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하고 싶은 말은 이 한마디에 모두 담았다. 도대체 내일 제게 무슨 말을 할 건지, 웅얼거리는 입가가 뜨거웠다. 벌써부터 준비해둔 제 대답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너만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고.
기적과도 같았던 정하의 수술도 잘 끝났으니 앞으로 남은 일도 전부 그리 풀릴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한테도 그런 기적이 찾아올지도…….
“나 못 나가. 기다리지 마.”
“……응?”
농담이겠거니. 실없이 웃었지만 이미 그럴 리 없다는 걸 아는 입술이 먼저 떨려왔다. 강인하가 그런 농담이나 장난을 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지난 세 번의 계절 동안 넘치도록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희림, 너도 괜히 나오지 마.”
“뭐라구?”
“그냥 잊으라고.”
인하가 더 내릴 곳도 없는 모자의 챙을 다시 끌어내렸다. 좁은 골목을 감도는 적막과 긴장감이 점차 커져만 갔다. 이대로는 제 가슴이 터지든 이 공기가 터져나가든 분명 무슨 일이 나겠다 싶을 때쯤, 그가 먼저 돌아섰다.
“강인하! 거기 서!”
“…….”
“그럼 나한테 하겠다는 말은 뭐야? 꼭 해야 한다는 말이라며? 네가 분명히 나한테…….”
“이제 와 그런 게 뭐 중요하다고.”
스르륵, 멈추는 걸음과 함께 인하가 드디어 모자를 벗어냈다. 그리 보고 싶던 검은 눈동자가 저리 한겨울처럼 얼어 있을 줄 알았다면, 그냥 아무런 욕심도 내지 않을 걸 그랬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좋은 것처럼 굴어볼 걸 그랬다.
“강인하.”
“……얼른 들어가봐. 춥다.”
이제 곧 봄을 앞두고도 인하는 춥다고 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저를 몇 번이나 비스듬히 돌아보던 그는 금세 골목의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야 화들짝 깨어나 쫓아가려 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희뿌연 눈물 때문인지, 새카만 어둠 때문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는 발끝이 얼어버렸다. 겹겹이 쌓인 감정 사이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시큰했다. 앞으로 다시는 봄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 외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십 대의 인하를 마주했던 마지막 기억조차도.
“하…….”
그때처럼 좁고 어둑한 방 한구석에서 희림이 서서히 주저앉았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기억이 어느새 머릿속을 꽉 메워버렸다. 하지만 더는 처음처럼 허망하거나 울컥하지 않았다.
뜨거운 해가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달구고 그 아래의 나는 더욱 끓어올랐다. 시야가 흐릿할 만큼의 더위가 최절정에 치달았던 어느 날, 나의 숲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