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백하연-5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우와, 너 진짜 쎄다."
하연이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이미 각성한 상태였다.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 분명함에도 데빌 몽키 열 마리를 찢어 죽였으니 그녀의 재능은 지나가던 거지 꼬마도 알아차릴 정도로 찬란했다.
"배고프지 않아? 혹시 네가 허락해 준다면 네가 잡은 몬스터를 손질해서 같이 먹어도 될까?"
강자의 밑에서 보호받고 그 대가로 노동력을 제공하자는 마음에 먼저 다가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스스로에게 엄격해서 내가 도움을 주지 못 하는 순간 떠나리라 다짐했다.
"이 부분은 못 먹어, 질겨서 삼킬 수가 없거든."
데빌 몽키가 워낙 질긴 고기지만 잘 움직이지 않는 목의 일부는 먹을 수 있었다.
어린아이의 손에는 크기만 한 단검을 들고 데빌 몽키를 해체하는 나를 하연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봤다.
"후아!! 죽는 줄 알았네, 너는 괜찮아?"
시대가 시대니 만큼 어린 애들이 살아남기엔 녹록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때로는 나의 기지로, 때로는 하연이의 무력으로 우리는 살아남았다.
"오늘은 식량을 구해서 다행이다. 그치?"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 사이엔 끈끈한 무언가가 생겼다. 연애 감정 같은 건 전혀 아니었다. 힘든 시기를 같이 견뎌낸 남매간의 우애가 우리 사이에 존재했다.
단순히 살기 위해 서로에게 기생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우리는 자의로 서로를 도왔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버텨냈다.
"너는 크게 성공할 거야, 내가 보장할게."
태생부터가 성공이 보장된 아이였다. 각성조차 하지 못한 나 같은 거랑 달랐다. 언젠가 그녀가 찬란히 빛을 발하게 될 때 나는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겠지.
"이름? 글쎄? 꼭 알 필요 없지 않을까? 오라버니 정도면 충분히 좋은 호칭이잖아."
언젠가는 떨어져야 한다는 마음에 그녀와 거리를 뒀다.
그 시기의 나는 소중했던 이의 죽음으로 이름을 밝히는 것을 극히 꺼렸던 시기기도 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름 만은 밝히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와 같이 지내기를 1년, 드디어 올 것이 찾아왔다.
"안녕, 우리는 태양 길드 소속인데, 너를 우리 길드에 영입하고 싶어."
타오르듯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 부드럽지만 강인한 힘이 담겨있는 눈빛, 근래에 주변 도시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태양 길드의 장, 이승호가 분명했다.
그들이 우리, 정확히는 하연이에게 찾아왔을 때 우리의 관계가 끝났다는 걸 느꼈다.
태양 길드 정도면 하연이를 잘 키우고 성장시킬 수 있는 좋은 길드였다. 이미 옆 도시를 거의 장악하고 주변 도시를 노린다는 소문도 있었으니까.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 진실은 알 수 없었지만 태양 길드가 떠오르는 세력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하연이는 길드 장이 직접 찾아올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그리고 하연이가 태양 길드에들어가면 나는 이제 하연이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지, 더는 곁에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하연이에게 태양 길드에 반드시 들어가라고 말했다. 들어가면 무조건 성공할 거라고, 더는 딱딱한 시멘트에서 자지 않아도 되고 질긴 몬스터 고기 대신 부드럽고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며 하연이가 태양 길드에 들어가길 강력히 추천했다.
대신 다시는 나를 보지 못 할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떠날 거야?"
"네, 저는 동생한테 방해만 될 뿐이니까요."
"될 수 있으면 너도 영입하고 싶은데 말이지."
"됐어요. 비각성자를 어디에 쓴다고 영입해요?"
이승호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 방해만 될 테니 사라지겠다고 전해 달라고 한 후 떠났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울부짖는 모습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하연이의 모습이었다.
`아마 하연이는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걸 몰랐겠지만….`
그때 헤어졌던여동생이 지금 나를 찾아내서 다시 오라버니가 되어 달라 부탁하고 있다.
`애가 버릇이 잘 못 들었어.`
뭐? 오라버니를 강제로 억압하고 싶지 않아요?
하연이가 그냥 평범한 여동생이었다면 귀여운 협박에 불과할 수도 있었겠지만, S급 각성자가 되서 저런 말을 하면 나라도 무서워지는 법이다.
`아니, 사실 협박이 문제가 아니지.`
울먹이며 말을 이어가던 하연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자신이 쓸모없어졌다는 이유로 여동생을 매몰차게 버리고 도망 온 것이 옳은 행동일까?
"사장님….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내가 아는 유일한 어른이자 방금 하연이와 나 사이의 이야기를 모두 들으신 사장님께 여쭈었다.
도저히 혼자서는 결론을 낼 수 없었다.
`아니야…. 결론을 낼 수 없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이 맞다고 확신을 하고 싶을 뿐이야.`
"옆에만 있어도 좋은 존재지."
사장님이 내 생각을 읽으신 걸까? 혼자서는 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내 등을 떠밀어 주시기 위해 저런 말을 하신 걸까? 아니면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하고 계신 걸까?
어떻든 좋다. 어찌 되었든 내 머리는 지금 굉장히 상쾌하니까.
`동생한테 자신이 쓸모없다고 떠나는 오빠라니, 인간 맞냐?`
나는 병신이었다. 그것도 병신 중에 상 병신.
`잘못했으면 사과를 해야지.`
15년간커다란 죄를 지으며 살아간 셈이니 어지간한 속죄로는 안 될 거다. 몇 대 맞을 각오를 해야지.
"사장님"
"다녀와라. 둘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매끼리는 사이가 좋아야지. 특히 이렇게 흉흉한 세계에선 더더욱"
"다녀오겠습니다."
가게를 나서서 도시 중심부를 향해 걸었다.
부자들이나 태양 길드원의 가족들이 사는 구역답게 길도 깨끗하고 입고 다니는 옷도 좋아 보였다. 이런 난국에 저런 옷은 어디서 만드는 건지.
걸음을 재촉해서 경비대의 본관으로 향했다.
"정지하십시오. 경비대에 신고할 게 있으시다면 시청으로 가주십시오."
"신고하러 온 거 아닙니다. 경비대장님이 비각성자 인력으로서 저를 채용하셔서 찾아왔습니다."
본관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대원들이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내일 중에 대장님이 부른 비각성자 남자 한 명이 올 거라는 전달 사항을 받긴 했습니다만, 오늘도 부르셨습니까?"
"부르시진 않았지만, 만나 뵈러 왔습니다. 멋대로 들어갈 생각은 없으니 제가 왔다고 전달만 해주실 수있습니까?"
경비대원 둘은 잠시 소근 대더니, 한 명이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십쇼."
"알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갔던 경비대원은 곧 밖으로 나왔고 나를 경비대장실로 안내했다.
"여기입니다. 노크하시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경비대원은 바로 뒤돌아서 입구로 향했다.
외부인을 본관 안으로 들인 거니 경계할 만도 한데 너무 자연스럽게 가는 그의 모습에 하연이의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싶었다.
-똑똑
"들어와."
그녀의 목소라는 어딘가 퉁명스러웠다.하긴 화가 단단히 나겠지.
경비대장이니만큼 좋은 문을 쓰는지 문을 여는데 소리가 하나도 안 났다. 아마 인기척 없이 문만 열렸다면 열렸는지 아닌지도 모르지 않았을까 하는 부드러움이었다.
"왜 왔어요."
하연이의 얼굴은 굉장히 사나웠다. 거기에 S급 각성자의 분위기까지 더해져 한 마리의 호랑이 마냥 사나운 분위기를 풍겼다.
버티기 힘든 기세에 다리가 떨려 왔다.
아무리 정신을 잡으려 해도 본능적인 반응마저 제어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왜 그렇게 떨어요?! 제가 무서워요?오빠를 강제로 억압한다고 한 게 그렇게 겁났어요? 그래서 무서워서, 이렇게 온 거냐고요!?"
하연이는 강해진 기세로 일어서서 나에게 다가왔다. 고개가 자동으로 아래로 꺾이고 당장에라도 무릎 꿇고 싶을 정도로 강한 압박감이었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미안해."
하연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황금빛 눈동자가 크게 드러나는 모습은 굉장히 귀여웠다.
"그만해요."
"먼저 찾아가지 않아서, 너를 버리고 도망가서 미안해."
"그만 하라니까요!!"
절규하듯 소리치는 하연이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사과할 거면 왜 떠나갔는데요? 왜 그렇게 찾았는데 안 나타나고 제가 직접 찾아갔는데도 외면했는데요?"
"너한테 내가 쓸모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하연이가 흐느끼며 내게 안겨왔다.
각성자다 보니 키랑 체격이 더 커서 내가 안기는 모양세가 되긴 했지만 나를 꽉 안은 채 눈물을 흘려댔다.
"그냥 옆에만 있어 줘도 되는데,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된다고요…."
"미안해, 무슨 벌이든 달게 받을게."
하연이의 등을 토닥거렸다. 키도 나보다 더 크고 S급 각성자가 되었다고 한들 하연이는 내 동생이었다.내 품에서 훌쩍이는 하연이의 모습에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짜로 무슨 벌이든 달게 받을 거에요?"
아주 살짝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하연이의 눈이 살짝 위험해 보였다. 슬픈 건 슬픈 거고 받을 건 받아야 한다는 듯한 눈빛이라고 해야 할까? 나 없이도 잘 자랐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눈빛이었다.
"응, 내가 못 하는 것만 아니면,"
그 말에 하연이는 나를 번쩍 들고는 소파에 앉혔다. 그러고선 내 무릎에 앉았다. 부드러운감촉이 무게감과 함께 내 다리를 눌렀다.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다. 나도 그렇게 약한 사람은 아니었으니 아프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머리 쓰다듬어줘요. 옛날처럼."
"아직 어리광쟁이구나?"
"빨리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연이는 자랐고 머리도 그때처럼 뻑뻑하지 않았지만,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는 계속 같이 지내요."
"그래그래."
계속 머리를 쓰다듬었다. 15년간 끊어졌던 남매의 연이 다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