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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화 〉 목격담 (58/85)

〈 58화 〉 목격담

* * *

"......"

공허한 도시 위로 한줄기의 노을빛이 쏟아진다.

상하이 외각으로부터는 수많은 군인들이 철수하는 소리가, 하늘로부터는 레반하워즘이 발산하는 웅장한 소음이 들려오며, 서서히 잠식해오는 침묵만을 애써 막아주고 있었다.

"쿨럭, 아, 존나 아파......"

"응?"

그리고, 내 발밑에서 들려오는 옅은 신음.

그러니까 SSS급의 시즌보스, 링 메이가 복부를 움켜쥔 채 무어라 웅얼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옆구리를 한번 더 걷어차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왜, 이정도 가지고는 안죽는다며."

"아악!"

되도않는 몰래카메라를 시전한 그녀를 철저히 응징한 후, 한심하다는 눈빛과 함께 혀를 쯧 차보인다. 그런 나를 보며 쓴웃음을 지어보이는 그녀.

"쿨럭, 너,너무한거 아니냐......"

"......에휴."

연신 헛기침을 하는 그녀. 나는 별다른 대답 대신 한숨을 내뱉은 뒤, 이어서 시선을 내 옆의 베를레히리에게로 옮긴다.

"베를레히리."

[응? 뭐, 왜.]

피곤한 것인지 하품을 하다말고 나를 바라보는 후회의 신전관. 나는 발끝으로 땅바닥을 쿡쿡 찌르며 그녀에게 명령 하나를 내린다.

"레반하워즘에 가보게, 전이문 열어."

[귀찮은데.]

나의 말에, 베를레히리는 투덜거리면서도 마법진을 전개하며 전이문을 생성해내기 시작한다.

"......"

검은빛의 마법진이 바닥에 펼쳐지고, 기괴한 모양의 문이 점차 땅에서부터 솟아올랐다. 거리 제한이 심히 걸려있는 문이여서 그런지, 세리아나의 전이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 크기가 작았다.

[소환했어.]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전이문을 가리키는 베를레히리.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전이문 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젤리와도 같은 얇은 막을 쑤욱 통과하자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 매연과 소음들이 울리던 도시 대신, 달콤한 향기가 퍼지는 아름다운 꽃밭이 내 주위를 감쌌다.

"이야, 여기가 레반하워즘이구나."

"......"

오랜만에 보는 깔끔한 자연이 좋은 것인지, 뒤따라 전이문을 통과한 링 메이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물론 상쾌하고 말끔해지는 정신에 기분이 좋은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꽃밭 위에 앉아있는 이들의 표정을 보니 마냥 웃을수만은 없었다.

[......]

[엄마, 배고파아......]

[쿨럭, 쿨럭......]

몹시 지치고 피곤한 얼굴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인외변화자들. 그 숫자는 약 900~1000여명으로, 내가 생각했던 인원수보다 훨씬 적은 숫자였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옆의 렉타우스에게 묻는다.

"렉타우스."

「예, 전하.」

"왜 인원수가 이것밖에 안되지?"

「송구합니다만,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당수가 죽어있었습니다.」

"......"

나는 대답대신 눈을 감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우리가 도착하기 전, 링 메이 홀로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지키기엔 역부족이었겠지. 전멸을 당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봐야되나.

"뭐,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수없고."

이제와서 후회하고 자책해봤자 달라지는 일은 없었으니,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는게 더 현실적일 터. 나는 턱을 긁적이며 꽃밭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인외 변화자들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되지......"

이제 화양연화의 공격, 멀쩡한 사람들의 차별부터로는 안전해졌지만, 거주, 즉 의식주면에서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를레히리."

[또 왜.]

"여기 저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 혹시 있어?"

[건물?]

......나의 물음에,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에 빠지는 베를레히리.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부정적인 답을 내뱉었다.

[없어. 신전관들이 머무는 5개의 신전이 전부야.]

"......"

신전관들이 머무는 신전이라.

전에 베를레히리의 신전을 보아하니 그리 크기도 크지 않았던 것 같고, 무엇보다 저들이 각 신전이 위치해있는 구역의 극한 자연환경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나."

조금 불편하긴 하더라도 아리아 길드에게 요청하여 캠프를 설치해달라 해야겠군. 그래도 나름 대형 길드인 그들이었으니, 꽤나 좋은 캠프를 설치해 줄 것이었다.

"이야, 그정도면 충분하지!"

"아, 예, 그러세요."

내 아이디어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링 메이.

뭐, 그녀의 말마따나 명확한 해결책이 잡힐때까지 생활하기는 문제가 없을 터였다.

"음식은 문제 없겠지."

식사같은 면은 레반하워즘 자체에서도, 지상에서도 언제든지 조달 가능한 물자였으니 별 문제점이 없어보였다. 조만간 이시연과 상의하여 거주 문제만 해결한다면 레반하워즘에서의 생활도 꽤 괜찮아지겠지.

[크릉! 크릉!]

"응?"

......향후 계획은 고민해보고 있던 그때, 인외변화자들의 무리에서 조그만한 형체 하나가 튀어나와 내게로 달려온다.

[캉! 크앙!]

"......"

종종 걸음으로 내 쪽으로 다가오는 붉은 피부의 꼬마 악마. 뾰족한 꼬리를 살랑거리며, 그 어린 악마는 내 손에 꾸깃한 종이 하나를 쥐어준 뒤 황급히 도망간다.

"응? 뭐냐?"

"그러게......"

갑작스런 인외변화자의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링 메이. 나 또한 아리송한 얼굴과 함께 악마가 주고 간 쪽지를 조심스레 펼쳐본다.

"......"

종이에 적혀있는 것은 급하게 날려 쓴 듯한 꾸불꾸불한 글자들. 나는 눈을 찡그리며 천천히 그 짧은 문장을 읽어본다.

"언니, 우리를 안전하게 대피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오."

"......"

예상치 못한 쪽지의 내용에, 나는 벙찐 표정으로 링 메이를 바라본다. 그러자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하는 그녀.

"고마운게 많은가보네."

"그런가."

"근데 그걸 왜 너한테 줄까."

"뭐?"

"근데 그걸 왜 너한테 주냐고."

"나는?"이라는 얼빠진 단어를 내뱉으며 갑자기 정색하는 링 메이. 이어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음과 동시에 말도 안된다는 얼굴로 허공에 울부짖는다.

"아니! 몇달동안 죽을 고생하면서 도시를 지킨 건 난데 왜 감사인사를 너한테 하냐고! 쪽지 그거 혹시 두장 아니냐?"

억울하다는 듯 나를 잡고 흔드는 그녀. 글썽거리는 눈망울로 불만을 토로하는 그녀에, 나는 혀를 메롱 내밀며 한장뿐인 쪽지를 치켜올렸다.

"쪽지 한장인데?"

"이익......"

"너보다 옥시안이 더 좋은가보지. 이 만년 인기투표 2위야."

"이 나쁜년아!"

"꼬우면 너가 옥시안 하시던가요!"

"으아아악! 죽어!"

......비참한 요괴의 목소리가 다시한번 울려퍼졌다.

***

.

.

.

"......지금 몇시지?"

"......"

풀이 죽은 링 메이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나는 어느덧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답하는 렉타우스.

「오후 8시를 살짝 지나고 있습니다 전하.」

"8시라......"

'8시'라는 단어를 천천히 곱씹어본다.

그러자,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명의 인물.

"......세리아나."

저녁 8시.

세리아나가 죽은지 24시간이 지났다.

그 말은 즉슨, 그녀를 다시 소환하고 누가 그녀를 죽었는지 물어볼 수 있다는 것.

"소환."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곧바로 손바닥을 뻗고 나의 사역마, 서큐버스 퀸 세리아나를 소환한다. 그러자 곧바로 꽃밭 한가운데에 새겨드는 검정색의 마법진.

「......」

"......"

그리고 이내, 새빨간 머리칼에 아름다운 날개를 지닌 매혹적인 여성 하나가 마법진에서 솓구쳐 오른다.

「허억, 허억,」

...허나, 평소의 침착한 모습과는 달리 거친 숨을 내쉬며 나타난 그녀. 무언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인지, 얼굴 또한 뱀파이어라 의심될 정도로 하얗게 질려있었다.

"세리아나, 진정해."

「주, 주인님......」

내가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겨우 호흡을 진정시키며 나를 올려다보는 세리아나.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사뭇 진지한 어조로 묻는다.

"세리아나."

「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

「......」

"누가 널 죽였는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얘기해봐."

「......」

나의 물음에, 흔들거리는 동공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 이어지는 짧은 고민 후, 이내 그 아름다운 서큐버스 퀸은 떨리는 입을 간신히 열어 자신이 어젯밤에 보았던 것을 얘기하였다.

「워, 워낙 한순간이여서 잘 기억은 나지 않사와옵니다만......」

"......"

「분, 분명, 검정색 코트를 입고, 우는 모양의 가면으로 얼굴을 덮은 성인 남성이었사옵니다.」

"......우는 모양의 가면?"

왜인지 꽤나 익숙하면서도 낯익은 생김새에, 나는 기억을 더듬어보려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는 어두운 심해의 기억.

...그리고 그런 나를 향해, 세리아나는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

「또, 그자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기억에 남사와요.」

"마지막으로 했던 말?"

「예.」

내가 불쾌한 표정으로 되묻자, 세리아나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마른침을 삼킨 뒤 조심스레 입을 여는 그녀.

「분명, '옥시안님을 지키는 자는 자기 한명이면 된다', 라고 말했었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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