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9/80)

78화

할머니들의 타박을 받으면서도 웃음을 꾹 참은 인하는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특훈이라도 받은 것처럼 능숙하게 처신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데리러 와주셨는데 한번 생각은 해봐야겠네요.”

“그, 그렇지? 그럴 거지?”

“이거 봐, 우리 천하장사가 이렇게 딱 끊어버릴 리는 없다 싶었다니께!”

방금 전까지 주춤했던 할머니들도 그의 한마디에 실린 실낱같은 희망을 놓치지 않았다. 행동대장답게 주축이 된 정씨 할머니가 강하게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참 내, 우리가 서울 와 보니께 뭐 그렇게 좋지도 않구먼!”

“그르니께. 사람도 너무 많고 머리 아프고 그려. 건강에 안 좋아. 오래 못 살어.”

“그런가요?”

“잉! 그런 거에 비하믄 우리 청연은 뭐 말로 해서 뭐 혀!”

넌지시 인하가 내비치는 관심에 할머니들이 더욱 바싹 붙어 섰다. 청연의 좋은 점이라면 이승이든 저승이든 다 끌어 쓰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뜨겁게 타올랐다.

“공기 좋지! 물 좋지!”

“흐음.”

“반찬도 우리가 다 해다 주겄다, 넌 쌀 한 톨, 깨 한 알 안 사도 된다니께!”

“……그게 다인가요?”

한 손으로 신중히 턱을 쓸던 인하가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보기보다 욕심이 많은, 또한 보기만큼이나 녹록지 않은 그의 태도에 말문이 막힌 할머니들이 발을 굴렀다. 뭐가 더 없냐는 듯 서로 시선을 교환해봤지만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이미 전력을 소진해버렸다.

“아! 그려!”

우리 진짜 회장님!

잊고 있던 비장의 무기를 기억해낸 할머니들이 그제야 희림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있어도 분명히 있다는 그녀의 비장한 의지에 모든 것을 걸었다. 얼른 준비한 것 좀 내놓아보라며 희림을 재촉하자 자연스레 인하의 시선까지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음……. 청연에 뭐가 더 있는 거야?”

“나.”

“…….”

이거 우리한테 말했던 거랑 다르잖여, 회장님.

순간적으로 눈이 휘둥그레진 정씨 할머니가 입을 열려 했지만 인생 경험이 조금 더 많은 할머니들이 부리나케 막아섰다. 분명 기다리면 더욱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라는 만고의 진리에 다 같이 입을 막은 채, 덩그러니 선 희림을 바라보았다. 

“응?”

“너밖에 모르는 내가 있다고.”

“…….”

과연 곧게 들어올린 그녀의 시선이 떨려왔다. 표정을 굳힌 인하가 한 발 더 가까이 나아가자 할머니들이 알아서 홍해처럼 길을 갈랐다.

“한희림.”

“나도 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오고 싶지는 않았어. 네 말대로 청연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런데?”

“내가 이제 나이가 좀 많아.”

더는 10년 전의 여고생이 아니었다. 인생의 많은 쓰디쓴 경험들 중 하나로 넘기기에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대로 돌아서면 잊혀지는, 며칠 울다 일어나면 괜찮아지는, 그럴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다. 무엇보다 청춘의 한 자락으로 남기기에는.

“그때보다 더 너를 좋아하게 됐어.”

“…….”

이제는 어찌 제 마음을 전해야 할지 모르는 그녀의 눈가에 서서히 물기가 어렸다. 인하가 제게 더 가까워지자 숨이 더욱 벅차올랐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지만 10년 전 그날처럼 희뿌예진 시야로는 그 무엇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넌 나 하나만 빼고 전부 가졌다고 했지?”

“…….”

“나한텐 너 하나가 전부야.”

흐읍, 그녀의 물기 어린 탄성이 자신을 덥석 안은 인하의 가슴속에 흩어졌다. 이렇게 세상을 모두 가지게 된 그가 두 팔을 힘주어 둘렀다. 희림의 머리칼에서 느껴지는 봄의 향기 속에서 인하의 마음이 꽃처럼 피어났다.

“사랑해.”

“……응.”

처음 들었을지언정 늘 들어오던 말처럼, 늘 찾아오던 봄이지만 처음 맞는 것처럼, 그렇게 함께하지 못해도 늘 함께해왔던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니까, 희림아.”

감추어둔 청심환을 나누어 먹는 할머니들도, 저를 회장님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박 비서도, 오직 서로만이 가득한 시야에 더 이상은 중요치가 않았다. 그녀의 허리를 꼭 감싸 안은 인하가 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같이 돌아가자.”

◇ ◆ ◇

농민일보, 긴급특집 - 그것이 알고 싶다 (부제 : 안온마을 온천 여행의 미스터리)

한울 산업의 후원으로 전국 온천 투어를 떠났던 안온마을의 할머니들이 지난 새벽 7박 8일의 일정을 마치고 귀환했다. 예상보다 배로 길어진 이번 여행은 원래 지난 25일 밤 8시 반쯤 도착했어야 했지만 어쩐 일인지 버스는 다음 날 6시, 아침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난 저녁 8시가량 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관광버스를 보았다는 몇몇 사람들의 제보가 이어지며 문제가 불거졌다. 왜 왔던 버스가 다시 떠나 다음 날에야 돌아왔는지, 오늘 이 시간까지 수많은 청연인들의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현재 이번 사건에 대해 여러 가설이 떠도는 중이며 그중에서도 여행에 심취한 할머니들이 마을까지 와서도 내리지 않겠다며 버티다 결국 하루 더 놀다 왔다는 가설과 기사와 팁 문제로 시비가 붙어 반나절간 납치를 당했다는 가설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당사자인 안온마을의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본지에 매우 협조적인 김 모 할머니조차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온천은 꼭 한번 가봐야겠더라.’는 한마디로 심정을 대변하며 이 미스터리한 여행은 영원히 비밀로 남게 되었다. 이에 본지의 기자는 사명감을 가지고 제보를 받고자 소정의 상품을 걸었으니(문화상품권 5만 원, 사용처 보석책방. 그 외 절대 사용불가.) 이 사건의 전말을 아시는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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