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잘 있어
* * *
겨울이 다가오는 이 시기에는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어느 순간 해가 사라져 버리는 그런 특징이 있다.
그런 계절에
늦은시간, 통행이 거의 없는 국도는
다른 때보다 훨씬 어둡고 적막한 분위기를 풍기기 마련이다.
그런 국도 위를
검은 차들이 앞뒤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한 채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대에는
마리안느와 베르카가 타고 있었다.
차량 뒷좌석에 앉아 있는 베르카는
자기 바로 옆좌석에 앉아 있는 마리안느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의결권을 모으는 건 솔직히 힘들 거야. 그 망할 아버지가 붙들어 매고 있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니까.]
베르카는 자기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동구권 사람들 특유의 억양으로
마리안느에게 열심히 설명하였다.
[언니가 가진 지분만으로는 이길 가능성이 매우 적지, 그래도 다행인 점은 우리 쪽에서 먼저 선수를 쳤다는 점이지.]
베르카의 계획은
두 달 정도 후에 있을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끌어모아 ,두 사람의 아버지를 실추시키고
경영권을 끌어모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럴 힘이 부족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베르카는 마리안느에게 열심히 했으나
마리안느는 뭐라 떠들든 별로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르카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먼저 선수 쳐서 우리 이복동생을 붙잡아 인질로 잡고 있으니 그 잘난 아버지라도 크게 개수작은 부리지 못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저 애가 가졌는지분만큼 의결권을 행사를 하지 못한 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 쪽에도 승산은 있어.
총회가 열릴 때까지 도망다니면서 버티기만 한다면 말이야…..언니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베르카가 뭐라 말하거나 말거나
마리안느는 머릿속으로 계속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자신과 베르카가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 하는 듯,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갈 방법
그리고 조셉의 안부
두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베르카의 말을 들어 줄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해결할 수단이
마리안느에게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방법?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100m도 제대로 못 기어가는데
어떻게 돌아간단 말인가?
베르카의 협력은 기대할 수 없다.
애초에 지금, 이렇게 된 상황에서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결될 것이 있는가?
그리고 조셉의 안부도 알고 싶었지만
알 방법이 없었다.
조셉에게 전화라도 한통해서
괜찮냐고, 별일 없냐고 묻고 싶지만
마리안느는 지금 연락할 수단도 없었다.
물론, 베르카에게 전화 한통 해 달라 할 수야 있겠지만
조셉의 휴대전화번호를 몰랐다.
요즘 세상에 누가 핸드폰 번호를 외운단 말인가?
수첩에다가 전화번호를 적어두던 시대는 없고
자기 가족들 번호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 한 세상이다.
하물며 핸드폰 사용도 안 하고 외출할 일도 없는 마리안느가
조셉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이런 꼴이었다.
마리안느는 자기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모든 걸 남이 해주는 대로
맡기면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
그것이 자기 처지였다.
조셉과 같이 지내면서
마리안느는 많은 일을 했다.
손이 없지만 입으로 타자를 쳐서 편지를 써 보고
비록 화면으로나마 아이들을 가르쳐보고
수영도 하고...대필 작가를 구해서 글도 써 보고...
많은 것들을 했다.
하지만 결국 이 꼴이다.
손도 발도 아무것도 없는 마리안느는
결국 이대로
모든 걸 남에게 맡기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손이 없어도 상관없지 않았다.
발이 없어도 해낼 수 있지 않았다.
조셉의 곁에서
쓰고 입고 먹고 마시고 일하고 글을 쓰고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조셉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손도 발도...그리고 조셉도
모두 없는 지금의 자신은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자기 몸뚱어리에 걸려진 저주
아니, 자기 운명이었다.
그렇게 마리안느가 머릿속으로
자기 저주스러운 운명에 대해 생각하면서
베르카가 뭐라 하든 듣고 있지 않자
베르카가 진지한 목소리로 마리안느를 달랬다.
[언니...지금 많이 심란한 거 알아…하지만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일단 내가 시키는 대로...]
그러던 그 순간,
무언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마리안느와 베르카,
두 사람이 타고 있던 차량에 큰 충격이 전해졌다.
달리던 차량을
무언가가 들이받았다.
갑자기 전해진 큰 충격에
하던 말을 멈춘 베르카는
큰소리로 외쳤다.
[무슨 일이야........!]
베르카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니
다른 차량이 달리고 있던
자기 차를 박은 듯했다.
베르카는 황급히 차를 빼라고 시키려던 그 순간
검은색 차량 여러 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겠지
[이런 ㅆ…]
베르카에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다.
상황이 최악이었다.
마리안느를 찾아야 한다.
조셉은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기에는
별로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여동생과 외출하고 마리안느가 연락이 없는 것을
경찰은 그렇게별로 중요한 사건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집에 화재가 났던 것과
신원미상의 남자들이 죽은 문제를
더 큰 사건으로 보고
일단 조셉을 붙잡아서 조사를 진행하겠지.
그렇게 된다면 수사과정이 진행되면서 연류 될 것이고
시간이 지체되면 마리안느가 어떤지 알 방법은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조셉 스스로
마리안느가 어떤 상태인지
무슨 일인지 알아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조셉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세리자와에게 연락했다.
조셉은 세리자와에게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설명했다.
갑자기 찾아온 여동생과 외출한 마리안느
그리고 혼자 남은 집으로 찾아온 수상한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
결국에는 집이 불타버린 것을 설명하고
마리안느의 상태를 알고 싶으니
그녀의 위치를 추적할 방법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조셉이 다급한 목소리로
갑작스러운 사건을 이야기하는 걸
진지하게 듣고 있던 세리자와는
마리안느가 탄 차량번호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조셉은 차량번호를 알지 못했다.
처음 본 차량번호를 어떻게 외운단 말인가.
차량번호를 모른다고 조셉이 말하자
그럼 차량 모델명과 방문시간이라도 말해 달라고 세리자와가 말했다.
조셉은 기억을 되짚어서 마리안느가 타고간 차량기종과 떠난 시간을 말해주자
세리자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거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1시간 정도 지나자
세리자와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인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지역경찰과 도로관리국에 문의해서 알아본 결과
마리안느가 탄 것 같은 차량이
CCTV에 찍혀 있었고
그 차량이 마지막으로 찍힌 곳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전화를 받으면서 조셉은 바로 차에 올라탄 뒤
차량에 시동을 걸고
세리자와가 알려 준 위치로 차를 몰았다.
어두운 국도를 달려서
한참을 가던 중
조셉은 무언가를 보았다.
갓길에 차량이 세워져 있었다.
마리안느가 타고 갔던 그 차였다.
조셉은 그 옆에 차를 세우고
세워진 차량으로 다가갔다.
차량을 자세히 바라보니
차량은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었다.
다른 차량이 박았는지 찌그러져 있었고
차량 유리도 파손 되어 있었다.
그리고 찬찬히 살펴보던 중
혈흔과 총알 자국을 발견한 조셉은
심장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흔들리는 머리가 당장 이곳에서 어떻게든 마리안느를 찾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조셉도 그러고 싶었다.
당장에라도 아무차라도 열고 뒤집어엎고 싶었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곳엔 없다.
본능적인 판단에 평소 같으면 아무런 거부감 없이 행동했을 것이지만, 이번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조셉은 머뭇거리다 다시 차에 올라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부디 제발
마리안느가 무사하길 빌면서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