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그냥 일상
* * *
“뭐 타고 왔어?”
“그거 있잖아. 청춘호 타고 왔더라.”
“아~”
이름이 뭔가 구려.
좀 더 좋은 이름이 없었을까?
태극호… 나도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네.
“하여튼 예지야. 너무 감동적이야…”
“응?”
“난 냥지가 우리 집에 오자고 말한 줄 알았더니 네가 먼저 말하고 온 거라면서? 난 사실 기대도 안 했어.”
음, 그렇긴 하지.
원래 내 성격이었으면 먼저 오자는 소리 절대 못 했을 텐데 나도 많이 바뀌긴 했구나.
언니들 말대로 냥지가 데리고 왔으면 데려왔지 내가 어디 갈 생각은 못 했겠지.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뿌듯
소파에 등을 기대고 늘어져 있는데 냥지의 발이 내 종아리를 툭툭 친다.
나도 쳐야지.
발가락으로 냥지의 종아리를 툭툭 쳤다.
외딴 섬 모래사장 위의 소파에 누워 의미 없는 장난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주변이 탁 트인 바다처럼 보여서 그런지 평온하다.
사람은 이토록 시각적인 효과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분명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속아 넘어가 진짜 외딴 섬에서 바다 구경하는 기분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불어오는 바람도 분명 선풍기와 크게 다를 바 없겠지만 주변에 보이는 바다 때문에 바닷바람처럼 느끼는 거겠지.
“아. 짐 풀어야 하는데.”
“같이 갈까?”
“별거 없는데 나 혼자 갔다 오면 되지.”
“땡큐!”
냥지가 바지 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고 나는 그걸 받고 문밖으로 나왔다.
차고에 들어와 버튼을 눌러 트렁크 문만 열고 이불과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불은 왜 챙겼어?”
“이불은 따로 챙겨야죠.”
“너희들 이불 있는데? 나랑 예지. 차향이랑 네가 같이 덮고 자면 돼.”
“?”
“?”
분위기가 약간 이상한걸.
둘… 아니 셋은 서로 웃으면서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의 싸움.
날카로운 칼처럼 서로를 찌르는 눈빛.
얼핏 보면 서로 화목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면 하수다.
“이 언니가 오랜만에… 아니지. 예지랑 한 번도 같이 자본 적이 별로 없는데 같이 좀 자자.”
“에이. 같이 자봐야 별거 없어요."
서로가 빈틈을 보이지 않으며 서로의 약점을 찾는 심리전.
나 같은 찐은 게임이나 해야지.
이쪽의 모바일 게임은 어떤 게 있을까?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해졌다.
차향 언니가 소파에 앉으려는 듯 보여서 옆으로 비켜 자리를 만들어줬다.
사실 소파는 꽤 넓은 편이라 그럴 필요가 없지만 내가 움직임으로서 언니는 좀 더 편해지니까.
옆에 앉아 내가 스토어에서 게임들을 찾고 있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언니가 넌지시 속삭이듯 귀띔했다.
“오늘 나랑 같이 자야지.”
“응. 응?”
이게 pc 게임인지 모바일 게임인지 모를 정도로 엄청난 그래픽의 인 게임 영상을 정신없이 보다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뭐라 했었지?
언니를 바라봤지만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미소 짓고만 있었다.
별말 안 했나?
“모바일 게임 찾아? 쿠킹도 괜찮던데 해봤어?”
“쿠킹…?”
게임 제목이 뭐 그렇담.
검색해보니 아기자기한 사람 형태의 쿠키들이 보였다.
독특한 그래픽이네.
일단 받아볼까.
추천하는 것 보니 의외로 괜찮을 수 있으니 한번 받아본다.
똥겜만 찾아서 즐긴다는 똥겜믈리에는 아니겠지?
엄청 재미있는 편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았다.
심심풀이로 딱 좋은 정도?
저녁 늦게까지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언니들과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또는 같이 합주하기로 했던 건 정확히 언제 모여서 할건지 같은 이야기를 하며 말이다.
딱히 할 이야기가 없어도 서로 가만히 누워있어도 편안하고 재미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 조용한 분위기를 즐긴 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느꼈겠지?
아님. 말고.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다.
저녁이 되어서 그런지 섬의 배경이 어두컴컴해졌다.
나무들은 자신을 빛내며 전등처럼 주변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분위기 좋다.”
“배경 끄고 그냥 불 켤까?”
“괜찮은데.”
그다음은 별다른 일은 없었다.
같이 저녁을 먹으며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거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기도하고.
물론 나는 그런 건 잘 모르니 듣기만 했다.
식탁에 앉아 유튜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냥지와 초야 언니를 내버려 두고 샤워를 하려고 욕실에 들어왔다.
탄탄하고 날씬한 몸이 거울에 보였다.
손으로 배를 쓸어보니 쫀득쫀득하고 탱탱한 피부가 손에 감촉으로 느껴졌다.
처음에는 내 몸을 제대로 보지 못해 샤워도 대충 하고 나왔었는데 지금은 확실히 내 몸이라고 느껴진단 말이지.
당연히 익숙해졌다.
가슴을 들어 올리니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거 흉기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영상에서 가슴으로 수박 깨기도 하던데.
근데 그런 짓 하다가 아파 죽겠지?
거울을 보니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느껴진다.
역시 나야.
예쁜 거 맞지.
음음.
몸에 물줄기가 산산이 부서지는 걸 즐기며 씻는다.
그렇게 한참을 즐기다 닦고 나오니 여전히 냥지와 초야 언니는 유튜보나 방송 콘텐츠에 대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음… 사실 난 잘 모르겠어.
계획을 세우고 방송을 하지는 않고 그냥 그날 생각나는 걸 하는 편이라.
방송 시간도 뒤죽박죽이고.
내 시청자들은 좀 아쉬울 수 있겠네.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차향 언니가 내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음?
“먼저 누워있어. 나도 씻고 올게.”
둘이 양보한 걸까?
낮에 서로 같이 자겠다고 싸우던데 나랑 차향 언니가 자는 거로 결정 난 모양이다.
나야 상관없지.
침대에 누워 발을 동동 구르며 쿠킹을 하는 동안 차향 언니가 토끼 귀의 동물 잠옷을 입고 내 옆에 폴짝 뛰어올라 침대에 들어왔다.
“침대 무너져요. 언니.”
“요즘 침대가 얼마나 튼튼한데~”
그런가?
하기야 이 정도로 발전한 세상에서 당연히 침대도 더 좋겠지.
우우웅
“내 폰인가?”
“내 폰. 요즘 스팸이 자꾸 오네.”
언니도 요즘 스팸 문자에 시달리듯 하다.
스팸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도 잦은 주기로 문자가 오던데…
그냥 스팸이라 치부하기에는 집요할 정도였다.
내가 무시하니 이제 문자는 오지 않았지만…
잠깐 문자만 확인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발전한 세상에서 문자를 확인하니 내 개인정보가 빠져나갈 수도… 아, 델리가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
[사용자의 멍청함에 다시 한번 감탄. 이 정도면 능력.]
에이씨.
말 이쁘게 해.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개탄.]
얄미운 녀석.
한 번이라도 져준 적이 없어.
델리와 대화하는 동안 옆에서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리길래 봤더니 곤히 잠들어있는 한 마리의 토끼가 보였다.
오늘 피곤하셨나?
그냥 다 같이 늘어져 있던 게 전부였는데.
시간을 보니 아직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인데…
뭐... 자고 싶을 때 자면 되지.
겨울이 시작되어서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 목까지 이불을 덮어줬다.
지금 집안은 따뜻한 편이어서 상관 없나?
왠지 나도 같이 잠들어야 할 것처럼 느껴져 델리를 벗어 바닥에 내려두고 이불을 덮으며 눈을 감았다.
잘자.
자고 일어나니 살짝 삐진 듯 보이는 초야 언니가 보였다.
왜 저렇게 뿔이 나셨을까.
“잠자리가 안 좋았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왜 차향이랑 먼저 들어가서 잔 거야.”
“엥. 차향 언니가 같이 자자고 하길래 이야기 다 된 줄 알았는데?”
“으으… 이차향!”
“응핳핳핳하. 아니~ 그럴 수도 있죠~”
내 뒤를 따라 나오던 차향 언니는 특유의 목소리로 웃으며 얼버무렸다.
딱히 효과적이지는 않아 보이지만…
일주일 치 피로가 한 번에 풀린 것 같다고 덧붙이며 웃는다.
“오늘은 나랑 잘 거야.”
“예이~”
항상 생각하지만 내 의사는…?
수양이 집은 내일 가면 되나?
처음에는 휴일이라고 좋아하기는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평소에도 느긋하게 늘어지다 방송 조금하고 다시 놀기 때문에 휴일이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아니다.
친구들은 평일에도 조금 바쁘게 방송을 하니 휴일에는 다 같이 놀러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군.
오랜만에 된장찌개에 김과 김치라는 한식 그 자체의 밥을 먹으며 잡담을 나누었다.
냥지는 일어나지 않아서 셋이서.
“여름에는 다 같이 놀러 갈까?”
“어디? 롯데월드?”
“바닷가에 놀러 가도 좋을 것 같은데. 난 예지 수영복 한번 보고 싶어서.”
“그거 좀 끌린다!”
“전 안 끌리는데…”
여자의 삶이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수영복은 좀…
많이 부끄러울 것 같다.
입더라도 래시가드나 외투를 걸칠지도?
그렇게 잡담이나 나누며 하루를 보냈다.
어제와 다를 거 없는 일상이지만 그래서 특별한 게 아닐까?
초야 언니는 스킨십을 좋아해서 그런지 잘 때 나에게 좀 많이 달라붙었다.
항상 새로운 기분이라며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기는 했지만 잠시 뒤 바로 잠들었다.
내 경험에 근거한 추측에 의하면 내 근처에 있으면 쌓인 피로에 따라 빠르게 잠든다.
그렇다는 건 초야 언니와 차향 언니가 피로가 많이 쌓였다는 뜻인데 나에게서 멀어질수록 나노봇 기능이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몸 관리를 잘해줄 텐데…?
[좋지 않은 생활 패턴. 부족한 수면. 치료 속도보다 빠르게 쌓이는 피로.]
맙소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