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5화 〉 격투대회 (2) (75/85)

〈 75화 〉 격투대회 (2)

* * *

「자리에 앉으시지요, 전하.」

"응."

사회자가 격투대회의 시작을 알리자, 렉타우스는 내게 자리에 앉기를 권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푹신한 좌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기대되는 거시와요.」

「아드레나인은 두번째 경기이니, 조금 기다려야 할 것이다, 세리아나.」

사역마들 또한 각자의 기대감을 내비치며 관람석에 착석한다. 허나 두터운 갑옷 탓에 의자에 앉지 못하는 듀랑발은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대장, 꼴사납게 그러고 있지 말고 이리로 와."

"......"

뒤에서는 세르레니아 루인과 그녀의 길드원이 각자의 좌석을 찾아 앉고 있었다.

혼라스러운 상황 속 계속해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사쿠라 요코 또한, 대회가 시작하자 헛기침을 해대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흐음..."

대충 혼란스러웠던 분위기가 가라앉자, 나는 다시금 이 VIP관람석을 훑어본다. 고급진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이곳에 있는 인원은 고작 6명. 그마저도 내 사역마를 포함한 숫자였고, 루인과 요코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길드장들도 오지 않았다.

높으신 분들이라 이런 유희에는 관심이 없는건지, 아니면 그냥 귀찮아서 오지 않은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최한 엘빈 입장에서는 조금 서운할 법 하겠군.

[......네, 다음은 경기 규칙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

뭐, 어찌됐든,

아래쪽, 그러니깐 잔디가 잔뜩 깔린 경기장에서는 한창 규칙 설명이 진행중이었다.

이름부터 '격투대회'인만큼 규칙은 간단했다. 상대를 쓰러뜨리고, 마지막에 서있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

허나, 진짜로 상대방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여기서는 희귀급 아이템, '대신 인형'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모든 데미지와 상처를 대신 받아주는 그 인형을 참가자들한테 지니게 한 채 전투를 이행하게하고, 자신이 지닌 인형의 내구도가 먼저 0이 되는 사람이 패배하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인형의 내구도를 수치화하여 전광판으로도 실시간 모니터링 시켜준다고 하였으니, 보는 입장에서도 조금 더 쉽게 대결의 흐름을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또한, 관중들의 안전을 위해, 알슈타인의 길드원들이 관람석을 둘러싸는 결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는 스킬 사용 및 결투의 파편들이 객석으로 날아오는 것을 방지하는 것을 물론, 관중이 갑작스레 경기에 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 하였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스크린들이 여기저기 설치되어있어, 눈을 찡그리지 않고도 다양한 각도로 시합을 관람 할 수 있을 터였다. 더군다나 한술 더 떠, VIP석에는 출마하는 선수 조회를 위한 개인용 태블릿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기대되네."

나는 의자에 몸을 푹 기대며 중얼거린다.

격투대회야 어라이징 시절부터 소소하게 열리고는 했지만, 이처럼 큰 규모의, 최상급 랭커들이 참여하는 대회는 처음. 더군다나 내 사역마가 참전하는 경기이니 기대를 감출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오늘의 첫번째 선수!]

"......"

이윽고 경기장의 모든 불이 꺼진 뒤, 푸른색의 스포트라이트가 경기장의 동쪽을 비춘다. 이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흰색 제복을 걸친 한 여성.

[흥!]

금발의 트윈테일을 발목까지 기른 그 여성은, 자신의 키보다도 훨씬 큰 대형망치를 어깨에 이고 있었다. 표정 또한 여유로운 것이, 긴장보다는 오히려 관중들의 함성을 즐기고 있는 듯 하였다.

그녀가 경기장 한가운데에 도착하기까지, 열심히 설명을 하는 사회자. 흥분에 찬 목소리가 장 내에 울려퍼졌다.

[소속, 랭킹 1위 길드 신세리아 르 메이!]

[단신의 몸으로 시즌 보스를 박살냈던 인물!]

['폭군' 게르나 에데르타이이이인!!]

"......"

관중들의 환호, 웅장한 음악, 그리고 경기장 아래 깔린 몽환적인 연기를 뚫고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대회의 첫번째 선수, 게르나 에데르타인.

[하찮은 것들.]

필드의 중앙에 도착한 그녀가 씨익 웃으며 어깨에 이고있던 망치를 제대로 고쳐쥐자, 경기장 내부에서는 폭죽을 터뜨리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대장, 에데르타인이 나왔어."

"응, 보고있어."

에데르타인이 나오자, 그녀와 같은 길드에 속한 세르레니아 루인과 그 부하가 소근거리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자신들의 동료인만큼 그들도 꽤나 기대하는 바가 크겠지.

"게르나 에데르타인."

나는 호기로운 표정을 지으며 VIP석의 태블릿을 이용해 그녀의 정보를 조회해본다. 그러자 기다란 텍스트들이 곧바로 태블릿의 화면을 메꾸었다.

선수 조회로 알 수 있는 것은 선수의 프로필 사진과 간단한 신체 정보, 현재 속하여 있는 길드와 유저 랭킹, 직업과 사용하고 있는 무기 정도. 나는 천천히 태블릿의 스크롤을 내린다.

"이름, 게르나 에데르타인. 키 159cm."

소속 길드는 신세리아 르 메이.

현재 유저 랭킹은 8위,

직업은 탱커의 최종 전직인 그랜드 버서커,

사용하고 있는 무기는 희귀급 아이템 '하늘의 심판'.

준수한 것을 넘어 길드장의 자리에 올라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레벨의 수치였다. 이러한 것들이 아까 코인 배팅소에서 그녀가 압도적인 우승 후보로 뽑혔던 이유겠지.

[...이어서 그에 맞서는!]

".....!"

...배경음악이 바뀌고, 이번에는 붉은색 스포트라이트가 서쪽에 위치한 게이트를 비추었다. 사회자는 다시한번 열변을 토하며 곧 입장할 선수의 소개를 시작한다.

[길드 '자유를 위하여'의 서열 3위!]

[현존하는 유일한 '민첩' 스탯의 올클리어!]

[사무엘 피치이이이스!]

대진표로 알 수 있듯이, 에데르타인의 반대편에 나타난 것은 역시나 사무엘 피치스라는 남성이었다. 수려한 외모를 지닌 그는, 자신의 장점인 '민첩'을 살리기 위해서인지 경량 갑옷과 단검 2개라는 단초로운 무장만을 하고 나왔다.

힘을 이용하여 밀어붙이는 스타일의 에데르타인과는 정반대 성향의 인물이었으니, 꽤나 재밌는 경기가 나올 듯 싶었다.

[사무엘! 사무엘!]

[여기 좀 봐줘요!]

".....인기많네."

또, 수려한 외모 탓인지, 상당한 숫자의 여성팬들이 환호를 하며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그런 팬들의 함성을 음미하며, 사무엘은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경기장 중앙에 도착한다.

선수 조회상 사무엘의 랭킹은 16위로, 수치상으로는 에데르타인에 비해 상당한 열세였다. 허나, 그의 표정에서 긴장감 따윈 찾아볼 수 없었으며, 어떻게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만이 머무르고 있을 뿐이었다.

[......]

[......]

서로를 죽일듯이 노려보며 기싸움을 하는 그들.

전광판의 화면은 어느샌가 반절로 나뉘어 선수 각각의 프로필 사진과 HP게이지, 그러니까 '대신 인형'의 내구도를 나타내주고 있었다. 화면 속 저 HP게이지가 0이 되는 순간, 소지하고 있던 대신 인형이 박살나며 그 순간 승부가 종료되는 것이겠지.

[자 그럼, 준비하시고,]

선수들의 소개도 끝나고, 전광판의 세팅도 마쳤으며, 관중들의 환호도 잦아들어 엄숙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시합을 개시하기 최적의 타이밍.

[...격투대회 4강 1차전, 시자아아악!!]

이내 사회자의 선언을 끝으로,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관중석의 관객들은 다시한번 큰 함성을 내질렀다.

[간다!]

아주 잠깐의 탐색전 후, 먼저 움직인 것은 사무엘 피치스. 민첩 스탯에 최적화 된 그답게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자리를 이탈한다.

"......"

일반 관객들의 눈이나 카메라로는 명확히 볼 수 없었겠지만, 염탐자를 사용한 내 눈으로는 슬로우 모션처럼 그의 행동을 자세히 쫓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인 에데르타인의 뒤쪽으로 돌아가 짧은 단검을 내지르는 그. 비상식적으로 빠른 속도였지만, 트윈테일의 여성은 가소롭다는 듯 자신의 망치 손잡이 부분을 들어올려 공격을 막아낸다.

허나 사무엘의 무기는 하나가 아니라 두개였고, 첫번째 공격이 막히자, 곧바로 반대손에 들린 검으로 에데르타인의 목을 노렸다.

[읏...!]

에데르타인은 짧은 신음과 함께 재빨리 고개를 숙여 그의 검격을 피해낸다. 하지만 휘두르는 속도가 너무 빨랐던 탓에, 살이 살짝 베이는 것 만큼은 막지 못하였다.

"오."

사무엘의 단검이 에데르타인의 목 끝부분을 스치는 순간, 그녀의 HP게이지가 미묘하게나마 줄어들었다. 상처나 데미지는 모두 '대신 인형'이 받아주고 있을 터니 생명에 지장은 없을테지만, 그래도 약간의 고통만큼은 느껴질 터.

[쳇.]

역시나 자신의 목 부분을 스쳐 지나가는 화끈함이 거슬리는 듯, 에데르타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망치를 거세게 휘둘렀다.

후웅­.

소름끼치면서도 묵직한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그녀의 망치. 사무엘은 더 무리하지 않고 백덤블링으로 공격을 피하며 일시적인 후퇴를 택하였다.

"흐음, 치고 빠지는 전략이라... 나름 생각은 잘 해온거시와요."

"......"

내 옆자리의 사쿠라 요코가 사무엘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힘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치고 빠지며 야금야금 체력을 갉아먹는 것. 또한 스탯을 민첩에 전부 투자한 사무엘이었기에, 그 전략과의 시너지 또한 한층 더 발휘 될 것이었다.

[같잖은 녀석.]

약간이지만 데미지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데르타인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어서 자신의 망치를 치켜들고는, 사무엘이 아닌 자신의 눈 앞, 경기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애먼 땅바닥을 거세게 강타하였다.

[...천재지변(?災??).]

망치를 내려침과 동시에 조용히 무어라 속삭이는 에데르타인.그러자 망치를 내려친 곳을 기점으로, 사무엘이 있는 곳까지의 지면이 마치 믹서기에 분쇄된 것 마냥 미친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크윽?!]

딛고있던 땅이 갑작스레 흔들리자, 사무엘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만다. 그리고그런 그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에데르타인은 무서운 속도로 날아와 힘차게 망치를 내지른다.

[죽어.]

시공간마저 박살낼 기세로 내려쳐지는 그녀의 망치. 점프로 피해야 마땅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불안정한 땅에서 한 뜀박질이 완벽할 수는 없을 터. 결국 그 무시무시한 망치가 완벽히 회피하지 못한 사무엘의 다리를 강타하고 만다.

[크아악!!]

......외마디 괴성과 함께,충격으로 경기장 구석탱이까지 날아가는 사무엘.곧이어 전광판 속 그의 HP게이지가 엄청난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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