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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29화 (29/78)

〈 29화 〉 피셀

* * *

정우라는 분이 오실 때까지 만월이 기울은 밤 아래에서 냥지랑 차향님이랑 낚시를 했다.

부둣가의 불 꺼진 등대 밑에서 하는 낚시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정우님이 요원이라서 특정한 시간대에만 만날 수 있다고 하던데 진짜 요원인 걸까?

어떤 사람일지 기대됐다.

요원은 영화에서만 봤는데 이곳에서는 요원들도 스트리머가 가능한가 보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웃는 거지.

“자연과 한몸이 되었어.”

냥지가 힘차게 낚아 올린 송사리를 다시 바다에 풀어주었다.

난 이런 고요함이 항상 좋았다.

최근 친구들의 소란스러움도 좋아졌지만, 항상 익숙했던 것은 고요함이니까.

방금 낚아 올린 가죽 장화를 옆에 휙 던져 놓는다.

반쯤 줄은 시청자들도 평소와는 달리 조용하게 채팅을 쳤다.

사실 시청자가 반쯤 준 이유는 방종이라 말하고 방종 하려는 찰나에 냥지가 만날 사람이 있는데 만나고 가라고 해서 방종을 잠깐 미루었다.

모르고 나간 사람도 있지만, 딱히 상관없지 않을까.

게임은 끝나고 낚시하면서 잡담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음… 생각해보니 저스트 채팅도 이런 식 아닌가?

저스트 채팅 방송과 낚시의 차이는 무엇일까.

“언니 저 연어 낚았어요.”

“오~ 연어 맛있지.”

그런데 여기 디렉터가 리얼리티는 엄청나게 따지면서 꼭 이런 부분은 리얼리티랑 거리가 많이 멀단 말이지.

바다에서 민물고기가 낚이는 것을 보면 여기 디렉터는 사실 전투와 총기에만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봐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고 있다.

아니면 편의성 때문에 그런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지난번에 디렉터가 말하는 것을 찾아 봤는데 항상 총기, 상호작용 이런 소리만 늘어놓더라.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렇게 느긋하게 낚시하니 괜찮다.”

“그러게요.”

“저도 마음이 편안해져요…”

“오, 예지는 이런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나 봐?”

“항상 이런 분위기여서 아니면 오히려 어색하더라고요… 그래도 최근 친구들이랑 시끌벅적한 분위기도 좋아진 것 같아요…”

내 말을 끝으로 우린 조용히 낚시에 집중했다.

아까부터 내 자리는 유독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기분이라 차향님과 냥지 사이에 끼어서 낚시찌를 다시 던졌다.

미끼가 안 좋은 건가?

냥지가 받침대에 자기 낚시대를 걸어 놓고 내 팔에 팔짱을 끼며 조용히 바다를 구경했다.

게임이라서 그런지 바다는 그 속이 훤하게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고 깨끗해서 제법 운치가 있었다.

관광지에서 볼 법한 바다를 게임에서 볼 수 있다니.

물론 게임은 게임이라 그런지 보이지도 않던 장화가 갑자기 낚이기도 하지만 맵 하나는 진짜 잘 만들었다.

어차피 안 낚이는데 나도 받침대에 낚시대를 걸고 냥지 옆에 붙어서 물 아래에 수영하고 있는 물고기 구경이나 했다.

파도가 넘실거리며 예쁜 물고기들이 파도에 떠밀려 통통 튀어 올랐다.

관상어인가?

달빛이 파스스 부서져 빛나는 파도를 멍하니 구경했다.

차향님도 운치를 즐기기 위함인지 우리 옆에 합류했다.

그렇게 우리 셋은 옹기종기 모여서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런데 방송인데 이렇게 해도 되려나?

스트리머들은 시청자들을 지루하게 만들면 안 되는 직업이기에 조금도 쉬지 않고 입을 계속 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청자들은 나가고 말 테니까.

오죽하면 사이버 광대라고 불렸겠는가.

“스트리머 3명이 모여있는데 이렇게 조용한 적은 오랜만이네.”

“하기야 우리 애들은 또 다들 입이 쉬지 않아서.”

“시청자들도 조용하네요…”

[이런 맛도 있는 법이지]

[나도 여행 가고 싶다 ㅋㅋㅋ]

[이런 거 보면 밸보가 여행하는 게임 만들어도 꽤 괜찮지 않나?]

[그럴 듯]

정란이가 보고 싶어지네.

요즘 방송에서도 현실에서도 정란이를 별로 만나지 못했는데 거리가 멀기도 하고 정란이가 밖에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얼굴 보는 게 쉽지 않았다.

예화는 근처에 살기도 하고 얼마 전에 만났으니까.

초야 언니랑 수양이는 어디에 살까?

친구들 생일이 언제지?

괜히 잊었다가 나한테 서운해 하면 좀 슬프니까 미리 알아둬야겠다.

설마 이미 지나간 건 아니겠지.

“오늘 근데 꽤 일찍 방종 하려고 했네?”

“음, 그냥…?”

이런 풍경을 즐기려는 사람은 우리 뿐만이 아니었는지 금발 머리의 외국인 여자가 우리에게 짧게 인사하며 구석에 앉았다.

나랑 키는 비슷한데 저 외국인의 뼈대가 굵어서 그런가? 덩치가 엄청 커 보여서 차향님이 작은 아이처럼 보였다.

“정우는 언제 오지?”

“이제 곧 올 것 같은데요?”

주변을 살펴보다가 구석에 앉아있던 외국인과 눈이 마주쳤다.

근데 저 외국인 왜 날 저렇게 유심히 보는 걸까.

부담스러워서 모른 척 고개를 슬쩍 돌렸다.

“혹시 테일리?”

“누구세요..?”

“팬이에요! 전 크라이 선수 지망생인데 프라와의 경기에 감격했습니다.”

실제로 팬을 만난 적이 없어서 약간 부끄러웠다.

“안녕하세요…”

“어머, 예지 인기 좋다아~”

[예지가 해외에서는 인기 엄청나더라]

[솔직히 인지도에 비해 팬을 너무 못 만나기는 했음 ㅋㅋㅋ]

[저격도 없었지?]

차향님이 날 보면서 냥지랑 수군수군 말했다.

“당신의 대단한 무술에 감동했습니다. 내가 크라이 프로 선수로 데뷔할 수 있을까요?”

“어… 처음 봐서 그렇다고 말해드릴 수가 없네요… 그래도 파이팅..!”

“그 기술 써줄 수 있어요? 한번 그 기술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반격할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맞고 싶어 하는 여자 ㄷㄷ]

[헤으응]

어… 여기서?

뒤에서 친구들이 초롱초롱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 상황에서..?

심히 부담스럽다.

냥지를 보며 말려주길 기대하며 눈치를 봤지만 냥지는 오히려 구경하고 싶었던 건지 차향님이랑 서로 팔짱을 끼고 쭈그려 앉아 있었다.

“여기서요…?”

“네!”

“한 번 만이에요…”

자세를 잡자 먼저 달려든 팬이 내 왼쪽 팔을 붙잡아두려고 손을 뻗어오지만 그대로 피해내며 행복 잡기로 그녀의 어깨에 올라타 허벅지 사이에 그녀의 머리를 끼웠다.

풀어보려는 듯 양손으로 날 붙잡으려고 하지만 몸을 비틀어 바닥에 내려 찍었다.

근데 이 모드에서 전투는 안된다고 하지 않았어?

뒤에서 감탄의 소리가 들려온다.

[캬 진짜 일품이긴 하다]

[나 이거 관장님한테 말하니 애니 좀 그만 보라던데 ㅅㅂ]

바닥에 머리를 찍힌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손을 붙잡고 말을 총알같이 뱉어냈다.

“역시 대단하다! 내 멘토가 되어 주세요! 나 아직 가르침이 부족하다. 동양에서의 가문은 특별한 시험이 존재하는지?”

“가.. 가르칠 실력은 안 돼요… 그만… 그런 시험 없어요..”

“그렇다면 가끔 게임에서 지도해줄 수 있습니까?”

“알겠으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나의 멘토다! 당신의 상냥함에 감동이에요.”

느닷없이 나한테 친구 추가를 걸고 나가버렸다.

얼떨결에 수락을 누르니 친구 창에서 그 사람의 상태에 크라이라고 뜬다.

뭐야…?

크라이 유저들은 전부 프라 같은 성격의 사람들이 하는 게임인 거야?

프라도 그렇고 저 사람도 그렇고 크라이 유저들은 되게 저돌적이고 전투민족 같았다.

이름도 모르는데 친구가 생겼어…

“와… 클립에서 봤을 때는 대단하긴 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눈앞에서 보니까 엄청나네.”

“나 앞으로 예지한테 까불면 안 되겠다.”

“차..차향님..!”

“언니 취급도 안 해주잖아. 큰일 났어…”

“언니 우리 이제 조심해야 해요.”

내 주변 사람은 왜 이렇게 야리돌림을 좋아하는 거야!

장난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언..언니…! 그만 놀려..!”

되도록 언니라는 호칭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는데!

“응핳하하하하”

“맞죠. 언니? 예지가 타격감이 좋아.”

“잏핳하핳”

[쥬벳트 : 예지님이 냥지님한테 맞고 다니는 게 아니냐고 했었는데 알고 보니 냥지님이 위험하네요.]

“안 때려요..!”

“어, 정우 왔대.”

“난 그럼 이제 슬슬 방종할 게~”

“언니 들어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다들 다음에 봐~”

스캐빈저 콜을 종료하고대기룸으로 빠져나왔다.

아까와는 다르게 대기룸의 카페 배경은 밤이 되어 있었고 아까의 고양이 소녀가 내 옆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주문하면 돼.”

“어…”

“내가 해줘? 카페 라떼 한번 마셔봐. 카페 라떼랑 카라멜 마끼아또.”

고양이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통통 튀며 어디론가 들어갔다.

VR 게임은 최고의 다이어트 아닐까?

맛있는 건 여기서 실컷 먹고 현실에서는 대충 끼니를 때우는 거지.

냥지가 의미 없이 손가락으로 내 손가락들을 툭툭 친다.

나도 손가락으로 냥지 손가락을 툭툭 건들며 의미 없는 장난을 치고 있을 때 정장을 입고 중절모를 쓴 남자가 걸어왔다.

과연 요원인가…!

사람들이 요원이라 부르고 저런 복장을 하고 있으니 뭔가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요원..!”

“응? 풉!”

냥지가 내 말에 고개를 숙이고 끅끅 웃는다.

응?

정우라는 사람이 내 반대편에 앉아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까 요원이라고 하시던데…”

“냥지도 그렇고 다들 정우님이 요원이라고 하길래…”

끅끅 웃던 냥지가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사회복무요원… 끅…”

아… 여기도 아직 사회복무요원이 남아있었구나…

[Social Service Agent;;;]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외국인한테 사회복무요원이라고 하면 엄청 놀란다ㅋㅋ]

[여태 요원이라는 말을 진짜 믿고 있었네 ㅋㅋㅋㅋㅋ]

“예지님 첫인상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죄..죄송합니다..!”

“우리 사장님 속이 아주 좁으시네.”

“어허! 지금은 사장이 아니잖아요.”

“자, 이제 면접을 시작합시다.”

면접..!

내가 봤던 면접은 편의점 알바 면접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떨어졌지만.

내 성격 때문에 그런지 알바를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장님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손님한테 제대로 인사도 못 하는 알바생을 누가 좋아하겠냐마는…

이번에는 제대로 면접을 보자…!

“자, 예지님의 매력을 말해보세요.”

“어….”

내 매력?

어… 싸움을 잘한다? 노래는.. 모르겠는데 주변에서 잘 부른다니까…

생긴 건 예쁘다..?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데…

“어…..”

“5, 4, 3, 2”

갑자기 시간을 세기 시작하자 조급해져서 아무 말이나 했다.

“예…예쁘다?”

“와, 맞는 말인데 본인이 말씀하시니 진짜 재수 없으시네요.”

힝…

“노래를 잘한다…?”

“노래 진짜 잘하긴 해.”

냥지가 옆에서 거들면서 편들어주자 자신감이 조금 생기는 것 같았다.

에..엣헴.

“그럼 노래 한 곡 뽑아봅시다.”

불러 보라니까 얼떨결에 일단 한 곡 뽑아보긴 했다.

장난스럽게 말하던 정우님도 감탄한 얼굴로 손뼉을 짝짝 친다.

“진짜 예술이다. 가수 하지 그랬어요.”

“감사합니다…”

“이거 나중에 피셀에서 단체 곡 하나 부를 예정인데 동의하시죠?”

“네…”

[솔직히 얘 너무 만능임. 노래가 특출나고]

[근데 이런 애가 여태 소속사가 없었다고? 아무도 제안 안 했음?]

[메일로 수백 통 왔는데 한 번도 안 봤다는 것에 한 표 ㅋㅋㅋ]

[설득력 있네]

“그리고 본인 캐릭터가 없더라고요. 나중에 상품 팔 때 본인 홍보할 때 요즘에 필요하니까. 하나 만드시는 게 좋고… 이거 근데 분명 냥지님이 말해주시지 않았어요?”

“어…? 음….”

“또! 또! 또! 백날 이야기해도 다 까먹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휴!”

말했었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시무룩해져서 냥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니 냥지가 한숨을 푹 쉬며 내 볼을 꼬집었다.

[퐉스련;;]

[눈매 보고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고양이가 맞았다. 고양이들 특기 나오네 ㅋㅋ]

[외모로 용서받기 ㄷㄷ]

“아…아…하히마…”

“외모가 아주 무기지! 분명 내가 이거 쉬는 날마다 말했었다.”

“요망한 퐉스련이시네.”

“종이만 내밀면 보는 시늉만 해.”

다행히도 장난스럽지만 친근한 태도의 정우님이랑 친해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송하는 사람들은 다들 착한 사람인가?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오늘 난 정식으로 피셀 소속이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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