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자리를 비운 델리
* * *
수양이는 귀여운 식물을 키운다며 다육이를 보여주었다.
화분 형태의 로봇이 자신의 몸체에 흙과 다육이를 싣고 돌아다닌다.
“이건 뭐야?”
“로봇 화분! 식물마다 키우는 방법이 다르잖아? 이것만 있으면 알아서 햇빛과 수분을 공급해줘.”
다육이는 키우기도 쉽고 귀엽다는 점에서 인기가 괜찮다고 하는데 로봇 화분 같은 것을 쓸 거면 애초에 키우는 난이도는 상관 없는 게 아닌가?
그냥 키우고 싶은 거 아무거나 골라서 키우면 그만이잖아?
“근데 로봇 화분이 알아서 해주는 거면 굳이 다육이를 키울 필요가 있어? 키우고 싶은 거 골라서 키우면 그만 아니야?”
“어… 그건 생각 못 했는데…”
수양이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뭔가 좀…. 흠흠.
“바보야.”
“누구 보고 바보래!”
로봇 화분 자체는 괜찮아 보이는데 나도 하나 사볼까.
분홍색의 몸을 움직여 아장아장 걸어가는 귀여운 화분을 보며 나도 하나 장만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무언가를 키워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죽으면 남겨진 애완동물이나 식물들은 어쩌나 싶어서 그랬었지.
주인이 죽고 같이 굶어 죽은 동물 소식도 심심찮게 있었지 않은가.
지금은 그럴 걱정이 없지만.
야뭉이도 가족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나도 무언가를 하나 키워보고 싶어졌다.
동물은 좀 그렇고 식물이나 한번 키워볼까.
로봇 화분 하나 사서 향도 좋고 예쁜 꽃 하나 키우면 괜찮을 것 같다.
로봇 자체도 귀여워서 꽃 한 송이 달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어졌다고 해야 하나.
“이거 꽤 귀엽다.”
“그치? 아침에 내 방에서 베란다까지 아장아장 걸어와서 햇볕 쬐고 있으면 진짜 귀엽다니까~”
예전에 키웠던 나비가 생각나네.
키웠던? 나비?
난 분명 뭔가를 키운 적이 없었는데 테일리로서의 나도 그렇고.
….착각이었나?
다시 생각해봐도 그런 기억은 없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
“응? 아니. 나도 하나 사볼까 고민 좀 했지.”
“꽃 같은 거 심으면 야뭉이가 뜯어 먹을걸?”
“아, 그렇네.”
야뭉이는 고양이답게 게으르면서도 호기심이 매우 강한데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보인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반드시 그것을 확인하고 만다.
물론 그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깨지거나 부서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사고 쳤다고 말한다.
걸어 다니는 꽃?
이걸 참는 고양이가 어디 있을까.
내가 고양이었어도 일단 만져봤을 것이다.
아마도?
사실 고양이가 아니어도 만지고 싶긴 해.
못 참지.
화분 위의 다유기를 손으로 잡아 만져본다.
반들반들 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
나의 마음속 가득 차 있던 호기심이 어느 정도 충족됐다.
인간도 호기심의 동물…!
왠지 모를 뿌듯함을 누리는 것도 잠시 양옆에 시선이 느껴져 슬쩍 보니 수양이와 냥지가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야뭉이만 조심해야 할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러게. 난 여태 고양이 한 마리만 키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두 마리였어. 어쩐지 아침마다 이상하더라.”
“아침마다? 뭔데? 뭔데?”
“쟤보다 일찍 일어나면 알아. 야뭉이랑 동시에 똑같은 동작으로… 아주 귀여워 죽겠다니까.”
“오. 기대된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지.”
“별거 없거든!”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남이 기지개 켜는 게 그렇게 신기해?
몇 번 친구들한테 놀림 받고 고쳐보려고 했지만 이게 테일리로부터 생긴 습관인데 생각보다 고치기 쉽지 않더라.
테일리의 길거리에서 하루하루를 전전하며 생긴 오래된 습관인데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있듯이 고치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 습관이 시작된 건 테일리의 나이가 아주 어릴 때 고양이 한 마리가 테일리와 함께 생활하면서다.
이 고양이는 특이하게도 허기에 지쳐 쓰러진 테일리에게 자신이 훔친 생선을 나눠주었는데 그 뒤로 테일리를 자신의 새끼처럼 알뜰살뜰 챙겨주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고양이 한 마리가 챙겨줘 봐야 얼마나 도움이 됐냐 만은 인간들에게 배신당하고 버려졌던 인생을 살아온 테일리에게 그것은 처음으로 겪는 따뜻한 호의였고 하나의 작은 구원이었다.
인간을 소모품으로 쓰는 세상에서 작은 동물에게 오히려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 고양이도 자신의 새끼를 잃고 쓰러진 테일리를 자신의 새끼로 보게 된 것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 둘은 종이 달랐지만 한 가족처럼 살았다.
그러나 행복은 찰나의 순간에 지나간다고 했던가?
길고양이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테일리가 깨어났을 때는 잠든 듯 조용히 세상을 떠나버렸으니까.
아… 생각이 길어졌네.
별거 아니지만 테일리에게 뿌리 깊이 박힌 습관이란 소리다.
그것은 나의 습관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는 서로 담소를 나누며 웃고 떠들다가 집 앞의 테니스장에 나와 놀기로 했다.
이곳의 테니스장은 어떤가 싶었지만 별 다른 건 없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홀로그램 심판이 심판으로서 게임을 봐준다는 것?
친구끼리 노는데 그러면 재미있을까 싶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홀로그램 심판은 그야말로 긍정적인 인간의 표본을 보여주었는데 정말 엉망인 실력을 봐도 끝없는 칭찬과 과장된 행동으로 우리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자기의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자신감을 가득 불어넣어 줄 정도로 칭찬의 힘은 강력했는데 그 증거로 몇 번 제대로 치지 못했으면서도 수양이의 어깨는 한껏 치켜 올라갔다.
너무 칭찬만 퍼붓는다면 꿈나무들이 실력을 키울 때 악영향을 주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친구들 말로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한다.
제대로 시작할 때는 전문적인 선생이 있다고 하니 괜찮은 모양.
이쪽에서는 자신감과 의욕을 대단히 중요시하기 때문에 저렇게 만들었단다.
취미로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스트레스 줄 이유도 없고 말이다.
“나 사실 재능있는 게 아닐까?”
“저 심판 앞에서는 누구나 재능이 생기지 않을까?”
“에에이! 그건 중요하지 않아.”
태클에 살짝 발끈한 수양이를 마음껏 노리는 냥지.
계속 나만 이겨서 그런지 냥지와 수양이가 서로 팀을 짜서 나에게 대항했다.
내가 대충 힘을 빼고 저쪽은 둘이나 붙어서 꽤 비등한 경기가 나왔고 우리는 푹 빠져서 땅거미가 지고서야 집 안으로 돌아왔다.
“다음에는 농구장에 가볼까?”
“사람 더 모아서 탁구도 괜찮을 듯.”
우리는 씻고 뭐 먹을지 고민을 하다가 그냥 시켜 먹기로 했다.
친구들도 간만에 몸을 움직여서 체력이 쭉 빠졌는지 소파 위에 건어물처럼 널브러져 있었고 나도 무언가 만들기는 좀 귀찮았다.
내일은 아침만 수양이 집에서 같이 먹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건가.
야뭉이는 친구들이 진작에 돌아와서 돌보고 있으니까 걱정은 없고.
친구들이 아니더라도 로봇 청소기가 어련히 잘 챙겨준다.
“밥 뭐 먹을래?”
“난… 우동…”
“나는 어… 회…”
어지간히도 통일되지 않는군.
이래서 통일이 힘들었던 거다!
나는 그럼 초밥 먹어야징.
서로 끌리는 거 먹으면 되지.
“내일 드디어 집에 가네.”
“그러게. 고작 3일을 비웠는데 진짜 오랜만에 돌아가는 느낌. 야뭉이 보고 싶다.”
“얘들아. 하루 더 자고 가면 안 돼?”
“방송해야지.”
“그러네…”
“자주 놀러 올게.”
이 세상은 거리가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니까, 오고 싶을 때 놀러 오면 되겠지.
그러고 보니 방송도 3일이나 쉬었잖아!
쉬기 전에도 방송 시간이 좀 짧았으니 이번에 켜면 좀 오래 해야겠다.
무슨 방송을 해야 할까.
크라이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스캐빈저 콜을 먼저 했던지라 은근히 바라는 사람이 좀 보였다.
내가 쓰러져서 쉬쉬하긴 했지만, 이제는 상관없지.
모션 캡처도 해야 하고 바쁘다 바빠.
당분간은 쉬지 않고 달리겠구먼.
[한동안 바쁜 일정.]
그렇지?
[테일리의 일정 말고 나 델리의 일정.]
네가 무슨 일정이 있는데?
무슨 말이야?
[선물을 만들 시간.]
선물?
아, 예전에 선물 준다고 했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적 능력 파악하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감탄. 당분간 돌아오지 못할 예정.]
음… 신경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선물은 준다니 뭐라고 화내기 애매하군.
일부러 이런 상황을 유도하고 놀리다니.
하여튼 갔다 와.
평소에 자기주장 없이 조용히 내가 하는 일을 돕기만 했는데 스스로 뭔가를 하겠다니 궁금하긴 궁금하네.
요즘 별다른 일도 없고.
[바이바이다!]
내 어깨에서 델리가 덜커덩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벌써 허전하네.
항상 같이 있어서 그런가?
어느새 시간은 잘 시간이 되었고침대가 하나밖에 없어서 셋이서 같이 잤다.
음, 그렇지.
보통은 혼자 살면 침대는 하나만 놓지.
음음, 맞지 맞지.
내가 일어날 때 둘 다 자고 있어서 기지개 켰더니 사실 둘 다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는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얘네들이 이렇게 일찍 일어났다고…?
“와… 진짜 고양이. 너무 귀여워.”
“역시 각선미가…”
“난 구경거리가 아니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