장 김진섭입니다. 여기는 저희 팀원들이고요.”
“하…….”
상대의 얼굴을 훑어내린 성진이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찡그렸다. 이걸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왜 이런 시골 바닥에 서울 유명 기업의 법무팀이 내려와 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싼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뭐, 좋습니다. 설마하니 경찰서까지 와서 거짓말할 정도로 간이 크시진 않으실 테고, 진짜라 치죠.”
“네.”
“그렇다 쳐도 어쩌자고요. 제가 뭐 변호사라고 하면 넙죽 기면서 넘어갈 거 같습니까? 저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고 사정 알 만큼 안다고요. 여기 진단서하고 경위서 다 작성해 왔으니 법대로 하겠다 이겁니다.”
“그건 회장님을 대신해서 저희와 협의하시면 됩니다.”
“…….”
그럼 정말이라는 건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어 대충 맞춰주던 성진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라 해도 변할 것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더없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 여자가 이런 사람들을 불러들였는지는 몰라도 어차피 이런 일로 구속이나 전과가 어렵다는 것 정도는 모르지 않았다. 그럴 바엔 적당히 합의금이나 챙겨 혼쭐을 내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흐흠, 지금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정확히 알고나 있습니까? 저 여자가,”
“회장님이십니다.”
“하……. 아, 예에. 그쪽 회장님인지 뭔지가 저를 이 꼴로 만들어놓았다고요. 아주 성질을 못 이겨서 앞뒤 못 가리고 일부러 깽판을 쳐놨는데!”
“저희가 아는 것과는 다르군요. 상처를 입으신 건 안타깝지만 엄연한 사고였고 그 전에 시작은 김성진 씨께서 먼저 하신 걸로 들었습니다만.”
“뭐야. 진짜. 여기서 또 싸우자는 겁니까?”
사무적인 듯 녹록지 않은 변호사의 대답에 성진이 언성을 높였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본론으로 넘어가자는 듯 눈을 부라렸다.
“어쨌든 제 부상은 둘째 치고 촬영 일정도 다 꼬이고, 그걸로 저희 제작사 손해가 막심하단 말입니다. 그건 다 어떻게 책임지시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촬영은 전면 취소되었으니까요.”
“……네?”
“나의 아름다운 숲, 다큐멘터리 제작은 작가님의 뜻으로 오늘부로 취소되었습니다.”
변호사의 지극히 사무적인 미소에 아직도 사태가 파악이 안 되는 성진이 마른 입맛을 다셨다. 하아, 바람 빠진 듯한 소리를 몇 번 내뱉던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장난합니까? 취소라뇨?”
“작가님의 대리인으로 본인 의사에 따라 알려드립니다.”
성진의 손에 들려 있던 진단서를 받아 든 변호사가 제가 준비한 서류도 그에게 건네주었다. 자그마한 명함을 읽을 때보다 조금 더 심각하고 불안해진 성진의 눈이 미처 서류 한 장을 끝까지 읽기도 전에 크게 흔들렸다.
“이, 이게 다 뭡니까! 누구 놀려요? 이제 와서 취소라니! 아무리 글이나 쓰는 사람이라 해도 이 정도 생각도 없이 취소라니, 이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지금껏 들어간 돈은 다 어쩌라고!”
“두 배로 보상해드려야지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