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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구더기짱-47화 (47/47)

〈 47화 〉 스스로 살아가렴

* * *

베르카는 자신의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차가웠다.

따뜻한 피가 빠져나가면서

베르카의 몸은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베르카가 꼭 끌어안고 있던

자신의 언니를 누군가 품에서 데려가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온기를 잃고 말았다.

따뜻함이 빠져나간다.

차가운 건 싫다.

몸이 차가워지면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곤 했다.

온기 없이 쓸쓸하게 홀로 남아있는 이 상황

자신의 어린 시절 같았다.

나는 겨울이 싫었다.

여름의 더위도 싫지만

겨울의 추위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추위가 더위보다 괴로운 이유는

추위는 사람을 더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해가 짧아지고 금세 어두워지는 계절

곁에는 아무도 없다.

겨울의 찬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서글프게 만든다.

겨울만 되면 나는 자주 아팠다.

집안의 공기는 차가워서 마른 기침이 흘러나왔고

방바닥이 차서 자꾸만 발가락이 시려웠다.

그러나 난방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홀로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가는데

난방비를 낼만한 형편이 못 되었다.

나의 어머니는 한때는 배우였었다.

어머니가 배우로써 가장 빛나던 시절은

한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끝났다.

어머니의 공연을 관람하던 한 청년은

공연이 끝나면 어머니를 자주 찾아오곤 했다.

그러다 휴일에도 만나기 시작했고

곧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연애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청년은 어머니를 버리고

좋은 집안의 여자에게 가버린 것이다.

버려진 어머니는 실의에 빠져있다가

자신의 몸의 변화를 눈치채고 말았다.

자신을 버린 청년의 아이를 임신했던 것이다.

청년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나

답장은 없었다.

몇날 며칠을 혼자서 고민하던 어머니는

용기를 가지고 홀로 애를 키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용기가 아닌 무모함이었다.

혼자서 애를 키운다는 것은

어머니의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어머니는 더는 배우로 일할 수도 없었고

고되고 힘든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혼자서 애를 키우면서 돈을 버는 건 힘든 일이었다.

돈은 벌어도 벌어도 항상 부족하고

퇴근하고나면 쉬지도 못하고

애를 돌봐야 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머니는 자신을 홀로 키웠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가 일하러 가면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혼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떨면서

어머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날도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TV만 틀어놓고 어머니를 기다리던 중

TV에서 그 사람이 나왔다.

나의 아버지

나는 아버지는 한 번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TV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대기업 사장

그 사람이 나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사람의 딸이 TV에 나왔었다.

TV로나마 살펴본 자신과 달리

저 사람은 너무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았다.

자신과 달리 한겨울에도 따뜻한 방안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으면서 지낼 것이다.

아무도 없는 차가운 방안에서

TV를 바라보던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따뜻하게 지내는데

나는 왜 덜덜 떨고 있는 걸까

저 사람은 따뜻한 봄날 같은 삶이고

내 삶은 왜 차디찬 겨울날일까

당신과 나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계절을 살아가는데

어째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속으로 고민했으나

끊임없이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을 만나서 물어보고 싶었다.

그 사람이 다니는 학교로 찾아가서

자신이 이복동생임을 밝혀볼까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찾아간다고 별로 상황이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답이 나오지 않는 추위를 견디며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고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렇게 매년, 추운 겨울을 견디던 중

어느 겨울날, 유난히도 매서운 한파가 찾아왔다.

그해 겨울, 나는 몸이 굉장히 아팠다.

몸이 아파서 학교를 결석하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감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기침이 심해지더니 열이 심해지고 몸이 불덩이처럼 타오르면서 죽을 것 같았다.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으나

일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불타는 머리로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가기로 했다.

응급실로 이동하면서 보호자 연락처를 달라고 하자

나는 내가 연락하겠다며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었다.

내가 전화를 건 곳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학교 행정실이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가 아니었다.

학교 행정실 직원이 전화를 받자

나는 핸드폰을 꽉 쥐어 잡고 말을 꺼냈다.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동생인데

수업 중인지 연락할 수 없어서 대신 전해달라고 했다.

동생이 아프니 병원으로 와달라고 말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실인지 물으면 자신 있게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행정실 직원의 전해주겠다는 대답을 들은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 사람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한 말은 금세 탈로 날 거짓말 아닌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헛소리를 그 사람에게 하고 말았다.

열이 너무 올라서 제정신이 아닌 나는

나는 곧 죽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존재를, 나의 최후를

그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이

보잘 것 없는 나만의 반항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났다.

응급실 침대 위에 누워있던 내 침대로 누군가 찾아왔다.

어머니가 왔다고 생각한 나는 고개를 들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다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을 가쁘게 쉬고 있고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혀있는

나의 언니

추운 겨울날, 나는 언니를 처음 만났다.

따스한 봄날 같은

나의 언니를.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따스함을 잃어가던 중

알 수 없는 온기가 느껴졌다.

베르카가 눈을 떠보니 한 남자가

자신의 복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 바로 병원에 데려가 줄 테니까!]

남자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복부를 틀어막고 있었다.

그러나 피는 계속해서 새어나왔다.

베르카는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언니를 바라보았다.

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었다.

언니 옆에 누운 베르카는 죽음이 다가오는 걸

흐릿해지는 머리로나마 알고 있었다.

이제 끝이었다.

어디서 잘못 된 걸까?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그 생각이 떠오르자

베르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차가운 현실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따뜻함 속에서 끝나고 싶었다.

온통 차갑게 느껴지는 자신의 몸에서

눈물만은 따스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이제 곧 죽는다.

더는 언니를 볼 수가 없었다.

베르카는 고개를 돌려서 언니를 바라보았다.

나의 언니, 마리안느.

나는 죽는다.

그렇지만 언니는 계속해서 살아가야한다.

언니는 살아서 행복해야 한다.

그렇지만 언니는 팔이 없다. 다리가 없다.

그렇다면.....

베르카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베르카는 이 남자를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언니를 불행하게 만들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어쩔 수 없다.

어린시절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처럼

다시 한번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눈앞에 있는 저 남자한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흘러간 자리가 빠르게 식어가는 걸 느끼며

베르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제 더이상 나는....나는...더는 언니를 만날 수가 없어....나는 곧...죽을거야...]

베르카의 입에서 기침이 나왔다.

쿨럭쿨럭하고 베르카가 기침을 하자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부탁할 사람이....지금은 너 밖에 없어....내가 3가지 부탁을...할 텐데 들어줄 수 있어...?]

피가 흐르는 베르카의 복부를 필사적으로 틀어막으며

조셉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카는 떨리는 입술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첫째는....]

죽어가는 베르카의 목소리는 힘이 없어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셉은 귀를 바짝 붙이고

베르카가 하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새겨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르카의 마지막 부탁을 들은 조셉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셉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입을 열고 대답했다.

[알겠어. 내가 반드시 데려갈게. 그러니 이제 좀 쉬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다짐을 듣자

베르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리안느가 눈을 떴을 때

온통 하얀색만 보였다.

벽지 뿐만 아니라

베개도 침대시트도 이불도 하얀색인 방에서 눈을 뜬 마리안느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마리안느는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무언가 무거운 추를 매달고 있는 느낌이었다.

수상한 위화감에 자신의 몸을 바라본 마리안느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려다 본 자신의 몸에 팔다리가 붙어 있었다.

있을리가 없는,

이제는 없는 것이 익숙한 팔다리가,

자신에게 붙어있는 모습을 내려다본 마리안느는

이것이 꿈이라고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꿈에서나 보던 광경이었다.

한때는 당연했으나 이제는 당연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

자신의 몸에 팔다리가 붙어있었다.

손가락도 발가락도 모두 붙어있는 멀쩡한 팔다리가

자신의 몸에 붙어있었다.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눈을 떠보니

없어진 팔다리가 붙어있다.

믿기지 않는, 믿을 수 없는

그야말로 꿈만 같은 광경

그렇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마리안느에게는 팔다리가 붙어있었다.

있을리가 없는 팔다리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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