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나는……”
“클로틸드 영애는 내 약혼자로서 영지에 도움을 주기 위해 먼 길을 오셨네. 나를 대하듯 질문에 성심성의껏 임하게.”
“예, 예예. 알겠습니다!”
다미안이 딱 잘라 정리해 주니 젤던 남작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걸 보면 참 폴리우스하고 비교된단 말이야…… 폴리우스는 눈치가 엄청 없었는데.
‘아까 나한테 인사도 묘하게 늦더니만.’
인간적으로 마차에서 같이 내렸는데 뒤늦게서야 알아차린 듯 구는 것도 웃기긴 했다.
무슨 모양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
“여하튼 벨데르트 백작님이나 폴리우스 도련님이 이웃 영지와 제대로 협상하는 건 기대하기 힘듭니다.”
선대 때부터 삐끗하던 영지 운영은, 현 벨데르트 백작이 영지를 물려받은 이후로 제대로 기울었다.
최근에는 폴리우스가 사고 친 걸 수습하느라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래서 이웃 영지가 벨데르트 영지를 집어삼키려고 물길을 막은 건가?’
들여다보니 물길 하나만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일단 가장 시급한 건 물 공급 문제다.
“그래도 최근 비가 내려 줘서 이만큼 버틸 수 있었던 거지, 이대로라면 큰일이 날지 모릅니다.”
“막은 물길을 튼다고 해 봤자, 이웃 영지에서 물길을 가지고 계속 귀찮게 굴 텐데.”
“그렇습니다. 사실 물길로 넥크스 영지와 싸운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요.”
다미안 마탑주는 그 말을 듣고는 큰일이라며 중얼거렸다. 나도 생각에 잠겼다.
‘어찌어찌 협상을 잘 끝낸다고 해도,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나?’
벨데르트 영지에 오면서 나도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성녀가 나의 제1의 목적이긴 했지만, 다미안과 벨데르트 영지민을 돕고 싶은 내 마음도 진심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도를 보며 생각해 왔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웃 영지와 굳이 씨름할 필요 없이, 새로운 물길을 만드는 건 어떤가요?”
“예?”
“이쪽으로 흐르는 강줄기가 굳이 하나일 필요는 없잖아요. 마탑주님의 능력이면 할 수 있어요.”
물론 보통 물길을 새로 만든다면 예산 같은 건 둘째 치고, 어마어마한 시간이 들 거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마탑의 우두머리.
소설을 읽은 나는 다미안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졌는지 잘 알았다. 아마 보통 사람들보다 더.
“새, 새로 물길을 만든다는 게 가능합니까?”
“네, 마탑주님이라면 할 수 있어요.”
나는 젤던 남작의 물음에 대신 대답했다. 소설 최종 보스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내 말에 화색이 된 젤던 남작이 이어서 물어왔다.
“그, 그런데. 클로틸드 영애님. 넥크스 영지가 아니라면 강물을 어디에서 끌어옵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혹시, 에잉턴 영지를 말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럼 다른 곳이 있나요?”
“허, 그럼 그렇지!”
아까까지만 해도 밝은 표정이었던 젤던 남작은 이내 혀를 차며 얼굴을 굳혔다.
“약혼을 하셨다고 하지만, 이쪽의 사정에 대해 별로 잘 알지 못하시는군요. 에잉턴 후작가는 분명 다미안 도련님의 외가지만……”
젤던 남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눈을 부라렸다.
“지금 무슨 무례지?”
“허업.”
하지만 나에게 날을 세우는 것보다, 다미안 마탑주가 젤던 남작을 저지하는 게 빨랐지만 말이다.
“애초에 클로틸드 영애는 여기서 자라기라도 한 나와는 달리 아무런 의무도 없다. 아니, 그것보다 영애는 내……”
“잠시만요,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뭐, 이제는 누가 기어오르는 걸 참을 정도로 내가 호구는 아니긴 한데.
어차피 계속 볼 사람도 아니고, 나와 다미안 마탑주는 계약 약혼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굳이 아랫사람의 기강 같은 거 잡을 필요 없다.
이번에 만난 이후로는 볼 일 없는 사람이니까.
나는 입에서 쓴맛을 느끼며 다미안 마탑주에게 말했다.
“사이가 안 좋다지만, 그래도 넥크스 영지에 계속 끌려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협상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몰라도, 이미 벨데르트 백작님과 폴리우스가 말아먹어 놓은 판국을 다시 뒤집기는 힘들 거예요.”
그래서 넥크스 영지가 아닌, 에잉턴 영지에서 흐르는 강에서 물줄기를 새로 끌어오자는 거다.
물론 에잉턴 영지 역시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물길을 새로 뚫으면 지금처럼 전적으로 넥크스 영지에 휘둘려야 하는 상황보다는 훨씬 선택지가 다양해질 것이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다미안 마탑주도 그것을 알았다.
“도련님!”
옆에서 젤던 남작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았지만, 다미안 마탑주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제가 에잉턴 후작가에 가겠습니다.”
“저도 같이 갈게요.”
“방금도 말했지만, 영애는 굳이 의무를 질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물길을 다른 곳에서 끌어오자는 아이디어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뇨, 저는 마탑주님의 약혼자잖아요.”
일시적인 약혼자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약혼자임을 상기시키는 내 말에 다미안 마탑주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가라앉아 있던 붉은 눈, 나라는 사람을 이유로 잔물결이 일었다.
“그러니까 혼자 힘든 일을 하게 할 수는 없어요.”
에잉턴 영지를 입 밖에 꺼낸 이상, 다미안 마탑주를 혼자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발언한 사람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요? 어쩌면 클로틸드 공작가의 영애인 제가 협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요.”
공작가의 위세보다는, 사실 다미안 마탑주에게 힘든 길을 가도록 말해서 미안해서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이런 속내를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치켜들고, 다미안 마탑주와 눈을 지그시 마주쳤다.
“……에잉턴 후작가는 제 외가지만 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같이 갔다가 험한 말을 들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같이 가요, 우리.”
따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미안 마탑주에게 내 마음이 전해졌으면 했다.
내가 호구여서는 아니고…… 다미안 마탑주에게 평소에 신세 진 게 많아서 그렇다.
“제가 지금 아프지 않은 것도 다미안 마탑주님 덕분이고. 저도 은혜를 갚고 싶단 말이에요.”
고집스러운 내 모습에 다미안 마탑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 가능하다면 물길을 새로 만든다는 건 좋은 생각 같습니다.”
젤던 남작은 이런 우리를 보고 알 수 없다는 모습이었으나 어쨌든 사태가 진척되려 하자 기뻐했다.
이번에는 일단 나를 포함해 감사 인사를 한 거다. 그래, 일단은 이걸로 됐다.
* * *
우리는 에잉턴 영지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다행히 벨데르트 영지와 인접한 곳이라 그다지 멀지는 않았다.
마차를 오래 탈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사실 외가와 사이가 안 좋은 다미안 마탑주가 걱정이지.’
다미안 마탑주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영애가 보시기에는 안 좋은 광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조금 바라보는 방향이 다른가. 왜 여기서 내 생각을 한담?
“저보다 마탑주님이 걱정이지요. 엉뚱한 생각을 하시네요?”
“……영애는 아버지 되시는 클로틸드 공작님과 사이가 좋으시니, 보고서 놀랄지 모릅니다.”
“제 생각보다는 마탑주님을 먼저 생각하세요. 저야 아무래도 괜찮잖아요.”
“…….”
긴 침묵 끝에, 다미안 마탑주가 입을 열었다.
“그다지 재미는 없겠지만, 케케묵은 이야기 하나 들려드릴까요. 사실 제 외조부님, 외조모님 되시는 에잉턴 후작 내외는 저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별거 아니라는 듯 여상하게 꺼냈지만 별거 아닐 리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다미안 마탑주가 남들에게는 하지 않은 이야기임을 짐작하고 자세를 반듯하게 했다.
“그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사실 벨데르트 백작가는 인망이 두터운 가문은 아니었다.
크고 잦은 사고들을 끊임없이 일으키며 소문을 몰고 다니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선대 벨데르트 백작의 첫째는 어머니를 닮은 것인지 웬일로 반듯하고 우아하게 자라 주변에서 탐내는 신랑감이 되었다.
에잉턴 후작 부부도 첫째라면 제 딸과 이어져도 괜찮겠다 싶어 혼담을 넣었다.
그러나 첫째는 몇 달 후 사고로 죽었다.
차기 백작도, 에잉턴 후작 영애와의 혼담도 모조리 둘째의 몫이 되었다.
둘째가 아니라 형을 보고 혼담을 넣었지만, 혼담은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가문과 가문 간의 이야기.
선대 벨데르트 백작은 에잉턴 후작가에서 온 혼담을 파기할 이유가 없었다.
둘째는 기품 있는 백작 부인을 형과 겹쳐 보며 열등감을 느꼈다.
“당신은 내 형이랑 비슷한 부류야, 알아? 사람 깔아 보는 눈빛을 하잖아!”
“말도 안 되는……”
“사람 심기 거슬리게 하지 말고 입 다물어!”
사이좋은 부부는 아니었지만 귀족의 결혼은 사랑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어차피 귀족 간에 부부끼리 한방을 쓰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는 후계자가 될 아이인 다미안이 있었고,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나 다미안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죽고 벨데르트 백작이 된 둘째는 이제 남들의 눈치는 볼 필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미안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정부인 밀라 부인과 폴리우스를 집으로 데려왔으니 말이다.
“네가 말로만 들었던 내 형이구나? 잘 부탁해! 친하게 지내자!”
그러나 형이라고 하기에는 묘한 데가 있었다.
동생이라며 찾아온 폴리우스는 다미안과 동갑이었다.
시기상, 밀라 부인은 벨데르트 백작 부인의 배 속에 다미안이 있었을 때 마찬가지로 폴리우스를 임신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