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나를 용서해 주었지
* * *
마리안느는 밥을 먹지 않게 되었다.
초라하고 맛없고 외로운 상태로는
도저히 넘길 수 없었다.
그런 식사를 씹어서 삼키기에는
이미 수 많은 추억을
마음속에 간직한 상태였다.
먹기 싫다는 그런 이유로
밥을 먹지 않는 것도 있지만
자신이 금식해서
건강이 안 좋아진다면
변해버린 남자가
아픈 자신을 신경 써줘서
다시 상냥하던 그때 그 남자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도 품고 있었다.
다시 상냥한 남자로 돌아와 준다면
얼마든지 굶을 수 있었다.
다시 돌아만 와준다면 말이다.
그렇게 마리안느는
계속 식사를 거부하면서
점점 야위어져 갔다.
이대로 간다면
마리안느는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말 것이었다.
그런 마리안느를 지켜본 조셉은
밖에 나가서 무언가를 사서 오더니
마리안느를 붙잡아서
밧줄로 꽁꽁 묶었다.
갑자기 밧줄로 묶이자
마리안느가 조셉에게 물었다.
[...뭘....하려는....거에요.....]
계속 밥을 먹지 않아서
기운이 없는 마리안느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마리안느의 물음을 무시한 채
조셉은 무언가를 가방에서 꺼냈다.
조셉이 꺼낸 건 수액이었다.
조셉이 무엇을 할지 눈치챈 마리안느는
온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
꽁꽁 묶여있는 데다
기운이 없어서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다.
조셉은 마리안느의 허벅지에
주삿바늘을 꽂고 라인을 잡았다.
주삿바늘이 들어가 정맥과 연결되자
조셉은 수액을 연결해
마리안느의 몸속으로 수액을 흘려보냈다.
수액이 마리안느에게 들어오면서
수액이 한 방울씩 천천히 흘러내렸고
마리안느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강제로 수액을 주입 당해서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굶주리든 몸이 아프든
기계처럼 대응하는
남자의 반응이
자신이 알던 그 남자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 같아서
수액이 들어오는 걸 느끼며
조용히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리안느의 마음과는 다르게
마리안느의 몸은 조용히 수액을 받아들였다.
마리안느의 몸은
살고자 했다.
대체 어째서.....
그런 일을 겪은 후
마리안느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차피 먹지 않으면
수액을 맞을 뿐이란 것을
마리안느는 깨달았다.
활기차던 집안은
이제는 너무나 적막하고
쓸쓸한 분위기로 변해버렸다.
오늘도 쓸쓸하게
혼자 저녁을 먹은 마리안느는
조셉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조셉은 어딘가 이상했다.
몸에서 땀이 나고
얼굴이 빨간 것이
어딘가 아파 보였다.
그런 조셉을 본 마리안느가
괜찮냐고 물었지만
조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휘청거리면서
마리안느를 씻기고
잠자리에 눕혀준 다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딘가 아파 보이는
기운 없는 조셉을
마리안느는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조셉은 요즘 들어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온몸에서 열이 나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조셉은 힘겹게 방안으로 들어와서
체온계로 열을 재보았다.
열이 40도가 넘었다.
심한 고열이었다.
조셉은 해열제를 먹으려고
일어나려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넘어진 조셉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방바닥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열이 너무 심해서
몸이 말을 안 들었다.
머리가 너무나 어지러워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열이 점점 심해지면서
조셉의 의식이 희미해졌다.
조셉은 이대로 이렇게 죽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조셉의 눈앞에
주마등 같은 것들이 보였다.
겁쟁이로 살아온
조셉의 삶이 눈앞에 펼쳐졌다.
조셉의 아버지는
변변찮은 노동자였다.
Akro 공장에서
하도급 노동자로 일하던 조셉의 아버지는
변변찮은 노동자답게
변변찮은 집에서
변변찮게 살았다.
조셉의 부모가 싸우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싸우는 이유야 다양하지만
그 원인은 모두 돈이었다.
그런 조셉의 부모는
조셉이 중학생 때 모두 죽었다.
조셉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중
담임선생님이 조셉을 따로 부르더니
조셉을 택시에 태워서
병원 응급실로 보내주었다.
담임선생님한테
아버지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조셉은
그냥 별일 아니겠지
그렇게만 생각하고
응급실에 도착해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더니
아버지는 마치 미라처럼
몸뚱이가 하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Akro 부설 공장에서 일하던
조셉의 아버지는
가스폭발이 일어나면서
전신에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조셉이 울면서 아버지를 부르자
조셉의 아버지가 말했다.
꼭 돈 많이 벌라고
돈 많이 벌어서
자기처럼 살지 말라고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 말만을 남긴 아버지는
집중치료실로 들어갔고
그 안에서 죽었다.
아버지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린 조셉은 이해하지 못했다.
조셉의 아버지가 죽고나서
Akro 회사의 대표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기자들과 함께 말이다.
사장이란 사람은
울고 있는 조셉의 어머니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런 다음
조셉에게 다가오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 잘 될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조셉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 모습을 기자들이 찍었다.
조셉은 그 말을 듣고
안심이 되었다.
정말로 다 잘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도 울지 않고
다시 학교에 다니고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Akro 사장과 사진 찍는 게 끝나자
뭔가 안심이 된 조셉은 배가 고파졌다.
조셉은 매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서
병원 휴게실에서 먹으려 했으나
휴게실은 자리가 꽉 차서 앉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지하주차장 구석에 앉아서
빵과 우유를 먹던 중
저 멀리서 사장과
부하 직원들이 오고 있었다.
주차된 차들에 가려져서
조셉이 있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사장은
비서가 차 문을 열어주자 말했다.
[이번에 죽은 놈 말이야. 피 묻은 붕대로 둘둘 말린 게 꼭 구더기 같더라?]
사장은 차에 올라타면서 불평했다.
[구더기 한 마리 때문에 귀찮게 되었어.]
그렇게 말한 사장은
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주차된 차들 사이에 숨어서
그 말을 몰래 엿듣고 있었던 조셉은
들으면 안 될 걸 들은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조셉은 먹던 빵을 마저 먹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다.
그런 다음 조셉은 잘못 들은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말이 잘못 들은 게
아니란 것을
조셉은 곧 깨닫게 되었다.
잘될 거라고 말하던
사장의 말과 달리
Akro 쪽 직원들은
아버지의 과실을 따지며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바보 같은 조셉의 어머니는
이런 일을 해결할 방법을 몰랐다.
변호사를 고용하던가
언론을 이용한다던가
그런 방법을 활용할
지식도 돈도 의욕도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안 그래도 쪼들리던 집안은
쪼그라들기 시작했고
술만 마시는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본 조셉은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직접 사장을 만나서 따지기로 했다.
그러나 어리기만 했던 조셉은
사장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전혀 몰랐고
그냥 무작정 본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장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Akro 본사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조셉은 꾸준히 모았던
얼마 안 되는 용돈을 털어서
고속버스를 타고
Akro 본사 앞으로 찾아갔다.
그렇게 겨우 도착해
회사에 들어가서 사장을 만나려고 했는데
회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조셉은 겁났다.
거대한 건물 안으로
수많은 어른이 들어가면서
문 앞에서는 보안요원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조셉 같은 어린애가 들어가면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장소처럼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들어가는 게 겁이 난 조셉은
회사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회사 건물 앞에서 쪼그려 앉아서
사장이 나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1시간이 지나도
2시간이 지나도
사장을 볼 수 없었고
그렇게 깜깜해질 때까지
기다리다 지친 조셉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왔는데
집이 너무 조용했다.
불이 다 꺼진 집안은
이상할 정도로 적막했다.
오직 욕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왔다.
욕실에 들어가 보니
물에 가득 찬 욕조 안에
조셉의 어머니가 피를 흘리며 죽어있었다.
자살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조셉은 어쩔 줄 모르고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Akro의 대표가 조셉에게 말해준
다 잘될 거라는 그 말이 떠올리며 말이다.
그 말은 조셉의 마음속에 남아서
조셉의 마음속을 갉아먹었다.
마치 시체를 파먹는
구더기처럼 말이다.
그 후 조셉은 보육원으로 들어갔고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조셉은
고아인 덕분에
공립대학 간호학부를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닐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어서
대학병원에 들어갔으나
일이 엄청 힘들었고
힘든 생활에 지칠 무렵
친구의 권유로
소방관 시험을 본 조셉은
소방서에 들어갔다.
그러나 소방관이란 직업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사고, 사건들과 함께
다양한 죽음들을 목격하면서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었지만
계속 목격하다 보니 점점 둔감해졌고
나중에는 별생각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소방서에서 3년을 근무하였고
월급에서 월세와 자동차 할부금 같은
고정지출이 빠져나가고
남은 돈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불릴 수 있을지
그런 고민을 하다 보면
부모님의 죽음도
Akro 사장에게 느낀 배신감도
아무래도 좋아졌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조셉은 삶에 찌들어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살아가던 조셉에게
큰 사건이 벌어진다.
소방서에 있으면서
같은 팀 선배 중에
조셉과 친하게 지냈던 선배가 있었다.
선배와 함께 근무하던 중
놀이공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놀이공원에 있는 귀신의 집에서 불이 났는데
남자애가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조셉과 선배는 불탄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불타고 있는 건물로 들어간 조셉은
쓰러져있는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를 안은 조셉이 앞장서고
선배가 그 뒤를 따라오면서
탈출하던 도중에
불타는 천장에서 커다란 조명이
선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이를 안고 있는 조셉은 뒤돌아서 선배를 바라봤다.
선배는 휘청거렸지만 다시 일어나자
조셉은 안심하며
다시 출구를 향해 달렸고
불타는 건물을 빠져나와
조셉은 뒤를 돌아봤더니
선배가 없었다.
조셉은 구출한 아이를
다른 대원들에게 인계하고
다시 들어가서 선배를 찾으려 했는데
불타던 귀신의 집이 무너졌다.
선배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귀신의 집에서 귀신이 되어버렸다.
건물이 무너지고 난 뒤
뒤늦게 지원 인력이 오고
불타는 건물에 남아있는 불을 끄고
잔화 정리를 하며
혹시라도 기적처럼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선배를 찾아서 잔해를 뒤지던 중
선배를 발견했고
발견된 선배의 모습은
너무나도 끔찍하게 변해있었다.
불에 타 녹은 것들이
애매하게 타버린 선배의 시체와 함께
한 덩어리로 뒤엉켜 있었다.
귀신의 집에 있던
플라스틱 조형물과 알루미늄 같은 금속들이
뜨거운 열에 녹아내리면서
죽은 선배 위로 흘러내렸고
그것들이 굳으면서 시체와 합쳐져서
마치 번데기를 뭉갠 것 같은
그런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조셉은 그런 모습을 보며
그저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참혹한 순간은 지금부터였다.
선배의 시신을 관에다 집어넣고
장례식을 치러야 하는데
시신에 이것저것 붙어서
관에다 넣을 치수가 나오질 않았다.
장례업체에 부탁해도
도저히 못 해주겠다 하니
시체를 다듬어서
관에다 집어넣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했다.
소방서에서 자원자를 모집했고
4명이 지원했다.
선배와 조셉이 속해있던 팀의 팀장
선배 동기 2명
그리고 조셉
이렇게 4명이 작업을 하기로 했다.
차고에서 소방차를 다 빼고
차고 셔터를 내린 다음
시신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시신을 수습했다.
뗄 수 있는 건 떼버리고
시체와 딱 붙어서 뗄 수 없는 것들은
톱으로 썰어냈다.
그러다 플라스틱 덩어리를 떼어내면서
살점도 같이 떨어졌는데
떨어진 자리에서 액체가 새어 나왔다.
피가 아닌 투명한 액체 같은 것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그냥 다들 말없이 묵묵히 작업한 끝에
관에 들어갈 크기로 다듬고
붕대로 둘둘 말아
시신을 관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선배의 장례식을 치렀다.
오열하는 선배 가족들을 보면서
조셉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배는 결혼해서
아이도 2명이나 있었다.
조셉은 선배 집에 초대받아
선배 아내가 만들어준
식사를 자주 대접받았었다.
선배 아이들은
조셉을 삼촌이라 부르며 따랐었다.
그런 선배 가족들에게
나만 빠져나와서
나만 살아남아서
미안하다고
그 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조셉은 소방관을 계속하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사람 살리려고
사람이 죽는다면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인지
조셉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선배는 결혼해서
아내와 아이도 있었고
부모님도 살아계셨다.
그에 비해
조셉은 독신이었고
부모도 없었다.
만약 둘 중 하나가 죽었다면
선배 대신 내가 죽었어야 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대체 왜 내가 살아남은 건지
선배는 죽고 나는 왜 살아있는지
그 이유를 조셉은 알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든 다음부터
조셉은 변하기 시작했다.
성격이 거칠어지고
모든 걸 다 때려 부수고 싶고
다른 사람과 자주 싸우게 되고
이유 없이 화가 나곤 했다.
살아있는 것이
살아남은 것이
조셉은 너무나 괴로웠다.
그냥 죽고 싶었다.
자살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죽은 선배를 생각하면
그냥 죽을 수가 없었다.
선배 대신 살아남았으면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무의미하게 죽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교통사고 현장에서
사지를 잃은 여자애를 구출하고
나중에 뉴스를 보면서
그 여자애가
Akro 대표의 딸이란 걸
알게 되면서
이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운명이라는 불확실함에
모든 걸 맡기기로 한 조셉은
저 여자아이를 이용해서
여자아이의 아버지를 만나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대체 뭘 걱정하지 말라는 건지
뭘 믿고 다 잘 될 거라고 말한 건지
본인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살아가는 걸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자신을 세뇌하면서
사장의 딸에게 찾아갈 방법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여자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조셉은 여자애 집에 머물다가
여자애 부모가 찾아온다면
다 죽여버리고
눈앞에서 부모가 죽는 모습을 지켜본
여자애한테 말해줄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고 다 잘 될 거라고
그리고서
여자애의 눈앞에서
자살할 것이라고
그런 결심을 한 조셉은.
여자애를 돌보면서
천천히 때를 기다렸으나
여자애 부모는 오지 않았고
그렇게 조셉은
여자아이와 같이 살아가게 되었다.
사지가 없는 그 아이를
구더기라 부르며 말이다.
그렇게 여자아이를 구더기라 부르며
함께 살아가다 보니
복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여자아이는 사지가 없었고
뭐든지 남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야만 했으나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싶어했고
그 누구보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런 아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내 안에 무언가가 바뀌는 걸 느꼈다.
흔히 장르 소설에서 나오는
회귀, 빙의, 환생 같은 걸 안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자아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나는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으면
차갑게 서린 원한은 녹아내렸고
여자아이가 눈물을 흘리면
뜨겁게 불타던 분노는 사그라들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마리안느였다.
그렇게 마리안느와 살아가면서
복수라는 명분에서 나오는
추악한 감정들이 사라지자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었다.
마리안느와 만나고
모든 걸 운명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마리안느를 찾아왔으나
사실 나는 삶에서 도망쳤다.
어디라도 좋으니까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겁이 난다는 이유로
살기 싫어졌다는 이유만으로는 도망칠 수 없어서
복수니 하는
그런 이유를 만들어서
도망친 게 아니라고
내 자신을 속여왔다.
그렇게 도망친 나는 마리안느를 학대했다.
그렇게 학대한 것이 내심 미안하니
갑작스럽게 잘해주려 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양심 없는 생각이나 하게 되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다.
제대로 미쳐버리는 것도 못 하고
미친 척 흉내만 내다가
모든 걸 망쳐버리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한심한 점은
마리안느한테 모든 걸 밝히고
사과를 할 수 없는 나약한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마리안느를 만나고
나는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무엇하나 변하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겁쟁이였다.
마리안느에게 용서받지 못할까 봐
마리안느가 나를 혐오할까 봐
모든 걸 털어놓지 못하는 나는
구더기보다 못한 인간이었다.
그런 나를 마리안느가 좋아해 줄 때마다
마리안느에게 사과하지 못하는 내가 싫어져서
나에게 다가오는 마리안느를 무시했더니
벌을 받은 것인지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점점 아파오는 몸은
심하게 열이 나기 시작했다.
겁쟁이로 살아온 내가
불타 죽을 운명이었던 내가
이렇게 벌을 받아 죽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고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무언가 차가운 게 얼굴 위로 떨어졌다
차가운 감촉에 놀라서
힘겹게 눈을 떠보니
눈앞에 누군가가 보였다.
천사였다.
금발 머리 천사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파란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