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다른 사람의 집
* * *
신기한 감정도 잠시 뒤 사그라들었다.
계속 보니 질리는 감이 있었고 다른 세계의 내 기억이 그걸 가속하기도 했다.
자리에 앉아 냥지한테 잠깐 상식에 대해 교육받았다.
날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어린애 가르치듯 친절하고 사근사근하게 설명해주니 고맙기는 한데 기분이 좀 이상하네…
화력광이던 한국이 전쟁 무기로 함선을 제작했지만, 전쟁이 끝나도록 완성하지 못했고 민간용으로 굴린다는 듯하다.
그마저도 개발이 덜 끝나서 스펙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모양.
더 이상의 개발은 전쟁 무기 개발 금지 조약에 어긋나기 때문에 더 개발도 하지 못하게 됐는데 버릴 수도 없었기에 안정성 검증을 끝내고 다용도로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이런 용도…?
공개하고 써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빠르게 익숙해지고 이제는 한국의 명물쯤으로 자리 잡은 뒤 외국인이 관광하러 많이 온단다.
미국에도 있지만, 무기로 취급하고 있는 상황.
손해가 아닐까 싶지만… 알아서 다 하겠지.
“손님. 필요하신 거라도?”
문을 열고 들어온 로봇은 음식이나 음료가 담긴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묘하게 여성스러운 태도와 목소리.
크루?
이걸 로봇들이 차지하면 사람들 일자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금방 내릴 거라서… 없어요.”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이 느낌.
실감이 나지 않네.
냥지와 대화를 하는 동안 도착했는지 날 데리고 차고로 갔고 차를 타고 내려가니 뜻밖의 인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얘들아! 서예지! 냥지!”
“누가 우리를 부르고 있는 느낌인데?”
“응? 난 못 들었는데.”
“여기야!”
초야 언니잖아?
그냥 집에서 기다리시지 왜 여기까지 마중 나온 거야.
못 보고 지나쳤으면 어쩌려고?
“왜 여기서 기다렸어요? 엇갈리면 어쩌려고.”
“얘들아 오랜만! 우리 집에서 멀지도 않은데 어때. 나 좀 태워줘.”
차에 타고 가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이야기할 것도 많고 엄청 반갑게 느껴졌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응? 잘 지냈지. 그동안 너희들은 잘 지냈어?”
“우리야… 잘 지냈다고 해야 할지…”
냥지가 말을 살짝 흐리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아… 고스트!
“무슨 일 있어?”
“별일 없었어요. 차향 언니는 언제 오신대요?”
초야의 표정이 의문으로 가득했지만, 다행히 조용히 넘어가 주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한 시에 올걸?”
지금 시간은 12시.
차향 언니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지만 별로 만나지를 못해서 조금 낯설다고 해야 하나.
실제로 만난 적이 별로 없어서… 2번? 3번?
성격이 많이 바뀌고도 나의 그 소심한 성격이 아예 사라지진 않았는지 가끔 사람들의 관계가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언제 한번 냥지에게 고민을 말한 적이 있는데 정말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한 소리 들었지만 어쩔 수 없게도 가끔 이런 생각이 문득 들고는 했다.
누군들 이런 생각을 하고 싶겠는가.
한가할 때는 많은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테세우스의 배 같은 거 말이다.
커다란 배에서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워도 그 배가 테세우스가 탔던 배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계속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는 원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냐는 정체성에 관한 난제다.
세 명의 기억과 테일리로서의 내 몸.
셋의 기억이 엉킨 실타래처럼 꼬였고 몸마저 내 몸이 아니었다.
그럼 누가 진짜 나일까?
테일리와 내가 하나가 되었지만 이렇게 합쳐진 내가 과연 예전의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서예지와 내가 하나가 되면 나는 나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서예지의 이름을 쓰고 있지만 그게 내가 서예지라는 뜻은 아니었다.
테일리는 나고 나는 테일리다.
그러나 서예지가 나라고 생각하기에는 글쎄올시다.
합쳐진 건 테일리와 나.
이곳에 살던 서예지가 아니니까.
그리고 서예지와 내가 합쳐진다면 기억은 어떻게 되는 걸까.
셋의 기억이 하나가 된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나의 몸에 셋.
이게 정상은 아니니까.
나는 과연 누구인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걘 가끔 그럴 때 있어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너무 티 낸 모양이다.
“저 자신에 대해 고민해 봤어요. 나는 내가 맞을까. 만약 기억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무슨 그런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어.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건 이 입이냐!”
언니는 내 볼을 양손으로 잡아당겨 웃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건 어딘가의 광대의 웃는 방식…?
“넌 이렇게 웃는 게 어울려.”
잘도 그런 부끄러운 말을…
오히려 듣는 내가 부끄러워져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걱정하게 할 정도로 이상한 표정이었나?
“요즘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예전 성격 어디 안 가는구나.”
“흠흠…”
덥다. 더워.
언제 도착하는 거야?
“생각해보니 신기하네.”
“뭐가요?”
“나랑 예지가 이렇게 빨리 친해진 거 말이야."
“언니가 친화력이 좋잖아요.”
“그래도 예지는 유독 빠르게 친해졌잖아. 처음 봤을 때부터 오래 만난 사이처럼 느껴졌지.“
나는 냥지와 언니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랬나?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날 때부터 엄청 친근하게 다가왔었지.
난 그게 언니가 원래 엄청난 인싸구나 혹은 성격이 그런 분이구나 싶었는데 언니로서도 특이한 경우였나보다.
“난 예지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어.”
“아. 그 느낌 알죠.”
“내가 그렇게 삭아 보였니…?”
나름 충격이었다.
난 내 얼굴을 보면 20대 초반이라고 느껴졌는데 다른 사람한테는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던 걸까?
“얼굴은 어린 티 나지. 분위기가 그렇게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산전수전 다 겪은 분위기 때문에…”
“난 눈밭에 뒹굴면서 노는 거 보고 편하게 느껴졌어요. 그때 그 행동 보고 난 나보다 어린 줄 알았는데.”
“언제? 게임에서? 영상 남아있어? 나도 보고 싶은데.”
“당연히 남겨 놨죠."
이러다 내 부끄러운 이야기가 다 나오겠다 싶어서 화제를 돌리려고 시도를 해봤다.
“언니는 냥지랑 어떻게 만났어요?”
“토파에서? 토위치 파티에서 만나고 친해졌지. 냥지도 엄청 소심했는데…”
“언니?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소심한 냥지?
갑자기 호기심이 들었지만 냥지의 무서운 눈빛에 입을 꾹 다물었다.
치사해.
이야기하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파트인 줄 알았는데 주택이었네.
안을 열고 들어가니 냥지의 집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냥지의 집이 그나마 지구와 느낌이 비슷했다면 초야 언니의 집은 이쪽 세계가 어떤 식으로 사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천장에 떠다니는 하얀 구름과 눈부신 햇살.
온몸으로 느껴지는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
금빛 고운 모래가 파도에 쓸려 다니며 나는 소리.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는 어찌나 푸르고 맑은지 바닥에 물고기가 그대로 보였다.
파도 소리…. 파도 소리?
어떻게 집 안에서 이런 게…
아니.. 어디선가 본 기분인데…
아, 저쪽 세계에서도 있는 홀로그램 기술이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거기 기술이었군.
그쪽은 이런 자연의 풍경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이 황폐했는데 그 때문에 이런 기술을 가정마다 기본으로 쓸 정도였다.
“와. 이런 거 좋네요.”
“언제 이런 걸 장만했대?”
냥지도 모르는 눈치인 걸 보면 원래 이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지? 큰맘 먹고 샀는데 산 보람이 있어. 가끔 나도 이런 섬에 있는 게 아닌가 착각한단 말이지.”
“다른 배경은 없어요?”
“이런 거?”
냥지의 말에 무언가를 조작하더니 순식간에 주변 배경이 바뀌었다.
우리는 구름 위에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고 빛으로 이루어진 나비들과 새들이 우리 곁을 맴돌며 지저귄다.
구름 위에 서서 바닥을 내려보면 작은 도시가 보였다.
“배경마다 DLC 팔이 하는 게 좀 꼽기는 하는데 그것 말고는 다 마음에 들어.”
“똑똑똑.”
바로 뒤쪽의 문에서 차향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딱 맞춰서 오셨네.
“반가워! 반가워!”
차향 언니가 냥지와 내 손을 붙잡고 붕붕 흔들었다.
평소처럼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태도.
내 주변 사람들은 신기하게 이런 식이었다.
나랑 만난 사람들은 별로 만나지 않았는데 나한테 친근하게 굴었고 항상 그 때문에 곤란했었지.
나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어색하게 느껴져서 친해질 때까지는 살짝 선을 긋는 스타일인데 주변 사람들은 과감하게 다들 선 안으로 들어와서 논다고 표현해야 하나.
“나 근데 배고파!”
“밥 안 먹고 왔어?”
“같이 먹으려고 일부러 안 먹고 왔는데.”
“우리들은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언니들끼리 드세요.”
나와 냥지는 아침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딱히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럼 우리 밥 먹는 동안 TV라도 보고 있어.”
“넹.”
비록 가짜 인싸지만 이렇게 놀러 다니는 것도 괜찮네.
앞으로 자주 놀러 다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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