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상하이 공방전 (2)
* * *
화양연화.
어라이징의 베타 서버때부터 유지되어온 중국의 명문 길드. 세르레니아 루인이 세운 '신세리아 르 메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라이징 내 부동의 1위 길드였으며, 시즌 보스들의 난이도를 측정하는 역할을 맡을만큼 그들이 게임에 끼치는 영향은 어마어마하였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허망급 아이템을 앞세운 신흥 길드들이 나타나며 지금은 그 선두의 자리를 내놓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것이 화양연화였다.
"......좋아."
헌데 그런 그들과 호각으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잘 싸워주고 있는 자신의 길드원들을 바라보며, 이시연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숫자면에서는 화양연화가 압도적으로 우세할지 몰랐으나, 길드원 하나하나의 질은 아리아 길드가 훨씬 우세하였다.
꼼꼼히 면접과 시험을 보며 길드원을 선발하는 아리아 길드와는 달리, 입단 신청만 하면 무지성으로 바로 길드 가입을 승인시켜주는 화양연화였으므로, 개개인의 스펙은 결코 자신들보다 뛰어날 수 없었다.
'이대로만 가면......'
지금 기세로만 간다면 그 화양연화를 꺾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게다가 이정도 규모의 전투는 길드전이라 치부할수도 있었으니, 승리시 그들에게 막대한 배상금 또한 요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허나,
"크, 크아아악!!"
"일제히 덤벼!!"
"틈을 주지마라!"
"......"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듯,
전장 한군데서 규칙적으로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곳에 서있는 것은 붕대로 눈을 가린 채 검을 휘두르는 맹인 여성.
"라이린 쉬옌......"
화양연화의 부길드장, 라이린 쉬옌을 바라보는 이시연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시각장애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어라이징 개인 랭킹 3위에 오른 전설적인 플레이어. 단순히 몸집만 큰 화양연화가 타 길드에게 무시받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는 그녀의 존재여부도 있었다.
"으아아아악!!"
"이쪽으로 병력을 집중해!!"
"......"
딱히 스킬을 사용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워낙 압도적인 감각 스탯과 신체 레벨 탓에 칼을 휘두를 때마다 자신의 길드원들이 죽어나간다.
"씨......"
......결국, 롱소드를 고쳐잡고 천천히 라이린 쉬옌을 향해 걸어가는 이시연. 명색이 길드장인데 부하들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
이시연이 왔음을 감지한 것인지, 고개를 그녀쪽으로 돌리는 라이린 쉬옌.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곧바로 캐치해 낸 그녀에, 이시연은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괴물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치켜드는 그녀.
이미 자신이 온 것을 알고 있을테니, 딱히 소리로 알릴 필요는 없겠지.
"길드장님이다!"
"싸우시는데 방해된다! 빨리 비키자!"
......길드원들 또한 이시연이 온 것을 보고는 반색하며 서둘러 자리를 비킨다. 역시 누구 부하인지, 곁에 있어봤자 도움이 되지 않을 걸 바로 눈치채고 바로 자리를 비우는 그들.
"포위 당하지 않도록 전열 재정비해."
"알겠습니다!"
서둘러 전장으로 복귀하는 길드원들을 향해 한마디 명을 내린 뒤, 이시연은 다시금 시선을 라이린에게로 돌린다. 어느덧 마치 옥타곤 마냥 비워져버린 그녀들의 주변.
"......자신 있으십니까."
......자신의 지팡이검을 빙빙 돌리며, 라이린 쉬옌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러자 턱을 긁적이며 가볍게 답하는 이시연.
"미안한데, 지는 싸움은 안하는 주의라서."
한껏 여유를 부리며 그녀에게 답한다.
뭐, 레벨만 따지자면 라이린에 비해 자신이 300레벨 가량이나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전투에 미치는 요소는 레벨이 전부가 아니었으니까.
"그 근거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라이린 쉬옌.
이시연 또한 하찮다는 얼굴과 함께 그녀의 말을 맞받아친다.
"우리 길드 입단 테스트 봤다가 떨어졌었던 주제에 말이 많네?"
"윽,"
...라이린 쉬옌이 뉴비이던 시절, 한창 몸집을 불려나가던 아리아 길드의 입단 시험에서 떨어졌던 흑역사를 자극하는 이시연. 그녀의 말에, 라이린은 헛기침을 해보이며 짜증난다는 목소리로 답하였다.
"......그러니까 당신이 인재보는 눈이 없다고 하는거 아니겠습니까."
...결과가 어찌되었든 '랭킹 3위'라는 거물로 성장한 라이린 쉬옌. 그런 자신을 떨어뜨리다니, 지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다는 듯 이빨을 빠드득 갈았다.
"지원이랍시고 왔더니 적이랑 내통이나하고, 또 정작 필요한 옥시안님은 어디로 보내신겁니까? 정말 당신네는 구제 불능이군요."
"......라고 중국이 말했습니다."
"조금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이시연에 버럭 소리를 지르는 라이린 쉬옌. 그런 그녀를 아직 어리다는 듯이 바라보며, 이시연은 자신의 롱소드를 굳게 쥐어 잡았다.
"......그러는 너야말로 뭐? 옥시안님을 캐스팅? 내 앞에서 NTR이라도 해가겠다고?"
......아리아 길드와는 비교도 안될 자본을 사용하여 이미 소속이 있는 옥시안을 영입하게 가겠다고 당당히 선언한 화양연화. 그 말도 안되는 소리에 잔뜩 불쾌감을 내뱉으며 이시연이 말하자, 라이린은 코웃음을 치며 답하였다.
"그건 저희의 애초 목표였습니다. 더불어 가난한 한국 길드 나부랭이에 붙어있을바엔 저희 화양연화와 동맹을 맺는 것이 옥시안님에게도 이득이겠죠."
"......"
벌써부터 결말이 보인다는 듯 빙긋 웃음을 짓는 라이린에, 이시연은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면 곤란하지.'
자신의 퀘스트를 위해서는 옥시안의 협조는 필수요소. 만에 하나 그녀를 뺏기는 순간, 자신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만다.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한낱 요괴따위한테도 굽신굽신 거리고 왔는데, 겨우 중국 길드 따위한테 방해받을 수는 없는 노릇.
"......마지막 기회야. 꺼져."
이시연이 검으로 라이린을 겨누자, 그녀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팡이검을 고쳐잡는다.
"......그건 제가 할 소리입니다."
"......"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는 그들.
이내 한순간의 침묵이 광야를 지나가고,
"죽어 그럼."
"후회하지 마십시오."
각자 자신의 무기를 치켜들고 서로에게 달려든다. 곧바로 이어지는 라이린의 '찌르기' 공격. 본래 찌르기 공격은 그 힘이 부족하지만, 달려오는 속도를 이용한 덕분에 매섭고 묵직한 공격이 이시연의 목을 향하였다.
"하."
허나, 식상한 공격이라는 듯 간단하게 그녀의 검을 흘려버리는 이시연. 이어서 그대로 몸을 한바퀴 튼 뒤, 힘이 실린 뒤돌려차기를 라이린에게 날린다.
"......"
재빨리 고개를 숙여 이시연의 발차기를 피하는 라이린 쉬옌. 아리아 길드의 길드장은 그런 그녀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역시 격투기는 안먹힌다는건가?"
시력이 없는 탓에 감각 스탯에 올인했을 그녀이니, 주변 공기의 흐름을 노골적으로 바꾸어버리는 단순한 격투 기술은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클 터. 무언가 복잡하고 그녀의 예상을 깨뜨릴만한 공격이 필요했다.
"여러모로 골치아프다 너."
"......싸움중에 말이 많습니다."
...그녀의 지팡이검이 다시금 자신에게 휘둘러져온다. 재빠른 공격에 서둘러 롱소드를 치켜들어 막는 이시연이었지만,
"......!!"
라이린의 왼손, 즉, 지팡이검을 든 반대손에서 날카로운 단도가 휘둘러져온다. 예상치못한 연속 공격에 피할 타이밍을 놓친 그녀. 그 서슬에 예리한 칼날이 이시연의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조금만 밑이었다면 그대로 목을 베였으리라.
"......"
황급히 거리를 벌린 뒤 자신의 뺨을 따라 흘러내려오는 피를 닦는 이시연. 이어서 재밌다는 듯 얼굴 한가득 웃음을 머금는다.
"많이 컸다?"
"......자랑은 아니지만 랭킹 3위니까요."
이 말과 동시에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공격. 마치 반격할 틈을 안주겠다는 것만 같았다.
허나,
"......실드 배리어."
"......?!!"
자신의 롱소드를 땅에 박은 뒤 무어라 중얼거리는 이시연. 그러자 다이아몬드 형태의 방어막이 그녀 앞에 생성되어 날아오는 라이린의 공격을 튕겨내버린다.
"크윽......"
분한 표정과 함께 거리를 벌리는 라이린.
목에 걸린 스카프를 고쳐매며, 그제서야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술을 깨문다.
"당신, 설마, 세이비어 나이트......"
"오, 정답!"
그녀의 말에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시연. 이어서 땅에 박았던 롱소드를 다시 빼들고는, 이번엔 서서히 자신의 머리 위로 치켜든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나 그녀의 검날에 엉겨붙기 시작하는 얼음결정들.
"그 희귀직업군을 당신이 어떻게 갖고있는거죠?"
...세이비어 나이트.
검사 계열 직업군에서 전직할 수 있는 어라이징 내 초희귀 직업군 중 하나. 이 직업을 갖고있는 자는 어라이징 내 채 20명을 넘지 않았다.
"......뭐, 그야,"
......얼굴을 일글이며 자신에게 묻는 라이린 쉬옌에, 씨익 미소를 짓는 이시연. 상큼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내가 존나게 대단하니깐?"
"......"
...어느새 수많은 얼음결정들이 모여들어 이시연의 롱소드를 2m 가까이 되어보이는 대검(大?)으로 만들었다. 치켜올렸던 자신의 무기를 내려칠 준비를 하며, 이시연은 라이린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냥 죽어 짱개년아."
......얼음으로 이루어진, 주변의 공기마저 얼려버리는 그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냉기를 내뿜으며 맹인 검객의 위로 휘둘러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