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그녀를 떠올리며 써내렸던 모든 나날과 기억들,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이로써 끝이 났다. 내일도, 또 내일도. 그렇게 끝나지 않을 모든 날들에 더욱 깊어질 제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아프도록 뛰어대는, 차마 책으로도 담아내지 못할 이 마음까지.
“……난 그랬다고.”
나의 회장님.
뺨에 닿으려던 그의 입술이 이 순간만큼은 담백하게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아쉬움이야 여전하지만 희림에게 약속한 만큼 한 번쯤은 참아볼 생각이었다.
화를 내려나.
만약 희림이 화를 낸다 해도 그는 그 순간마저 기대가 넘쳤다. 울고 웃고, 그녀와 함께하는 모든 평범한 일상의 순간이 지난 10년간 그가 그려왔던 꿈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하나도 특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러려고 여기에 왔어.”
“……그렇구나.”
의외로 담담한 그녀의 음성에 인하의 내리깐 눈이 휘어졌다. 가만히 눈을 맞추던 희림이 제 뺨에 닿은 그의 손을 감쌌다. 인하가 제게 보여주었던 마음처럼 그리 섬세하게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제 나름대로 그 모든 미묘하고 복잡한 마음을 한마디에 담아보았다.
“강인하, 너는 나한테…… 청연 같아.”
“…….”
이 이상 어찌 말할 수 있을까.
가쁜 숨을 들이켠 희림이 서서히 입술을 끌어올렸다. 제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의 시작이며 때로는 지긋지긋한 추억이기도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제 시간을 앗아가는 후회인 동시에 제 발목을 가장 강하게 묶은 가장 커다란 미련이었다.
또한 제 인생을 걸 가장 커다란 욕심이자 용기이기도 한, 저의 모든 것.
“앞으로도 평생.”
“……희림아.”
“삼 초 지났어.”
시트를 걷어낸 그녀가 곧장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인하의 목을 감았다. 언제나 그리되어야만 하는 일에는 순서나 시간이 중요치 않았다. 오늘은 절대로 안 된다는 맹세를 깨트리고 입을 맞추는 일이나, 환한 대낮에 서로를 격렬히 탐하는 일이나, 먼 시간을 돌아 함께하게 된 지금 이 순간처럼 극히 자연스러웠다.
청연의 역사상 가장 뜨거운 아침의 시작까지도.
◇ ◆ ◇
Q : 자, 농민일보 오늘의 인물은 요즘 청연을 뜨겁게 달구는 화제의 인물이죠! 강인하 씨를 모셨습니다.
A : …….
“잠깐만, 컷!”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연주가 곧장 손끝을 다른 손바닥에 붙였다. 새삼 피곤한 듯 인터뷰지를 말아 쥔 그녀는 마주한 인하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먼저 인사를 했으면 대답은 해야지.”
“아아…….”
“인하 네가 이런 거 처음 해봐서 긴장되는 건 알겠는데 어차피 내가 다 알아서 편집해줄 테니까 편하게 하라구.”
능숙하게 리드하는 척, 연주가 다리를 교차시켰다. 카메라 뒤의 희림이 ‘뭐 저런 게 다 있냐’는 듯 눈을 치떠봤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왜냐면, 오늘은 기념비적인 농민일보 최초의 ‘보이는 인터뷰’ 개국 첫 촬영이었으니까.
비록 푸른 호수를 배경으로 하는 야외무대를 둘러싼 모든 장비 일체는 청연사랑 한마음 연합회의 후원으로 마련된 것이었지만 한번 줬으면 그만이다. 다시 말해 오늘 이곳은 조연주에 의한, 조연주를 위한, 말 그대로 그녀의 꿈같은 세상이었다.
“자, 그럼 다시 들어갈게. 인하야. 긴장하지 말고, 웃으면서!”
Q : 자, 농민일보 오늘의 인물은 요즘 청연을 뜨겁게 달구는 화제의 인물이죠, 강인하 씨를 모셨습니다! 와아아! (박수)
A : ……네.
Q : 네! 열화와 같은 우렁찬 답변 정말 감사드리고요! 이렇게 강인하 씨와 인터뷰를 하다니, 정말 꿈만 같네요. 혹시 지난달 농민일보 앙케이트의 ‘이 남자와 추수하고 싶다!’ 1위로 뽑힌 건 알고 계신가요?
A : …….
“다시, 컷!”
이마를 짚은 연주가 눈을 찡그렸다. 이런 제 말을 들어줄 스태프들이라 해봤자 엉겁결에 카메라를 든 정하뿐이었지만 그럴수록 완벽한 통제와 리더십을 발휘해야 했다. 아니면 언제 또 천하의 강인하 앞에서 큰소리칠 수 있을지, 저 얄미운 한희림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만들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인하 넌 옷도 멋지게 차려입고서 와놓고, 인터뷰 때문에 신경 써준 건 고마운데.”
“아니, 이건 꼭 인터뷰 때문이 아니라.”
“자, 다시 갑니다! 큐!”
Q : 강인하 씨, 오늘 무대에 올라오시는데 정말 눈이 부셔서 바라보지도 못했지 뭐예요. 오늘 인터뷰에 이렇게까지 열정적인 모습,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A : 네, 뭐……. 그렇다고 하죠.
Q : 그나저나 이제 곧 이곳에서 카페 오픈을 앞두고 계시는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A : 많은 분들이 제 일처럼 도와주신 덕에 큰 탈 없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Q : 네. 그러고 보니 좋은 소식이 하나 더 들려오는데요!
혹시, 설마.
웃음이 가득한 연주의 질문에 카메라 뒤에 서 있던 희림의 몸이 공연히 움찔했다. 번개같이 떠오른 생각에 그녀의 초조함이 더해졌지만 그런 그녀를 빤히 내다보던 연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Q : 어머나, 무려 안온마을 상가 번영회 회장님으로 내정되었다는데, 정말 축하드립니다! (큰 박수)
“…….”
내 저것을 그냥.
숨을 멈추고 있던 희림은 급격히 힘이 풀리며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쟤 분명히 일부러 저러는 거라며, 손짓발짓을 해보았지만 카메라를 든 정하는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정하가 입술 위로 손가락을 붙이며 저기 좀 보라 턱짓하자 희림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A : 감사합니다. 뜻밖의 자리지만 전 회장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Q : 포부가 너무 멋지네요! 그럼 앞으로의 각오도 들을 수 있을까요?
A : 각오라고 하기에는 거창하지만 앞으로 더욱 발전할 청연의 지역 경제와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인터뷰 꿈나무가 여기 한 분 더 계셨구나.
유려하게 흐르는 그의 목소리에 희림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처음 연주의 인터뷰를 수락했다고 했을 땐 이걸 어쩌나 싶었는데, 이제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 하긴, 이제 와 조금 부족하면 어떨까.
인터뷰하는 인하의 뒤로 펼쳐진 푸른 호수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언젠가 그와 제 몸을 차갑게 감싸던 물이 이제는 바라보는 눈이 뜨거울 정도로 열기를 가득 머금었다. 아마도 오늘 저곳에 다시 빠지게 된다면, 영원히 저곳에 머무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
그러니 이런 얼토당토않은 인터뷰 정도는 웃으며 넘어가줄 용의가 충분했다. 한동안 제 앞에서는 무언가를 걸친 적이 없던 인하가 저리 멋진 슈트를 차려입은 것도, 한창 책방에서 제게 줄 로열티를 벌어야 할 정하가 저 장단에 끌려와 카메라를 잡고 있는 것도, 틈만 나면 저렇게 자신을 흘겨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연주조차 기꺼이 받아들였다.
Q : 자아, 멋진 각오까지 잘 들었구요! 아쉽게도 오늘 인터뷰는 여기서 마무리를 해야겠네요. 혹시 따로 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가요?
A : 할 말이요?
Q : 벌써 강인하 씨가 이곳에 온 지 세 달이 넘으셨잖아요. 청연에서 보낸 첫봄에 대한 소감 같은 건 어떨까요.
간만에 질문다운 질문을 던진 연주의 말을 따라 멀찍이 희림의 눈도 반짝였다. 첫봄. 10년 전의 겨울에서 훌쩍 넘어온 봄이 그에게는 어땠을지, 연인이 되고 나서도 그 궁금함만은 커져만 갔다.
지금 이 시간이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Q : 혹시 많이 아쉬우신가요?
A : 전혀요.
Q: 그렇지만 10년 전에는 갑자기 떠나느라 이곳에서 봄을 보내지 못하셨잖아요. 분명히 의미가 있을 줄 알았는데요.
A : 제게 처음부터 계절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요.
“한희림!”
“…….”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인하는 그렇게 화면 밖으로 걸어 나왔다. 10년 전 그 순간에서 다시 만나던 그날처럼, 제게로 다가오는 그에게선 긴 세월의 아쉬움 따위는 없었다. 겨울날 골목을 채우던 어둠과 추위도 어느새 눈부신 햇살과 온기로 바뀌었다.
“사람은 사계절을 모두 겪어봐야 안다는데, 난 널 처음 보는 순간에 알아봤어.”
“……어떡해.”
울컥 차오르는 눈물에 그녀가 입가를 가렸다. 이어 카메라를 돌리는 정하와 오케이 사인을 보내는 연주의 움직임이 일사불란했다. 이제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준비한 인하뿐이었다.
“네가 필요해. 간절히.”
“흐으윽.”
“결혼하자.”
한쪽 무릎을 굽힌 인하가 품에서 반지를 꺼내 들었다. 받쳐 든 그녀의 손에 조심스레 밀어 올리자 호수의 모든 반짝임이 그녀의 손가락 위로 내려앉았다. 눈부셔 차마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던 희림이 뒤늦게 울음을 참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컷!”
그 어느 활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연주의 박수와 함께 정하가 폭죽을 터트렸다. 인하가 그녀를 안아 빙글빙글 돌리고 희림은 행복한 웃음을 쏟아냈다. 그렇게 가장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그 마음이 익어가던 가을이 지나고, 다시 한없이 차가운 겨울을 버티며 그들의 사랑은 다시금 봄을 맞았다.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그럼에도 다가올 미래에선 가장 평범하기 그지없을 오늘에서야.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