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이수현-2
하연이가 갑자기 덮쳐 오는 바람에 침대에 엎어져 버렸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하연이가 내 양손을 위쪽으로 올린 뒤 한 손으로 눌렀다.
'완전히 제압됐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S급 각성자인 하연이가 제압하고 있는 것니까 무슨 수를 써도 빠져 나올 수 없겠지. 굳이 버둥 거리지 않았다.
"쯧, 피가 안 통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럼 이렇게 협박도 안 하지. 오빠 자살 안 할테니까. 이제 진정해봐."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하연이의 눈에 가득 차 있는 욕망이 보였다.
뭐야, 진짜 저지를 생각이야? 아무리 피가 안 섞였어도 지금까지 남매로 살아왔는데 그런 눈빛을 하면 안 되지.
"하연아? 한 번 더말하지만 나는 네가 아는 오빠가 아니다?"
"아까는 기억을 잃었어도 오라버니는 오라버니라면서요? 정조가 위험해 지니까 말을 바꾸는 거에요?"
정조라니, 남자한테 쓰기엔 굉장히 어색한 말인 것 같은데, 보통 여자한테 쓰는 말이잖아.
"아무리 친남매가 아니더라도 성관계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끼리 하는 거 알지?"
"제가 어린 애인줄 알아요?"
"오빠를 강간한 미친년이 되고 싶은 거니?"
"제가 오라버니를 왜 강간해요? 오라버니도 좋아하실 텐데."
강제로 제압하고 상대의 의사와 관계없이 성관계를 하는 것, 강간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문장이다.
지금 하연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기도 하고.
하연이의 손길이 내 가슴부근을 쓸어왔다.
"좋아하는 건 기억이 있는 오라버니 쪽이고, 내 입장에선 여동생이라고 주장 하는 사람이 강제로 하는 데 기분이 좋을 것 같아?"
"그래서요? 불만 있으면 저항을 해보시던지요."
아니 어떻게 저항을 하냐, 격이 다른 사람한테...
그래도 짧은 대화에서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일단 얘네 둘은 실제로 관계를가진 적이 없다. 있다면 좋아하실 텐데, 라는 추측 보단 좋아하신다, 라고 확실하게 표현했겠지.
그럼 파고들 구멍이 있지.
"너, 이 몸이랑 첫 관계를 기억도 없는 상태로 하고 싶은 거야? 기억이 있는 상태에선 좋은 말도 많이 해줄 것 같은데, 지금 덮쳐봤자 욕 밖에 못 듣는다."
아주 살짝 망설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진짜로 첫관계를 애틋하게 즐기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계속 밀어붙이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네가 사랑하는 오빠가 아니야. 그냥 네가 내 여동생이라는 정보만 가지고 이수현을 연기하는 이수현 비슷한 무언가지. 이런 거한테 네 처음을 주고 싶어?"
까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하야 뭐하냐 언니 말려라."
"하연 언니? 일단 진정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오라버니 말처럼 아직 기억도 온전하지 않으시고, 지금 한가롭게 섹스나 하고 있을만큼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잖아요."
하연이가 내 손목을 잡은 손을 놔줬다. 뻐근하게 아파오는 걸 보면 상당히 세게 쥔모양이다.
"좋아요. 지금은 넘어가 드릴게요. 대신 약속해요. 오라버니의 기억이 돌아오면 오라버니의 동정을 저한테 바치세요."
바쳐? 하연아 단어가 좀 센 거 아니냐? 그리고 오빠한테 바치라고 하면 안되지.
"아니, 내기억이 돌아오면 네 처녀를 오빠한테 바쳐야지, 오라버니한테 내놓으라고 하면 쓰나."
"좋아요. 기억이 돌아 온 이후엔 각오하세요."
괜찮아, 어차피 기억이 돌아 왔을 때는 이 기억은 아마 사라져 있을 테니까. 고통 받는 건 이수현이지 내가 아니야.
'근데 이 몸, 동정인 건 맞나?'
하연이의 말로 추리해보면 동정인 것 같긴 한데 오래 떨어져 있다고 하니확신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이수현이라는 남자는 꽤 멋진 남자다.
외모도 이 정도면 중상위 권은 되고 이런 막장 세계에서도 잘 살아남을 수있을 정도로 무력도 뛰어난 편이다.
솔직히 이 정도 살면서 여친 한 명 없었을까? 여친은 없었더라도 관계 한 번 가져본 적이 없을까?
기억을 잃어서 그렇지 지금도 여친이 있는 상태가 아닐까?
'내 알바 아니지 뭐.'
동정이고 아니고를 구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라도 동정이 아니어도 내 잘못은 아니잖아? 어차피 모든 건이수현이 해결할 일이다.
"괸장히 낯간지러운 이야기가 많이 오갔네요... 둘 다 이런 이미지는 아니었는데 단체로 미치기라도 하신건가요?"
"내가 보기엔 둘 다 오래 전에 미쳐있던 것 같은데?"
"더더욱 미쳐버렸다는 뜻이죠."
대화가 산으로 가는 군 확실히 텐션이 미쳐서 날뛰고 있긴 했다. 알 수 없는 흥분이 몸을 지배하고 있어서 정상적인 텐션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일단 진정 좀 해야지.
"혹시 시간 되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고,내가 이수현을 연기하는데도 도움이 될테니까."
"꼭 연기라는 표현을쓰셔야 해요?"
"연기인 걸 어떡하냐. 내가 진짜 오빠는 아니잖아? 최대한 오빠처럼 느껴지게 해줄 순 있는 데 아무래도 오리지날에 비해서는퀄리티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침대에 앉아서 하연이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설명 좀 해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설명 해 드릴까요?"
"그래주면 좋고,"
"일단 제가 오라버니를 처음 만난건 제가 8살이고, 오빠가 10살때의 일이었어요."
엄청 어릴 때 만났구만.
"어쩌다가 만났데? 부모님 소개로? 비각성자랑 각성자를 친구로 소개 시켜 주진 않았을 테니까 그 때는 각성을 못 했었나 보다?"
"아니요. 오라버니랑 저 둘 다 고아였어요."
앗, 나도 모르게 패드립을 박아버렸군, 여기 있는 세 사람 전부한테 패드립을 박은 셈이 되었으니까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저는 그 때도 각성을 했었어요. 지금 만큼은 아니지만 그 때도 A급 각성자 였다고요."
"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면 A급이나 되는 각성자가 비각성자랑 의남매를 맺지? 설마 어렸을 때의 나는 겁나게 잘 생기기 라도 했던 건가?
"아니 그렇게 대단한 애가 뭐하러 나 같은 애랑 남매가 됐는데,"
"오라버니는 기억 안 나시겠지만 오라버니가 저 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담담하게 나를 보는 하연이의 눈에는 거짓따윈 담겨있지 않았다.
"아니, 아무리 대단해 봤자 10살짜리 애인데 대단해 봤자 얼마나 대단하겠어?"
"몬스터의 고기에서 먹을 수 있는 부분과 먹지 못하는부분을 구분 할 수 있었고 불도 없는 밤에 어떻게 하면 따듯하게 지낼 수 있는 지도 알고 계셨어요. 몬스터의 습성도 잘 알고 계셨고 능력이 없는 순수한 싸움은 저보다 훨씬 강하셨어요."
... 뭐? 열살짜리가?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무조건 거짓말일 수 밖에 없는 말이었지만 하연이의 눈동자가 너무 당당해서 거짓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열살 짜리 어린애가할 수 있는 일이 아닐텐데?"
"저를 만나기 이전에 오라버니가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저도 몰라요. 오라버니는 자신의 과거사 뿐만 아니라 이름조차도 저에게 알려주시지 않으셨으니까요. 제가 아는 오라버니의 모습은 언제나 강하고 아는 것도 많고 대단하시다는 것 밖에는 없어요."
머리가 근질근질했다. 무언가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머리를 간질였다.
도대체 무슨 인생을 살아 온 거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히 알게 된 건 이수현이라는 인간이 내가 생각한 것 보다 몇 배는 대단한 놈이라는 것 뿐,
"성격은 어땠어? 오만했어?"
"아니요. 자신감은 늘 가지고 계셨지만 오만하다는 느낌은 받은 적이 없어요. 늘 저를 배려해 주셨고 성격도 엄청 착하셨어요."
뭐지? 진짜 뭐야? 성인인가? 내가 맞나?
나에 대한 하연이의 설명만으로도 이렇게 자신감이 넘쳐 흐른다.
이런 성격 그대로라면 아무리 열 살 때라고 하더라도 으스대기도 하고 나 잘난 맛에 살 것 같은데 도대체 무엇이 나를 겸손하게 한 거지?
아마 나는 알 수 없는 10살 이전의 기억 때문이겠지.
무슨 일이었을까?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