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화 〉이수현-3 (38/265)



〈 38화 〉이수현-3

"그런데 연하는 해줄 말 없어?"
"네?"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당황한 걸까, 연하가 눈만 끔뻑끔뻑 깜빡이며 하연이를 바라봤다.


"맞아, 우리 연하도 오라버니한테 해드릴 말이 아주 많지 않니?"

하연이의 톤이 낮아졌다. 반어법을 쓰는 사람의 전형적인 어투인데 연하랑은 접점이 그리 많지 않았던 걸까?

얼굴형으로 유추해 보면 연하가 하연이보다대략 2살 정도 어려 보이는데 그러면 어릴 때 나랑 만났을 땐 6살이었다는 소리니까 하나도 기억 못 한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당연히 많죠! 어릴 때 저도 잘 돌봐주시고... 매일 머리 쓰다듬어 주시고... 가끔 맛있는  얻으면 저한테 먼저 주시고..."

말 하면서 슬쩍슬쩍 하연이를 바라보는 것을 보니 틀림 없는 거짓말이었다.


"됐어. 기억 안 나면 어쩔 수 없지. 그 때는 너도 어렸을 테니까 까먹었다고 해도 화 내지 않아."
"하하, 그렇게  났어요? 죄송해요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서 기억이  나네요."

-쾅!!!


"뭔 소리야?"
"루시아 그년이 날뛰는 모양인데요? 바로 죽여버리려던  일단 살려 놓고 고문하고 내버려 뒀더니 마나가 회복되자마자 바로 날 뛰는 모양이에요."
"언니가 가셔야 겠는데요?"
"그래야지, 일단 걔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밖에 없으니까. 갔다 올테니까 오라버니 잘 키고 있어."
"알겠습니다."


하연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역시 S급 각성자...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했는데 갑자기 사라지는 걸 보면 공간이동 계열일까? 문도 닫힌 채로 있는 걸 보면 공간 이동계열이겠지.

"우리 막내, 여기 와서 앉아봐."

내 옆자리를 톡톡하고 두드렸다.

"그냥 서있어도 되는데요..."
"아냐, 내가 불편해서 그래,  얘기도 많고."

연하가 쭈뼛거리면서 내 옆에 앉았다.


"기억을 잃기 전에 하연이랑 나랑의 관계가 어땠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요?"
"응, 아무래도 하연이가 오빠를 좋아하는 모양이 잖니? 이전에는 어떤 관계였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연하가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좋은 생각이라도 낫다는 방긋 하고 미소를 지었다.

"언니가 완전 쓰레기였어요."
"응? 쓰레기?"
"오라버니가 조금만 말을 안 들어도 주먹으로 패고 그랬다니까요?"


팼다고? 몸에 상처는 하나도 없는 데?

"몸에 상처가 없으신 건 회복 계열 각성자를 고용해서 바로바로 치료해서 그래요."

그렇구나, 우리 하연이는 쓰레기였구나.
일단 계속 들어볼까?

"아까는 그런 기색 전혀 없던데? 총을 관자놀이에 대고 자살 협박까지 했는데 크게  안냈잖아."
"그건 기억을 잃은 김에 옛날 기분을 내고 싶어서 그런 걸 거에요. 오라버니가 언니를 편하게 대한건 1년  정도가 마지막이었으니까요."


아예 아귀가 안 맞는 말은 아니다. 아무 생각없이 들으면 충분히 합리적으로도들을 수 있는 이야기지.
하지만 최소한의 생각을 첨부한다면 거짓말이라는  금세 알 수 있었다.

"1년 전 부터 하연이한테 맞고 지냈는데 아직도 하연이한테 동정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나 노려보는 거 보니까 그렇게 성격 나쁜 애였으면 진작에 먹어 치웠을 거 같은데."
"당연히 빼앗겼죠. 아까 언니가 동정이니 뭐니 했던 건 자기가 나쁜 사람이었다는  숨기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요."

연하야? 일단 입가에 미소는 숨겨야 하지 않겠니? 사실이라면 정말 무서운 이야기를 재밌다는  웃으며 말해봤자 진실이라는 생각은 전혀 듣지 않는단다. 막내한테 거짓말 하는 법이나 가르쳐 줄까?

"그리고 또?"


일단 들어보자. 이 거짓말이 어디까지 가지를 뻗어 나갈지 궁금했으니까.

"어.. 그리고... 엄청난 사디스트였어요!! 밤만 되면 언니랑 오라버니 방에서 오라버니의비명이 계속 울려퍼졌다니까요?"
"오빠가 그렇게 괴롭힐 당할 동안 너는 뭐 했는데?"
"어어, 저는 A급 밖에  돼서요. 언니한테 감히 반항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오빠가 괴롭힘 당하는 데 그냥 보고만 있었어?"

달리 할 말이 없는지 눈만 땡글땡글 굴리고 있는 연하를 보니 괜스래 미소가 지어졌다.


이수현이라는 놈도 이렇게 장난기가 많은 놈이었을까? 하연이한테 조심스러웠다거나 10살때 부터 착했다는 얘기를 들어보면 이렇게 장난기가 많진 않았을 것 같은데, 역시 기억이라는 요소가 성격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 그게."
"연하야, 거짓말은 그렇게 치는 게 아니란다? 내가 없어진  기억이지 눈치가 아니거든? 그런 거짓말은 5살 이하의 미취학 아동들한테나 통하는 거란다."
"오라버니?"
"거짓말을 할 때는 미리  틀을 잡고 시작을 해야한단다. 너 처럼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가는 수많은 모순과 의문에 부딪히게 되거든."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필터링 되지 않은 말을 내뱉는 행복감에 기분이 살짝 들떠오르는 걸 느꼈다.


착한 이수현은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겠지.
내가 이겼다,  멍청하고 착하기만 한 놈!

"그러면 거짓말로 말하지 말고 진짜로 말할까요?"


무서운 기운이 나를 눌렀다. 언니나 동생이나 기운을 방출 하지않고서는 진지한 얘기를 하지 못 하는 것일까?

"솔직히, 오라버니를   없어요. 제가 오라버니를 처음 만난 건 오라버니가 기억을 잃고 난 다음에서야 처음 본 거거든요."
"뭐?"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눈이었다. 눈빛의 진지함을 떠나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딘가 어색한 사람을 바라보는 듯 하면서도 약간의 기대가 담겨있는 눈빛이었으니까.


"언니한테 오라버니에 대한 설명만 주야장천 들어왔죠. 좋은 사람이다. 멋진 사람이다. 그렇게 계속 듣다 보니까, 조금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나를 묵직하게 누르던 기세가 천천히 사라져갔다.


"오라버니가 기억을 잃으신 건 저한테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죠. 저는 솔의 경비대장이었고 오라버니는 옆 도시의 빈민가에 살던 비각성자였으니까. 아마 정식으로 만났더라면 오라버니가 저한테 반말을 하는 지금의 모습은 평생 볼 수 없었겠죠."


글쌔, 하연이의 여동생이라고 소개해 줬으면 시간은  걸리더라도 결국 편하게 대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참고로 말하자면 저는 하연언니의 친동생도 아니에요. 그냥 하연 언니가 너무 좋아서 언니처럼 새햐얀 머리로 염색하고 금안의 렌즈를 끼었을 뿐이죠."
"... 지금이라도 존댓말을 써드리길 바라시는 겁니까?"
"천만에요. 제가 오라버니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 기억하세요?"

기억  할리가 없지. 오래전의 이야기도 아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얼마  되는 기억이기도 하고.


"언니의 오라버니면 당연히 너의 오라버니이기도 하다고?"
"네, 솔직히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으면 언니 몰래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저도 동생으로 삼아주세요."
"어렵지 않지, 솔직히 내 입장에선 너나 하연이나 큰 차이 없어."


어떤면에선 하연이보다 연하가 더 편할 수도 있다. 하연이는 내가모르는 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연하와 나는 서로 처음으로 쌓아가는 관계니까.

"진짜죠? 기억 돌아와서 다른 소리 했다간 삐져서 무슨짓을 지 몰라요."
"괜찮아. 어차피 내가 당하는 것도 아니고 기억이 돌아 온 이수현이 당해야 할 일이니까."


기억 상실증이 이렇게 편한 거였다니, 무슨 일이있어도 미래의 나한테 떠넘기면 되잖아?

"이젠 하연언니의 자랑을 더 안 들어도 되겠네요."


연하가  어깨에 기대왔다.

"내 자랑을 그렇게 많이 했어?"
"말도 마요. 오빠 찾기 전엔 똑같은 자랑만 수백 번을 들었고 오빠를 찾은 이후에도 가끔 연락이 와서 겁나 귀엽다고 자랑질을 해대더라고요."
"나보고 귀엽다고 했다고?"

S급 각성자라 건강한 줄 알았는데 안구 건강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건장한 성인을 보고 귀엽다? 말이 안되지.


"그러니까요. 기억을 잃기 전이랑 지금이랑 외모는 차이가 없을 텐데, 잘생겼다면 몰라도 귀여운 인상은 아니시잖아요? 자고로 귀엽다고 하면 키는 160도 못 넘고 동글동글 하고 순한 맛이 있어야 하는  오라버니는 키도 저보다 크시고 눈매도 매서운 느낌이라서 절대로 귀엽지 않으시다고요."
"혹시 귀엽다고 말하는 주체가 너니?"
"네! 저정도는 돼야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거죠."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아마 친남매였으면 귀여운 게 아니라 귀가 없는 거겠지 하면서 꿀밤이라도 날려주는 게 정상이었겠지만 우리는 의남매니까 가볍게 머리쓰다듬는 정도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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