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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28화 (28/78)

〈 28화 〉 겜알못 예지

* * *

올라온 3층은 뽀얀 먼지가 가득했었는데 얼마나 심각한지 손전등의 빛에 무수하게 비칠 정도로 먼지가 엄청났고 그 때문인지 공기가 탁하게 느껴졌다.

딱히 답답한 느낌은 없는데 시각적인 효과 때문에 탁하게 느껴지는 걸까?

스스로 생각해도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가설인 것 같다.

[걸려있는 옷가지들도 뒤져야 함]

[거기 주머니에 템 나옴]

[그거 구림]

“아이템 가치는 말하지 마시고 파밍 위치만 알려주세요…”

[ㅇㅋ]

[ㅇㅇ]

걸려있거나 떨어져 있는 옷가지들을 주워 주머니를 뒤적이니 성냥, 나사, 열쇠 따위가 나왔는데 별로 가치는 없어 보였다.

바지를 뒤적이니 말보로 담배가 나왔길래 그냥 바닥에 휙 던져버렸다.

여긴 가치 있는 게 별로 없어 보이네.

일단 나중에 비싸 보이는 게 보이면 버리면 되겠지 싶어 잡동사니를 쓸어 넣었다.

방을 뒤지다 보니 아기 그림이 그려져 있는 초콜릿도 보여서 뜯어 먹어보니 초콜릿 특유의 달콤한 맛과 향이 느껴졌다.

가상현실에 미각도 구현하다니 생각보다 엄청난 세계였다.

그런데 여기 건물은 잡동사니 밖에 없네.

이곳을 더 파밍 하는 건 시간 낭비로 느껴져 1층에 내려가 대충 방들을 뒤진 다음,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왔다.

느긋하게 풀밭 위를 날아다니며 짹짹 울고 있는 새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호기심 많아 보이는 다람쥐가 나무에서 내려와 내 옆을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런 자연 속에서 나는 길을 따라 거닐었다.

정차 해있는 버스와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건너편에는 창고인지 공장인지 모를 건물들이 보였는데 큼직한 컨테이너들이 많이 보였다.

버스 터미널은 파밍지로 적합하지 않아 보여 거대한 빨간 창고로 가까이 갔다.

건물은 곳곳이 녹슬고 낡았지만 아직은 그 목적을 수행하기 충분한 듯 보였다.

그저 건물의 디자인이 컨테이너를 건물로 지었다면 이렇게 생겼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특색이 없을 뿐이었다.

뭐, 그만큼 낡고 큰 건물이라는 소리다.

문 안에 들어가니 창고 안쪽은 많은 상자와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이곳은 꽤 쓸만한 파밍지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상자를 열어서 전동 드릴이나 드라이버를 가방에 쑤셔 넣다 보니 어느새 가방은 가득 차 부피가 매우 커지고 꽤 묵직해져서 내 몸무게보다 무거워 보였다.

근데 내 몸무게가 얼마나 되더라?

몸무게보다 무거워 보인다면서 내 몸무게도 모르다니 우습지 않은가.

생각 좀 해보니 딱히 알 필요는 없네.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와 컨테이너의 문을 열려고 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컨테이너 측면에 창문이 세 개쯤 달려있어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 봤지만 안쪽이 어두워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혹시 열쇠들이 있는 이유가 이거 때문인가?

아까 뒤져서 나왔던 열쇠 세 개를 열쇠 구멍에 맞춰보려고 했지만, 세상일이 그리 쉽게 풀릴 리가 없다는 듯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다.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빨간 창고를 나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요..?”

[지금 돌아가면 딱 될 듯]

[40분 남음]

[람쥐 썬더 이제 안 보이네]

엄청 많이 남았네.

내가 파밍한 템이 가치가 있는지 차향님이나 임뿌님한테 가서 확인해볼까.

두 분 어디 계시지?

내 뒤편에서 차 소리가 들려오길래 뒤를 보니 길가를 따라 차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차가 오길래 옆으로 비켜 섰다.

이 게임에 차도 있었구나.

그런데 날 지나가지 않고 내 옆에 차가 딱 서더니 뒷좌석의 창문이 열리며 누군가 얼굴을 드러냈다.

차향님이었다.

“차향님 차도 가지고 계셨어요?”

“아니에요. 아직 차는 못 만들었고 이건 택시! 빨리 타요!”

뒷좌석의 문을 열고 옆자리로 가는 이차향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택시에 탔다.

“파밍 많이 했어요?”

“저 템을 하나도 몰라서…. 일단 많이 챙기긴 했어요…!”

열어서 봐도 되냐고 묻길래 그러라고 가방을 넘겨주었다.

지이익­

내가 파밍 했던 지포 라이터, 우유, 성냥, 나사, 호스, 전선, 건전지, 램프, 모터 같은 물건들이 가방에 가득했다.

“어때요..? 괜찮은 아이템이 보이나요…?”

기대하며 물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처참했다.

“어… 이게 끝인가요?”

“네…? 네….”

“모터가 부피가 커서 그런지 가방을 다 차지했네요.”

“모터는 비싸지 않나요…?”

“아쉽게도 그렇게 비싸지 않아요! 괜찮아요~ 잘했어요! 잘했어!”

이차향님이 내 가방을 뒤적거리며 찾다가 갑자기 허공을 보며 누군가랑 대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채팅창 읽고 계신 건가?

“3,000만이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기도 이제 알았나 봄 ㅋㅋㅋㅋ]

[거의 우승이긴 했지 ㅋㅋㅋ]

[정보) 이 게임 최고의 고가치 아이템]

“레드키를 버렸다고? 말도 안 돼!”

키? 내 주머니에 있는 열쇠들을 말하는 걸까.

열쇠 세 개를 꺼내 이차향님에게 건네드렸다.

“키 안 버렸는데…? 주워왔어요…”

“이 키 말고 혹시 카드 같은 거 못 보셨어요?”

카드…?

없지…. 갑자기 머릿속에 바닥에 카드를 뻥 찼던 것이 기억났다.

어…? 어?

설마 그건가..?

“잡템인줄 알고…”

“알고?”

“걷어찼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그때 마크방 왜 열려있었지? 누가 마크방 열어 놓고 바닥에 레드키를 안 주울 리가 있나.]

­예바지보님의10000원 후원!

바보

[뉴비라서 어쩔 수 없지 ㅋㅋㅋㅋ]

[ㄹㅇ 나는 뉴비 때 웹케 구린 줄 알고 버렸었지]

­이게바로님의 20,000원 후원!

이게 말로만 듣던 굴러 들어온 복을 내 발로 걷어찬다는 건가요?

[진짜 차긴 했지 ㅋㅋㅋㅋ]

구부러져 있던 귀여운 토끼 귀가 하늘 위로 바짝 솟아 오르며 차향님의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반응을 봐선 내가 엄청나게 비싼 아이템을 걷어찼으리라 짐작되었다.

아마 그렇겠지..?

“어디서요!”

“어… 바닥에 이상한 마크가 그려진 이상한 방에서요..?”

차향님이 기숙사에 내려달라고 택시한테 말했고 택시 NPC는 별 말 없이 택시의 방향을 전환해 내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차향님은 배낭을 메고 문을 열어 쏜살같이 뛰어나갔고 나도 그 뒤를 따라 뛰었다.

차향님이 철로 만들어진 기숙사 계단을 캉캉 소리를 내며 뛰어 올라가 2층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고 그 뒤를 따라 내가 들어오니 그 이상한 그림… 아니, 마크 방이 보였다.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촛불들이 놓여있던 마크 방의 바닥에는 아까와는 달리 여러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차향님과 내가 열심히 뒤졌지만, 아까의 빨간 카드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없지 ㅋㅋㅋ]

“아이고, 다른 사람이 가져갔나 봐요. 마크 방은 인기가 좋거든요!”

“죄송합니다…”

나 때문에 게임이 지게 생겨서 시무룩해졌다.

“어차피 밥 한 끼 정도밖에 안 걸렸는데 그렇게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응흐흐흫”

아까 레오루 띠몽의 웃음소리가 버그인 줄 알았더니 차향님의 웃음소리였구나!

웃음소리 엄청 특이하시네.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자 차향님이 내 눈을 마주쳐왔다.

난 화들짝 놀라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실례였을까?

“부끄러움이 많으시네.”

“아… 아니에요.”

“우리 빨리 파밍 하러 가죠!”

따라오라며 차향님이 후다닥 뛰어 내려가 건물 밖으로 향하길래 나도 뒤따라갔더니 어느새 건물 밖 담벼락 쪽에 택시가 한 대 서있었다.

택시가 은근히 많구나.

“우리 기지 근처가 우드라는 맵이거든요. 우드 쪽에서 파밍 하다가 돌아가죠.”

그런데 차향님은 나보다 나이가 많으실까?

적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저… 차향님…?”

“넹?”

VR 기기가 불편한 점의 자기 외모를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 보니 다른 사람의 나이를 추측하기가 영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보다 키와 덩치가 작고 목소리도 앳된 목소리라 그런지 대단히 어려 보이셨다.

나보다 어리게 보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VR 기기로 외모 변형은 어느 정도 가능하더라도 목소리는 아니니까.

“혹시 저보다 나이가… 어리신가요…?”

“엥?”

차향님이 당황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마자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아… 아니, 어…. 언니셨군요!”

“제 어디를 봐서 어리게 보신 건데요?”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목소리.

차향님은 기분이 좋은 듯 눈매가 가늘어지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기분이 상한 건 아니었나?

사람과의 대화는 역시 어려워.

“목소리도 앳되시고…어… 아담하셔서…”

“에이, 그렇게 칭찬해도 뭐 안 나와요~”

“지..진짠데.. 그리고 말 놓으세요…”

“우리 그럼, 말 놓을까요?”

“네…”

“말 진짜 놓을게요?”

“네…!”

차향님은 나에게 처음 만났는데 몇 달은 만난 것 같은 친근한 기분이 들어 이상하다고 말했다.

난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차향님은 그렇게 느낀다니 뭐…

근데 초야 언니나 차향 언니도 그렇고 다들 처음 만난 나한테 엄청 친근하게 대한단 말이지.

분명 처음 만났지..?

딱히 상관은 없지만 신기했다.

도착했는지 멈추는 택시에서 내렸다.

우리 기지 근처라서 그런지 울창한 숲 속에 펼쳐진 설원이 보였다.

“차향님 이제 어디에…?”

“말 놓기로 했는데 왜 그래요~ 초야 언니한테는 잘만 언니라고 부르더니.”

“차…차향 언니..”

응흫흐흫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던 차향 언… 님이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어디론가 갔다.

“여기 나무 밑에 잘 보면 히든 스태쉬라고 장독대가 있거든 잘 봐.”

오른쪽의 나무에 가까이 다가간 차향님이 눈을 살살 파내자 검은 뚜껑이 모습을 드러냈다.

[15분 남음]

[차향 언니~]

[아직 예지가 10만밖에 파밍 못한 게 ㄹㅇ입니까]

[ㅋㅋㅋ]

거기서 나온 아이템은 내가 파밍한 아이템이랑 별다를 거 없어 보이는 물건들이 나왔다.

사과 주스에 통조림 그리고 총알.

“아 템 좋은 거 안 나왔네.”

그렇게 차향님은 날 데리고 눈에 파묻혀 있는 장독대들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며 거기서 본 적 없는 템들을 덥석덥석 끄집어냈다.

나도 호기심이 생겨 차향님이 파고 있는 옆에서 눈을 파보았지만 맨땅이었다.

역시 아무 데나 판다고 나오는 건 아니구나.

하기야 그러면 말도 안 되겠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웃다가 장독대에 나온 아이템을 보고 깜짝 놀란다.

“오! 낙하산 줄! 이거 가격 좀 되지 않나?”

“어… 와아..!”

“여기 기름 통도 있어!”

[나름 괜찮음]

[나름 괜찮은 게 아니라 엄청나게 잘 나왔는데?]

[올ㅋㅋ]

“이제 돌아가자.”

기지로 복귀하니 임뿌님은 벌써 와있었고 상대편도 정란이 빼고는 모두 도착한 것 같다.

“비령이 얜 왜 안 와! 맨날 지각이야.”

“곧 오겠지.”

“우리끼리 템 까고 있죠? 저부터 열겠습니다.”

임뿌님이 가방을 열고 바닥에 내용물을 쏟아부으니 컴퓨터 부품으로 보이는 것들이 와르르 바닥에 흩어졌다.

“자, CPU랑 CPU 팬 그리고 SSD…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래픽 카드! 이건 못 이기지.”

컴퓨터 부품들이 비싸구나.

임뿌님이 아이템들을 손으로 집자 허공에 아이템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반복하더니 80만 이라고 말했다.

나랑 차향님도 쏟아내서 측정하니 우리 둘 합쳐서 90만원 나왔다.

170만이네.

이 정도면 꽤 괜찮게 나온 건가?

뒤이어 냥지와 쥬벳트가 아이템 가치를 확인하니 120만 정도로 우리가 매우 우세했다.

정란이가 60만 원을 파밍 한 게 아니라면 우리 쪽이 이기는 건데 여태 정란이의 게임 실력을 생각해보면 이쪽이 이겼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에에에에에엥~ 화나나연~ 화나나연~ 난 한우! 한우!”

“언니 우릴 생각해서 한 끼 사려고 했다니 난 그것도 모르고…”

차향님과 임뿌님이 냥지와 쥬벳트를 열심히 도발했다.

“야… 비령이 왜 이렇게 안 와! 지금 몇 분 남았어!”

“2분…”

“오오오오~ 나 왔어 얘들아!”

저 멀리서 급하게 뛰어오는 정란이가 곧바로 도착했다.

근데 내려놓은 가방이 심상치 않다.

멀리서 보여도 홀쭉했던 가방은 내려놓으니 빈약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놓였다.

뭐가 들어있긴 한 건가..?

“야이씨! 너 뭐 하고 왔어! 가방이 왜 이따위야!”

“정란아!!!”

“난 누나가 해낼 줄 알았어.”

“예에~ 우리가 이겼다!”

정란이가 도착하자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근데 정란이의 표정의 기세등등한 게 심상치 않았다.

“나도 가끔은 잘할 때가 있다고!”

“뭘 잘해! 상대편 이기게 해주는 걸 잘한다는 뜻이냐?”

“야! 이정란! 가방 안에 왜 먹을 거 밖에 없어! 짐 싸서 뭐 소풍 갈 거야?”

냥지와 쥬벳트님의 맹렬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정란이가 호주머니에서 빨간 카드를 쓱 꺼냈다.

저...저거 설마...!

“와! 뭐야? 살다 보니 정란이 캐리를 다 받아보네!”

“레드키! 정란아, 사실 믿고 있었어!”

[ㅋㅋㅋㅋㅋ 저거 예지가 걷어찬 레드키임 ㅋㅋㅋ]

[예지가 동물 구경하면서 내려갈 때 반대쪽에서 비령이 들어가서 주워옴 ㅋㅋㅋㅋ]

[장하다 서예지!]

[예지는 항상 캐리만 해 ㅇㅇ 물론 팀 캐리만 한다고 안 했음]

아앗… 이게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고…?

어쩐지 발자국이 이상하더라…

어린애 발자국이 찍혀있길래 뭔가 했더니…

결국 우리 팀의 패배로 끝나고 나중에 밥이나 쏘기로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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