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65화 (65/78)

〈 65화 〉 악의

* * *

“너 의수 어디 갔어?”

“이상하다. 어제 잘 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어디 간 거지? 분명 집에 있을 텐데.”

“얘들아. 그냥 하나 새로 맞추면 돼… 오래돼서 바꾸긴 해야 했어.”

“바꾸더라도 그전까진 끼고 있어야지. 근데 잃어버려봐야 집 안인데 어디 있는 거야?”

갑자기 사라진 델리를 찾느라 친구들이 고생하는 이슈가 있었다.

냥지랑 집을 나서려고 짐을 싸는 순간 냥지가 의수 챙겨오라고 말했고 당연히 나는 챙겨올 수 있을 리가 있나.

당연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했고 수양이가 찾아다녔지만 못 찾은 시점에서 일이 시작된 것이다.

“그 큰 걸 아직도 못 찾을 리가 없는데?”

“그러게. 뭐지?”

진짜 어디 놔뒀는지 기억 안 나냐고 묻는데 생각하는 척 입만 꾹 다물 뿐이었다.

애들도 어리둥절하다가 어쩔 수 없이 그냥 출발하기로 했다.

“찾으면 연락해줘.”

“응. 알았어. 근데 진짜 이상하네?”

“너무 찾지는 마. 진짜 바꿀 거였어.”

계속 찾으면 헛수고니, 최대한 말려볼 뿐이었다.

나한테 항상 달려있던 게 없어지면 친구들이 찾는 건 당연할 텐데 너무 생각이 짧았어.

심지어 나한테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찾는 걸 쉽게 포기하지는 않겠지.

꼭 찾아 놓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수양이에게 미안했다.

찾아도 안 나온다니까…

나중에 꼭 보답해야겠다.

갈 때처럼 올 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집에 돌아왔다.

세상 참 편하다고 느껴지네.

“난 좀 쉬었다가 방송 켜야겠다.”

“나도.”

냥지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도 방에 들어왔다.

우선 해야 할 일을 정리해두기로 했다.

큼직한 건 모션캡처, 합창이 끝인가?

다들 연습하고 있다고 하는데 언제 하자고 정하지는 않아서 도대체 언제 시작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 이거 설마 내가 정하는 건가?

알아서 자기들이 부를 부분 정하고 연습하고 있긴 하던데 생각해보니

오늘은 일단 방송부터 하고 쉬어야겠지?

3일 동안 쉬었는데 오늘도 쉰다고 공지 올리면 시청자들의 불만이 어마어마하겠지.

아니면 그냥 원래 이런 사람인갑다 생각하라고… 그건 좀 그런가?

어떤 사람의 전설적인 휴방 공지를 떠올려보았지만, 갑자기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아무래도 거부감이 생기겠지?

방송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무언가가 번뜩 떠올라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잊을 뻔했네.

이 문자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날아온 욕설이 가득한 문자들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곳의 예지와 연락이 끊긴 친구들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그런 느낌의 문자가 아니었다.

이 문자에 적힌 글은 묘한 분위기가 풍겼는데 친구라고 하기에는 나를 대등한 관계가 아닌 명백하게 아랫사람 대하듯 한 태도가 엿보였다.

그리고 묘하게 나를 질투하는 느낌이 들었다.

자꾸 나의 방송과 성공을 거론하는 건 질투가 아닐까?

그냥 차단하고 무시하려니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나를 끝장내겠다는 뉘앙스의 협박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 그럴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게 눈에 선히 보이니까.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을까?

짚이는 점이 없는데, 과거 예지의 약점인가.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자신만만하지.

톡톡

어느새 나는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있는 불안함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 느낌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싶더니 고스트 대원이라고 찾아왔던 그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흘러들어오는 테일리의 기억과 감정을 버티지 못하고 한바탕 난리 치긴 했지.

테일리의 인생이 워낙 강렬하고 음울해서 나로서 그때 버티지 못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내 인생도 절망적이긴 했지만, 그 격이 다르다고 표현해야 하나.

하여튼 지금 느끼는 감정은 이곳 세계의 서예지의 감정이겠지.

머릿속 구석에서 스멀스멀 기어 오듯 떠오르는 이 기억도 마찬가지로 서예지의 기억이고.

테일리의 기억과 감정으로 두 명분의 인생을 산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지금 이 기억과 감정을 충분히 견딜 수 있지만, 솔직히 짜증 난다.

견딜 수 있지만 그게 좋다는 건 아니니까.

좋아.

결심했다.

이 사람… 아니, 여러 번호로 날아오는 문자를 보면 혼자서 벌이는 짓은 아닐 거고 여기서 좀 더 선을 넘는다면 끝장을 봐야겠다.

이런 일은 여태 델 리가 대신해줘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긴 하지만 충분히 처리할 수 있겠지.

그 근거 없는 자신감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유리한 상황이고 혹시 몰라서 조금씩 떠오르는 기분 더러워지는 기억을 뒤져봤지만 아무리 봐도 예지가 피해자였다.

그렇지만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단 말이지.

꽤 악랄하게 괴롭혔다.

거의 죽으라는 수준으로 괴롭히다가 왕따로 고립된 예지를 도우려는 사람이 나타나 구해주는 척 예지에게 희망을 품게 만들고 괴롭히던 놈들과 사실 같은 한패라고 알려준다든지.

아니면… 음, 이쯤 하자.

다행히 성적인 괴롭힘을 받지는 않은 것 같지만 오랜 괴롭힘을 당했고 성인이 되고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때 예지는 이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 여자끼리 예지를 괴롭힐 때 옷을 벗기고 사진을 찍기는 했으니 성적인 괴롭힘을 받지 않은 건 아닌가?

저쪽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혹시 이것에 기인한 건가.

그렇다면 그 자신감이 이해됐다.

분명 얼굴까지 알려진 방송인의 속옷 차림이 인터넷에 올려지는 건 치명적이니까.

거기에 사진과 함께 유언비어까지 퍼트린다면…

방송을 망친다느니 했던 말이 허언만은 아닌 셈이네.

그런데 이곳의 법은 범죄자의 인권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살벌함을 보였는데 그걸 각오하고 벌인 짓인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자기가 괴롭히던 사람이 잘나가니까 예전처럼 약점 잡고 돈이나 뜯어볼 생각인 건가?

부디 그게 아니길 바라는데…

맞는다면 없애버리고 싶어지니까.

흠.

그건 그렇고 왜 내가 이쪽의 서예지라고 판단한 거지.

서예지와 테일리의 공통점이 뭘까?

보지 않았지만, 외모는 분명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름이 같아서 그렇게 판단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거고 단순히 이름만 같았으면 동명이인으로 생각했겠지.

분명 서예지와 테일 리가 서로 닮은 점이 있으니 지금의 나를 이곳의 서예지라고 생각한다고 보는 게 맞겠지.

무엇이 그들의 확신이 서게 만든 거지?

서예지의 사진이 있다면 확인하고 싶은데 델 리가 이미 서예지의 흔적을 모두 테일리로 바꿔버려서 확인은 불가능했다.

오죽하면 동사무소에서 신분증을 재발급받을 때 신분증에 테일리의 사진이 떡하니 박혀있었겠나.

너무 완벽하게 처리해서 이럴 때 문제가 생기는군.

델리에게 확인해보고 싶은데…. 하필 이때 자리를 비웠네.

뭐, 이제 자기 일은 스스로 처리할 때가 되긴 했지.

괜히 기분만 잡쳤네…

방송은 해야 하는데 그럴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지금 켜면 분명 방송에서 기분 나쁜 티가 날 텐데 어쩌지.

연기는 자신 없는데…

“얘들아~ 우리 왔어~”

“어허. 내가 왔는데 아무도 마중을 오지 않아! 예지야! 냥지!”

시끌벅적해지면서 정란이와 예화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찌나 기분 좋은지 그 둘은 노래하듯 말했다.

“이것들아! 조용히 좀 들어와!”

“냐냐냐냐~ 냐냐뇨~”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애들이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기분이 한결 나아진 기분이다.

참 신기하네.

일단 이 문제는… 조만간 처리해야겠다.

그년들을 일단 한 번 만나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야겠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사진으로 협박을 하려고 할 텐데 정말 뿌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의 법은 꽤 무거우니까.

문제는 그런 상식을 벗어나는 인간들이 당연히 있을 것이고 그들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사진의 회수가 우선이다.

옛날에 찍혔던 사진을 약점 삼았을지도 모른다는 건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델리라면 이 일을 한 번에…. 새삼스럽지만 델리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고 다시 한번 느꼈다.

골치가 아파져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에이… 애들 걱정하겠다.

내일 다시 생각해보자.

문을 열고 나와 친구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왔어?”

“왔지! 언니들은 잘 보고 왔어?”

“응. 수양이도 잘 지내더라.”

“그래? 근데 언니들 요즘 피곤하다던데 괜찮았어?”

“처음엔 그런 기색이었는데 우리랑 놀다 보니 괜찮아졌어.”

“당연하겠지.”

“?”

“뭐? 왜.”

당연히 그럴 거라고 확신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얘네들은 내 근처에 있으면 피로가 없어진다고 알고 있지.

그게 내 성격 때문이라고 믿고 있지만.

냥지가 정란이의 머리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머리카락 하나를 뽑는다.

“악! 엑? 엥? 뭐 하는 거야! 내 머리!”

“가만히 있어 봐.”

“뭐임? 어이가 없네.”

“아하하하하.”

옆에서 신나게 웃던 예화도 냥지에게 머리를 뽑히고 정란이와 같이 시끄럽게 따진다.

이럴 때는 합이 잘 맞단 말이야.

“너희도 이상한 색깔의 머리카락이 자라네.”

“무슨 소리야?”

“엥?”

“진짜 몰랐나 보네. 이것 봐.”

둘의 머리카락을 내미니 빨간색의 머리카락과 노란색의 머리카락을 보여준다.

여태 몰랐던 건지 둘은 신기한 듯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유심히 관찰했다.

“오. 뭐지? 나 염색한 적 없는데?”

“이게 뭐야.”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냥지는 휴대폰을 켜서 무언가를 검색하고 둘에게 보여준다.

“수양이도 주홍색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거든? 근데 잘 생각해보니 이게 수양이의 캐릭터 머리 색깔이랑 똑같단 말이지. 지금 너희 머리카락도 너희 캐릭터 머리 색깔이랑 똑같잖아.”

그 말에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잠시 생각하더니 냥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 것 같기도…?”

“와씨! 진짜네!”

“지금 내 머리도 안쪽 색깔이 조금 다르거든? 난 특히 조금 더 심한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어.”

냥지가 머리를 손으로 흩뿌리며 보여주니 확실히 다른 색깔의 머리카락들이 보인다.

“난 너 염색한 줄 알았지.”

정란이의 말에 예화가 동의했다.

눈치 빠른 녀석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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