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66화 (66/78)

〈 66화 〉 고민은 함께

* * *

복잡한 머릿속을 좀 비워보려고 밖에 나왔다.

바람 좀 쐬면 기분이 나아지겠지.

뿌려지든 말든 확 들이 받을까 싶었지만, 머리 비우고 냉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으니까.

벤치에 앉아 오늘 방송은 저녁 먹고 켠다고 공지에 올렸다.

푸른 하늘 위에 두둥실 떠다니는 하얀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니 근심이 다 사라지고 한결 편해진 기분이었다.

저 구름은 몽실몽실한 게 꼭 양처럼 생겼네.

공원에 아이들이 홀로그램 건으로 놀고 있었다.

내가 어릴 때 애들은 장난감 총에 BB탄으로 놀았었는데 이곳의 장난감 총은 좀 다른 모양인지 신호를 쏘고 맞았다는 판정이 뜨면 애들이 차고 있는 시계에서 소리가 나와 알려주었다.

어느 부위가 맞았고, 아웃인지 아닌지 정도?

서바이벌이랑 비슷한 느낌이네.

그래서 그런지 뭐가 날아다니지는 않지만, 아이들은 정말 긴장감 넘치게 놀고 있었다.

****

진짜 노란 머리가 자라네?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들을 골라보니 친구들 말대로 정말 노란 머리가 자라고 있었다.

와, 뭐지?

정말 신기하네.

병원이라도 가야 하나?

아픈 곳은 없는데…

머리카락을 살펴보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한결 더 예뻐 보이는 것 같아서 얼굴을 이리저리 잘 살펴본다.

며용~

귀여워진 건가?

아니면 예뻐진 건가?

뭐라고 단정 지어서 말하기는 힘들지만 뭔가 인상이 좀 달라진 기분이었다.

요즘 피부가 좋아져서 그런가?

이게 예지의 힘…?

어머, 공짜 미용~

진짜 예뻐지고 있나?

예뻐지니 나야 좋지만 이건 도대체 무슨 현상인 걸까?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친구들 다 그런다던데.

지금 이 변화가 생기고 있는 건 나와 냥…. 괜찮겠지.

걱정되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평안해졌다.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 같고 문제 생기면 병원이나 가봐야지.

그런데 눈에 이게 뭐지…?

잘 안 보이지만 무언가 있는 것 같아서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신비한 언어로 부르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노래.

내 전화?

예지 노래가 들려오는 거 보면 내 폰 맞는 것 같은뎅.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니 어느새 소파에 누워 잠들어있는 예화가 보였다.

얘는 왜 또 자고 있지.

냥지는 자기 방에서 방송 중인가?

식탁 위에 놓여있는 내 폰을 봤지만 시커먼 화면을 보여줄 뿐 아무 반응도 없었다.

아~ 맞다.

예지도 나랑 같은 벨 소리였지.

예지는… 나갔나?

예지의 방문을 슬쩍 열고 들어가 보니 책상 위의 스마트폰만 울리고 있었고 예지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동안 어디 나간 걸까.

워낙 밖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당연히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네.

요즘 좀 돌아다니긴 하지만.

스마트폰을 들고 예지를 찾아봤지만 역시 밖에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냥지랑 합방하고 있나?

그런 말은 없었는데.

냥지 방의 문을 슬쩍 열고 살펴봤지만 냥지가 신나게 노래 부르고 있는 모습만 보였었다.

오늘은 방송에서 노래하넹.

전화가 끊겼길래 원래 자리로 되돌리려는 순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화면을 보니 아까와 같은 번호.

그런데 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일 때문에 전화하는 걸까?

어쩌면 오늘 가야 하는 날인데 예지가 깜빡했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폰은 깜빡하고 촬영하러 간 건가?

내가 받을 수도 없고…

고민하는 동안 끊기고 다시 폰이 울렸다.

이 정도면 급한 일이겠지?

예지가 다른 사람 폰으로 자기 폰을 찾는 것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역시 받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창문 밖을 살펴보며 예지를 찾아보니 근처에는 없는 듯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는지 몰라서 가져다줄 수도 없고 좀 곤란해.

다시 전화가 끊겼지만 이번에는 아무리 기다려도 반응이 없었다.

이제 끝났나?

나중에 예지 돌아오면 바로 말해줘야겠다.

근데 얘는 어디 간 거야?

식탁 위에 스마트 폰을 내려놓는 순간 그 번호로 문자가 왔는데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심한 욕설이 간략하게 보인다.

도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욕을 적어 놓는 거야?

예지의 좁은 인맥과 성격으로는 원한 사기도 힘들 텐데.

냥지와 함께 동거하고 나서는 아닐 거고.

최근 외출이 잦긴 하지만 원래는 외출한 날을 손으로 꼽을 정도로 집 안에만 틀어박히던 애여서 짐작이 가는 부분이 없었다.

이 문자를 보고 예지가 상처받지 않을까?

사람들한테 상처받아 방 안에 틀어박혀 울던 예지의 모습이 기억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상처가 많은 앤데 주변에서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사람이 많은 거야.

입이 절로 삐쭉 튀어나왔다.

아까 그 번호로 온 문자를 눌러보니 보기 힘들 정도의 욕설이 가득했고 협박성이 짙은 글도 드물게 보였다.

널 죽이겠다느니 방송을 망친다느니 잘못 보내진 문자가 아니라 정확하게 예지를 알고 있는 듯 보인다.

[벌레나 먹고 바닥에 기어 다니던 년이 자기 주제를 모르고 ㅋㅋ 역시 검은 머리 짐승은 좋게 가면 안 된다니까? 은혜를 모르고 기어 올라. 개처럼 처맞기 전에 답해라. 이 사진 뿌리기 전에.]

맞아?

벌레를 먹어?

무슨 소리야?

눈살이 찌푸려진다.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눈을 어지럽힌다.

누가 봐도 약점 잡혀 협박 당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밖에 없는 내용.

검게 질척거리는 악의가 진득하게 달라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예전 예지의 성격은 이 때문…?

사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직도 이런 사람들이 있어?

법이 무섭지 않은 거야?

심지어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조직적으로 보낸 듯 여러 번호로 온 협박성 짙은 문자들.

사진?

무슨 사진을 말하는…

클릭한 순간 사진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살색 가득한 누군가의 나체 사진.

어맛… 깜짝 놀랐네.

갑자기 이게 뭐람?

모델 사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손가락을 벌려 손가락 사이로 얼굴이 살짝 보였다.

유명한 모델인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얗고 예쁜 몸매가 돋보였지만, 몸에 흉터가 가득했다.

그런데 묘하게 낯익은 몸이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위화감.

그런데 왜 이걸 보냈지?

아무리 생각해도 보낼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서 불안해졌다.

약점을 잡고 협박하는 문자.

예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

때린다든지 벌레를 먹인다는 글.

사진 속의 여자처럼 흉터로 가득했던 예지의 몸.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집에 가둔 예지의 태도.

예지는 사람을 두려워했고 밖을 나가지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아, 그래.

이 사진 속의 여자가 예지가 아닐 수도 있잖아?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을 떨리는 손길로 확대해본다.

제발… 제발…!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여자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려 폰을 놓치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진 폰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사진 속의 여자는…. 예지….

예지였다.

아니길 바랐지만…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은 얼굴.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예전에 이상하게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자신의 몸에 손을 대거나 보여주는 걸 무서워하던 예지의 행동이.

그런데 내 생각이 맞는다면 왜 그랬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겠어.

아무리 그래도 팔과 눈에 손대고 저 꼴로 만들었다면 그 사람들은 이미 잡혀가서 수정형일 텐데… 팔과 눈은 정말 사고로 잃었나?

왜 우리한테 말 안 한 거야?

말했다면 당연히 도와줬을 텐데 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이런 생각을 했지만 사실 정답을 알고 있었다.

예지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한테 자신의 괴로움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다.

분명 마음고생 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게 그 이유겠지.

아으으…. 짜증 나…!

이런 건 좀 의지하라고…!

바보... 바보 예지!

예지는 바보야!

****

이제 어느 정도 괜찮아졌으니 방송이나 해야겠다.

저녁 먹고 방송한다고 했는데… 일찍 해도 괜찮겠지?

묻었는지 알 수 없지만 대충 엉덩이에 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왔어.”

집 안에 들어오니 예화는 소파에서 팔자 좋게 침을 흘리며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음냐…. 너무 많아…”

“뭐가 많아?”

“ㄸ…기… 딸기…”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딸기 먹는 꿈이라도 꾸나.

한숨을 푹 쉬며 바닥에 떨어진 모포를 예화에게 덮어주었다.

근데 냥지랑 정란이는 어디 갔지?

같이 합방이라도 하고 있나?

내 방으로 들어오니 정란이가 책상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힘이 없어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냥지랑 싸우기라도 했나.

같이 살면서 한 번도 진심으로 싸운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정란아?”

“어…응? 예지 왔어?”

힘없이 웃는 정란이의 얼굴을 보니 괜히 걱정됐다.

진짜 어디 아프나?

“어디 아파? 힘없어 보이네.”

“응? 아, 방금 일어났어. 예화랑 자고 있었거든.”

어설프게 하품을 하는 정란이의 모습은 안타깝지만 믿음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정란이가 나한테 거짓말한 적은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으니 정말 방금 일어나서 힘이 없어 보였나?

그러고 보니 정란이나 냥지는 자고 일어나면 상태가 안 좋긴 하지.

정란이의 말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냥지는?”

“냥지? 방송하고 있던데. 노래하고 있음.”

아무리 봐도 몸 상태가 별로인 것 같은데 오늘은 좀 많이 먹여야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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