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어릴 적 이야기3(과거 외전)
* * *
그래, 기쁜 일이야, 하나 밖에 없는 친구랑 이름까지 비슷해 졌잖아?
수아의 눈에 있던 탐욕? 그건 기분탓일 뿐이야. 그냥 힘이 생겨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착각한 것에 불과해.
"아해야 내가 분명 경고 했잖느냐, 너무 감정에 집착하지 말라고,"
97호... 아니, 수아와 같이 얘기하던 방에서 빠져나오자 마자 1호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기가 뭘 안 다는 건지 눈빛에는 걱정이 조금 담겨있었다.
수아가 나를 끌어안았다. 마치 얘는 내 것이라는 듯, 평소라면 그냥 어린애 특유의 소유욕으로 해석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내 정신을 그러지 못 했다.
1호와 나를 단절 시키려는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수아를 밀어냈다.
"뭐해?"
수아가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나는 무력한 심정으로 힘을 풀었다.
결국 교관이 수업을 진행한다고 수아를 나에게서 때어내기 전 까지 나는 그녀의 품속에 갖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냐, 97호는 97호야.'
내가 지켜줘야 하고 나에게 의지하는 아이, 오늘도 교관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하고 멀뚱멀뚱 서 있을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응? 수현이, 나보고 싶어서 왔어?"
"아니... 수련 도와주려고..."
"이젠 괜찮아."
수아의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도와주지 않아도 돼."
'너 따위의 도움은 필요없어.'
"혼자 할 수 있어."
'이제 넌, 필요 없어.'
귀에서 들려오는 환청에 다리가 떨렸다.
"나 전부 다 이해했거든."
방금 교관이 한 동작을 완벽하게 따라오는 수아의 모습이 잡히지 않았다. 눈물이 맺힌것도 아닌 데 초점이 맞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거 맞지?"
"어... 맞아."
***
"수아야, 밥 가져왔어."
"에이, 이런 거 굳이 할 필요 없다니까."
나는 천천히 미쳐갔다. 어떻게든 수아에게 도움을 줘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수아에게 쓸모가 없는 나 따위,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냐, 이런 거라도 안 하면 쓸모가 없는 걸."
"오구오구, 우리 수현이 착하다."
수아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 이러면 된 거야...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올테니까 어디 가지말고 기다리고 있어."
"ㅇ... 어."
근 일주일간은 나랑 떨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던 수아였지만, 요즘은 어느 정도 안심이 됐는지, 잘 때나 화장실을 갈 때 정도는 나와 떨어져서도 잘 버텼다.
수아와 밥먹는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 그냥 멍하니 식판만 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다.
"아해야, 잠깐 이야기 좀 하자꾸나."
"할 얘기 없어, 너랑 이야기하면 수아가 싫어해."
"그대의 존재 의미는 오직 수아에게만 있는가?"
당연하지, 그녀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걸, 쓸모 없어지면 안 되는 걸, 버림 받기는 싫어.
"97호는 굉장히 위험한 능력을 각성한 모양이군."
1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 97호에게 도움을 주지 못 하는 그대는, 그대가 아닌가?"
"당연... 컥!!"
1호가 갑자기 내 배를 주먹으로 쳤다.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속도로 맞은 나는 바로 배를 부여 잡고 땅을 길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아해가 97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1호의 발이 내 어깨를 밀었다. 업드려있던 자세에서 천장을 보는 자세로 밀렸다.
"내가 지금 아해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한다면, 아마 97호가 구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기만 하는 상태가 될태지, 그런 그대가 진정으로 97호에게 쓸모 있는 존재라 생각하는가?"
1호의 발이 내 어깨를 밟아왔다.
"인정하거라, 너는 97호에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걸, 그리 해야 아해의 본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야! 너 뭐하는 거야?!"
멀리서 수아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렇게 바라봐도 본좌에겐 그대의 능력이 먹히지 않으니, 힘 빼지 말거라."
"수현아 괜찮아?"
수아가 내 몸을 살포시 들고는 어디 다친 데는 없냐는 듯 열심히 살폈다.
배에 붉게 주먹 자국이 생긴 걸 제외하면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육체적으로는 말이야.
"앞으로는 그냥 내가 다 해줄게. 괜히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알았지?"
나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수아가 지켜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아니라고? 나도 충분히 가치있고 대단한 존재라고??
1호의 공격에 일말의 반항도 하지 못 했다. 1호의 말처럼 단지 수아가 지켜주러 올 때까지 빌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수아에게 나는 짐일 뿐이다.
나는 수아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
나는 수아에게 필요 없는 존재다.
나는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 그날, 이 시설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
"조금 정신이 드나?"
무슨...소리지? 나는 분명 자고 있었는데...
"일어나라 아해야."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1호가 물 밖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실험체들은 기본적으로 각자 방을 쓴다. 그리고 탈출을 막기 위해 엄청난 강도로 만들어진 벽과 문으로 모든 방이 분리되어 있었다.
물속에서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니, 문이 언제 있었냐는 듯 완전히 파괴되어 땅을 구르고 있었다.
교관이 전력으로 쳐도 멀쩡하던 문이었는데...
"일어났군."
쨍그랑!!!
물을 감싸고 있던 유리가 단번에 깨졌다.
놀라운 건 1호는 유리를 만지지도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있었을 뿐이었다는 거다.
"너... 뭐야..."
"아해가 말했지 않는가, 괴물이라고."
1호도 각성을 한 건가? 시설놈들이 못 알아차릴리가 없는데.
"아까는 본좌가 미안했다. 아해의 정신을 좀 차리게 해주기 위해 충격요법을 써봤다. 이제 정신이 좀 드나?"
"... 그래, 나는 수아한테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야... 옆에 있어봤자 방해만 돼..."
급격하게 우울해 졌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는 절망감이 나를 덮쳤다.
"생각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 그 정도만 되도 그녀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겠지."
"그런데 어쩔 생각이야? 문을 박살 내버렸으니, 아마 시설에서 네 능력을 눈치 챌텐데?"
"아예 시설에서 탈출할 생각으로 움직인 거다. 그대와 마찬가지로, 나도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어서 말이야."
나와 마찬가지로? 내가 왜 여기 남아있을 필요가 없... 네. 시발.
"그래서 나도 같이 데려가 주겠다고?"
1호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말 없이 1호를 따라 나섰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1호는 정말 괴물이었다. 두께만 1미터가 넘어 보이는 벽을 가벼운 발길질 한 번에 박살을 내버리지 않나. 손도 대지 않고 한쪽 벽을 베어버리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기행을 보여줬다.
나와 1호가 시설을 탈출하기 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의 추격은 없었냐고? 내가 말한 적 있었나? 이 실험은 초기 실험인지 너무 주먹구구식이서, 어차피 빠져나오지도 못 할 방안에 가둬놨다는 걸로 방심하고 경비 조차 없었다.
"대삼림까지만 안내해 주마."
"대삼림? 그게 뭔데?"
"교관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엿 들었다. 몬스터들이 가득한 공간이라고 하는데, 외곽에 있으면 아해의 수준에선 문제가 없을 거다."
"너는 어디 가게?"
내 말에 1호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
"중원으로 가보려고 한다."
"중원? 거기는 어디야?"
"그런 곳이 있다."
"나도 데려가 주면 안돼?"
1호를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 봤다.
내 간절한 눈빛에 1호의 굳은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가 곧 다잡혔다.
"97호의 빈자리를 나로 대체하려고 하는 겐가?"
맞는 말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못하면 살아갈 자격이 없는 인간이었으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돼야만 한다.
"미안하지만, 아해는 나에게 쓸모가 없다."
1호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히려 방해말 될 뿐이지, 혼자 이동하면 하루면 갈 거리를 아해와 함께라면 몇달을 같이 걸어야 할 지도 모르니."
"안 되면 그냥 안된다고 말하고 끝내!"
"알았다. 안 된다."
시발 존나 쿨하네.
눈에서 흘러나오는 땀을 닦았다.
"아주 울보가 다 됐군."
"가기 전에 이름이라도 알려주고 가."
"이름? 본좌는 1호다. 아해도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지랄하네,
"진짜 이름이 있을 거 아니야. 네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절대로 어린애 같진 않거든? 닥치고 불어."
"어떻게 닥치고 불 수가있지? 물론 본좌는 가능하지만 일반적인 사람은 입을 닫고는 말 할 수 없다. 아해야."
1호가 크게 웃었다.
"그래서 네가 누구냐고?"
"본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굳이 나를 지칭하자면, 좋은 호칭이 하나 있긴 하군."
1호가 얼굴을 굳혔다.
실제로 진지해 진건지 아니면 단지 간지를 살리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1호의 진지한 표정은 썩 멋있었다.
"본좌는 천마다."
시발 존나 멋있네.
"그래, 나는 이수현이다."
"아니, 너는 아해다. 97호가 지어준 이름, 나는 용납 못한다."
뭐래, 나는 이수현인데.
"아니, 나는 이수현이야."
"생각보다 97호의 능력이 강한 듯 하군, 일단 계속 이동하지, 슬슬 동이 터오를 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1호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가볍게 들었다.
뭐라고 항의할 세도 없이 출발하더니, 어느새 처음 보는 나무들로 가득 한 숲으로 와 있었다.
"여기서 헤어지면 되겠군."
"그래, 중원인가 뭔가에 잘 가라고."
일부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 가기 전에 아해에게 선물 하나를 주겠다."
어디서 났는지, 그녀의 손에는 단검 하나가 들려있었다. 어린 나의 몸에는 그렇게 작지만은 않은 크기였지만, 일반적인 시선에선 충분히 단검으로 불릴만한 물건이었다.
"뭐야 어디서 났어?"
"그냥 오는길에 몬스터의 뿔을 잘라다가 만들었을 뿐이다."
괴물 녀석, 나는 몬스터 같은 건 보지도 못 했는데...
"그러면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1호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이마에 손바닥을 댔다.
"나를 기억에서 잊고 있도록, 아해의 정신이 97호의 속박에서 완전히 풀려날 때까지, 나에 관한 기억은 그대의 정신 깊은 곳에 봉인해 두도록 하겠다."
"잠깐..."
이마가 잠깐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졌다. 넘어지려는 나를 부드럽게 눕힌 1호의 입에서, 부드러운 말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내가 중원을 다시 제패한 이후에, 그대가 나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릴 때, 그대를 데리러 오도록 하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