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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54화 (54/78)

〈 54화 〉 여러 의미의 행복잡기

* * *

자고 일어나서 느낀 건데 은초향이란 애는 정말 끝내주게 잠을 잘 자는구나 싶었다.

잠버릇은 없는 것 같은데 곤하게 자길래 얼마나 피곤하면 그럴까 싶어서 방치했더니 5시까지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아서 깨울 수밖에 없었다.

거의 하루 내내 잘 기세였는데 내버려 두면 언제까지 자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네.

그렇게 종일 자고 일어나자마자 하는 말이 웃겼는데 걔 말로는 여태 잤던 날 중에서 내가 제일 편하고 좋았단다.

피로가 아예 사라지는 기분은 처음이라나?

이게 나노봇의 힘!

“그래서 너 언제 갈 거야? 내일 방송해야지.”

“휴방인데요~ 아, 혹시… 나가라는…?”

“응. 나가.”

“언니. 집에 고양이 한 마리 키워볼 생각 없어요?”

“야뭉이 키우고 있는데?”

“오늘부터 이 집의 새로운 고양이 초초향! 야옹!”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수습은 재빠르니까.

“아아잉… 언니! 언니가 너무 좋아서 어쩔 수 없다고….”

“그럼 내 침대에서 자겠네?”

“언니 침대가 저한테는 조금 안 맞더라고요!”

“예지랑 똑같은 침대인데? 그럼 오늘은 예지 침대에서 자렴. 나랑 예지랑 자련다.”

“야! 그걸 왜 네 맘대로 정해!”

“옳소! 옳소!”

정란이와 예화가 난동을 부리지만 곧이어 나오는 냥지의 말에 모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두 잊은 듯 보이는데 내 집이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부디 오늘은 저에게!”

“냥지야. 혹시 잊은 것 같지만 내 키가 158cm에 몸무게가 40kg이야! 덩치가 작아서 충분히 셋이서 잘 수 있다는 말이야! 까먹었을까 봐!”

냥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160이라고 안 했어?”

“어허! 지금부터 그걸 입증하겠습니다.”

냥지가 무언가를 가져오더니 정란이의 머리에 대니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158.3cm]

“맞네!”

“헤헤… 왜 슬프지…”

“얘들아 그전에 내 의견을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언니들, 그렇게 치면 난 154cm에 41 kg야?”

“어허! 위아래가 있지!”

“꼰”

아이고 시끄러워…

오늘은 오랜만에 게임이나 해볼까?

명색에 게임 스트리머였는데 최근 게임을 너무 안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게임으로 떴는데 게임을 최근 한판도 하지 않은 스트리머가 있다?

뿌슝빠슝!

한참 논쟁을 하는 애들을 내버려 두고 방에 들어왔더니 초향이가 쫄래쫄래 방 안으로 따라 들어온다.

키가 워낙 작아서 그런지 동생처럼 느껴지기도 하네.

아, 실제로 나이로 따지면 동생이 맞긴 하군.

그런데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걸까?

“왜?”

“응? 언니가 뭐 하는지 궁금해서?”

“음… 오랜만에 크라이나 해보려고 하는데.”

“나 그럼 구경해도 돼?”

딱히 말릴 이유도 생각도 없었다.

보지 말래도 휴대폰으로 몰래 보면 내가 어떻게 알고 막겠어.

“상관없는데 나 재밌는 편이 아니라서 심심할걸?”

“재밌던데?”

어제 팬이라고 하긴 했는데 예의상 말한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가 보다.

내 방송을 꾸준히 봤다는 건가?

아, 어제 생일 파티에서 초향이랑 대화할 때 음료인 줄 알고 마셨던 게 술이었는데 취중 진담을 나누며 급속도로 친해지고 말을 텄었다.

“그래?”

“응! 초창기부터 봤는데 재미있던데?”

초창기?

언제라는 소리야?

적어도 오래 보기는 했다는 소리일 텐데 언제일지 감이 잡히지 않네.

일단 누워서 크라이에 접속한 뒤 방송을 켰다.

[ㅎㅇ]

[방송 시간 제발 공지 좀; 방송 시간 제발 공지 좀; 방송 시간 제발 공지 좀; 방송 시간 제발 공지 좀; 방송 시간 제발 공지 좀; 방송 시간 제발 공지 좀; 방송 시간 제발 공지 좀;]

[도배 ㅡㅡ]

“시간 공지 안 했었나…? 오늘은 까먹었네. 미안!”

[오늘 오랜만에 크라이 하는 거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크라이 플레이하는 거 보고 팬이 됐는데 크라이 방송한 지 정확히 23일이 지나고 3시간 12분이 지나도록 안 하길래 얼마나 슬펐는데]

[장문 ㅡㅡ]

[크라이로 입문한 팬들은 환장하긴 하겠지 ㅋㅋㅋㅋ]

[ㄹㅇ 크라이 플레이 보려고 눌러앉았는데 한 달 가까이 안 해줌 ㅋㅋ]

“그 정도로 오래 기다렸다니 앞으로는 조금 더 자주 할게.”

[조금 더 자주 = 한 달 뒤]

[ㄹㅇㅋㅋ]

[어이, 예 씨 내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

평소의 시청자보다 두 배 가까이 불어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해외 팬들이 많이 보였는데 내가 크라이 방송을 하기를 간절히 바랐나보다.

너무 무신경했나?

“에이, 무슨 한 달씩이나 걸리겠어. 이제 손도 나아지고… 생각해보니 모션 캡처하러 가긴 해야 하는데 미안하게 됐어! 크라이 방송 자주 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ㅅㅂㅋㅋ]

[신작에서 무엇을 하길래 아직도 연기하는 것임 ㄷㄷ]

[‘연기’하겠지.]

[하하 참 재미있네요.]

“자, 그만! 이제 크라이 방송 진행하겠습니다!”

[예 씨 조용히 해.]

[?]

[방송 시간 해명해]

[고정해줘~]

“응..? 그건 미안해… 그래도 방송 진행은 해야 하잖아…”

[그만 갈궈 ㅅㅂ 또 쭈구리 되잖아]

[우리 애가 기죽잖아요!]

“그 정도는 아니야!”

채팅창을 읽으며 시청자와 소통하던 중 프라에게 초대가 왔다.

수락하니 베로니아와 한창 겨루고 있는 프라가 보였다.

베니는 타격기 위주로 싸웠던 예전과는 다르게 그라운드 기술을 자주 쓰고 있었는데 프라에게 서브미션을 걸고 있었다.

서브미션은 격투기 용어인데 상대방에게 항복인 탑 아웃을 받아내는 기술이다.

흔히들 자주 보는 암바 같은 기술을 생각하면 편하지.

크라이에서는 서브 미션을 당한다고 게임 오버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서브 미션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당하는 사람은 큰 데미지를 입게 된다.

서브 미션으로 게임 승패가 갈릴 때는 유입이 많이 아작났다고 하더라.

하여튼 프라는 가볍게 풀어내며 나를 보고 인사했다.

“오. 왔군.”

“오셨네요!”

“베니 그라운드 연습?”

“물론이죠! 제가 그라운드 기술에 약해서 이번에 배워보고 있어요. 이 게임 끝내고 말하죠.”

그러면서 베니는 프라의 어깨에 폴짝 뛰어 어깨에 올라탔지만 프라는 그녀의 허벅지를 양팔로 고정해 레슬링 기술의 파워밤처럼 바닥에 내리꽂았다.

“말하지 않았나. 예지의 기술은 강력하지만 그만큼 완벽한 타이밍이 필요하다. 그냥 생각 없이 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야.”

“아이코… 어려워라. 테일리는 시도 때도 없이 그냥 걸어버리던데…”

“예지는 판단력이 뛰어나 어떤 상황이든 대처를 잘하는 거다.”

본인 앞에 그런 말로 금칠 해주니 부끄럽네요.

본인들은 자각이 없다는 점에서 대단하지만…

[ㄹㅇㅋㅋ 그라운드 최강자]

[근데 힘은 좀 달릴 것 같던데]

[힘 생각보다 엄청 세다고 함]

[헤으응 강한 눈나…]

“부끄럽게 무슨 금칠을 그렇게 해줘. 너도 경기에서 잘 쓰더니만…”

“유용하게 잘 써먹었지. 상대 선수도 인터뷰에서 재앙이라고 부를만한 기술이었다.”

“그 재앙은 다른 의미로 재앙일 건데 맞는 말이긴 해.”

분명 위력을 보고 재앙이라고 말한 게 아니라 같은 남자의 가랑이에 안면이 묻힌 것이 재앙이라는 게 아닐까?

여러 의미로 재앙은 재앙이네.

앞으로 다른 선수들이 좀 힘들겠네.

베니도 내가 말한 다른 의미에 딱히 관심이 없는지 나에게 기술의 노하우를 물어본다.

“어떻게 하면 더 안정적일까요?”

“허벅지만 쓰는 게 아니라 두 손을 잘 써야 해.”

대전에서 허벅지만 쓰니 좀 삐끗했는데 손을 쓰니 좀 더 편해졌지.

물론 난 한 손이지만!

“어… 테일리는 손이…그런 의미가 아니라…”

“신경 안 써. 그냥 말해도 괜찮아. 일단 한 손이라도 손을 쓰면 기술 걸 때 편해진다는 소리지.”

“동의한다. 그런데 상대가 이 기술을 알고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분명 내 결승전의 상대는 대비하고 있겠지.”

“음… 일단.”

일단 내 나름대로 저격으로 단련된 노하우를 알려줬다.

사실 저격을 하든 말든 상대 동작이 워낙 느리게 보여서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이게 상대 방어가 완벽하면 암바로 바꿀 수 있거든? 완벽이라고 말해도 뭐 뚫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굳이 단단한 곳을 뚫을 필요는 없지.”

“암바? 이 자세에서 암바로 전환은 힘들지… 흠… 생각해보니 괜찮을 것 같기도 하군.”

“한번 해보죠!”

시청자들은 지루하지 않을까?

채팅창을 슬쩍 보니 격투 대회 보는 기분으로 즐기는 기색이었다.

재미있다면야…

하여튼 연습을 좀 도와주고 대전 매칭을 돌렸다.

내가 게임을 잘 안 해서 MMR이 낮은 탓인지 너무 쉽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다들 감탄하기 바쁘고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하기야 괜히 양학 방송이 있는 게 아니겠지.

여기서는 부캐나 대리를 안 좋게 봐서 양학 방송이 별로 없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그런 의도는 딱 봐도 없으니까 괜찮은 듯했다.

방송 분위기도 제법 괜찮고 방송한 지 2시간이 지났으니 슬슬 방종해도 괜찮겠지?

너무 일찍 끄려고 하는 걸까 고민했지만 다른 스트리머들도 짧게 하고 끈 적이 많으니 상관없지 않을까?

“여러분의 반응이 이렇게 좋은 걸 보니 오늘 방송이 참 괜찮았다고 느끼네요.”

[재미있어요!]

[프라한테 해줬던 팁 써먹고 있는데 심해에서도 꽤 좋음 ㄳ]

[교육 방송 ㄷㄷ]

[왜 말하는 게 방종 멘트 같냐]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뿌듯했다.

하기야 자기 점수대에서 잘 먹히는 팁을 줬다고 하는데 게이머한테 그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을까?

“박수 칠 때 떠나야 한다고 했던가요?”

[?]

[뭔 소리?]

[설마 ㅋㅋ]

“방종의 시간이 왔네요. 오늘 제 방송을 봐주셔서 감사하고 내일 또 봐요.”

[ㄴㄴ]

[??]

[2시간밖에 안 했잖아 ㅅㅂㅋㅋㅋㅋ]

[어이 예씨 어이 예씨 어이 예씨 어이 예씨 어이 예씨 어이 예씨 어이 예씨 어이 예씨]

[잔말 말고 방송하라고 아 ㅋㅋ]

[방금 시킨 치킨이 이제 왔는데요?]

[테바….]

[내 억장도 바이…]

“맛있게 드세요! 나도 치킨 먹어야징.”

폭발적으로 올라가는 채팅 너무 빠르게 올라가서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인사하는 채팅들이 아닐까?

방송을 종료하고 기기를 머리에서 빼내니 옆에 누군가가 누워있는 게 느껴졌다.

뭐야?

초향이가 내 품에 파고들면서 휴대폰으로 내 방송을 보고 있었다.

방금 종료된 방송 화면을 멍하니 보면서 나를 번갈아 보는데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언니! 무슨 방송을 이렇게 해요! 짧게 할 거면 짧방이라고 적어야지!”

“응? 원래 방송 시간은… 아 오늘은 조금 짧긴 했어. 그래도 사람들이 만족할 때 꺼야 하지 않을까?”

“언니의 행동은 영화로 따지면 히어로가 빌런이랑 첫 전투를 끝내고 바로 영화를 끈 거라고! 게임으로 치면 한타 끝나자마자 게임 끈 거고!”

“흠… 그런가?”

손에 들고 있는 기기를 탁자에 올려두려다가 초향이의 머릿밑에 팔을 쑥 집어넣었다.

탁자에 올려두고 팔을 빼내려고 하니 머리에 무게를 실어 떡하니 버틴다.

“어떻게 이렇게 편할 수가… ㄴ… ㄱ…ㅇ..ㅏ.”

초향이는 따지다 말고 몸이 녹아내린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말투도 그렇고 나이도 어려서 그런지 진짜 동생 같은 느낌이네.

물론 동생은 맞지만!

이 자세로 잠깐 누워있자 금세 고로롱 소리를 내며 잠들어버린 초향이를 이불로 감아서 침대 구석에 밀어 넣었다.

얘 근데 오늘 종일 자고도 또 잔다고?

어쩌면 진짜 고양이는 초향이가 아닐까?

작고 귀엽고 잠도 많고 딱 고양이 특징이군.

초향이의 위에 야뭉이를 데려와 올려놓으니 딱 맞다.

저녁 먹을 때까지는 자게 내버려 둬야지.

지금 시간이 7시인데 다들 저녁 먹었으려나?

거실로 나오니 애들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냥지 방의 문을 슬쩍 열어서 눈치를 보니 같이 합방하고 있는 듯 옹기종기 모여 요란하게 떠들고 있길래 다시 닫았다.

음… 일단 치킨을 5인분 시키는 게 맞으려나?

전부 다른 종류를 시켜서 나눠 먹으면 되겠지.

치킨을 시켜놓고 소파에 앉으니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 냥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 뭘까?

뭔가 잘못했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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