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혁명단2
* * *
"갑자기 왜 그래?"
식스가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래 갑자기?"
"너 혹시 어렸을 때... 아니다."
사람을 빡치게 하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놈이군.
"끝까지 말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너 혹시, 17호라고 들어봤어?"
알다마다, 어렸을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이름 아닌가.
식스가 굉장히 신경을 써서 질문을 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식스가 생각한 것 처럼 17호가 아니라면,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기란 불가능할테고, 딱히 추가적인 정보도 얻지 못할 테니까.
'어떻게 할까?'
어느 정도 상정해 둔 질문이었기에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름이 식스인 것, 내가 배운 창술과 거의 비슷한 창술을 구사한 것, 그리고 내 이름을 듣고 보인 반응까지, 대략적인 예측이 끝났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있었다.
'역시 안 밝히는 게 좋...'
"맞구나, 너 17호지?"
"그게 무슨 소리야?"
목소리가 당황으로 물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너 어릴 적 버릇 아직도 못 고쳤구나?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누가 질문을 들었는데, 그걸 떠올리려는 표정을 안 짓고 표정을 그래도 유지하냐?"
"이건 내 습관이야. 굳이 내 감정을 겉으로 들어낼 필요가 없으니까."
"그 습관이 내가 아는 17호라는 거지. 이게 얼마 만이냐."
식스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의 손길엔 반감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너랑 1호랑 같이 사라진 이후로 시설에 엄청 난리 난 거 아냐? 어떤 미친놈이 침입한 건 아닌지, 왜 너희 둘만 데리고 그냥 갔는지 한참 찾아댔다니까? 결국 1호가 범인인걸로 밝혀지긴 했지만,"
"너희는 어떻게 지냈어? 시설은 왜 이 모양이고."
"지배자가 본격적으로 도시를 지배한 이후부터 폐기 처분 당했지. 괜히 돈만 먹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곳이라고,"
"용케 너 같은 실험체를 남겨 놨나보다?"
내 말에 식스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당연히 다 죽이려고 했지, 나름 기밀 정보였으니까."
이상하다. 분명 연하가 다른 도시에서 인공 각성 실험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여기가 아닌가?'
"그래도 잘 살아남았나 보네."
"이수아 아니면 다 죽을 뻔했어. 걔가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면서 지배자의 눈길을 끈 덕분에 몇 명은 겨우 살았지."
"... 그래? 이수아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데?"
"아마, 죽었을 걸? 고위급 정신계 각성자니까, 아예 꽁꽁 숨어 있는 거면 몰라도 한 번 지배자의 눈에 든 이상 무조건 죽었을 거야."
아닌데, 지금 저쪽 관중에 섞여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데?
"그 때가 언제였는데?"
"10년이 살짝 더 됐지. 13년쯤 지났으려나?"
이 새끼 안면인식장애 있는 거 아니야? 그 정도면 충분히 이수아의 얼굴을 알아볼 법도 한데...
"너 이수아랑 꽤 친했지?"
"그랬지."
"안타까운 일이야..."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래도 말이지, 걔가 살아있진 않았으면 좋겠어."
"어?"
"걔가 살아있다면, 지금 광신도들의 우두머리가 걔일 가능성이 너무 높아지니까, 친구라고 부르기엔 먼 상대긴 하지만, 우리를 구해준 사람이랑 싸우고 싶진 않거든."
정확한 추리네.
"그래도 싸워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기 위한 혁명단이잖아."
"당연히 싸워야지, 그냥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이야, 세상 사는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진 않잖아."
어쩌면 식스는 이수아가 살아있을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높은 확률이 아니기에 애써 부정하고 있지 않을 뿐이지.
"사람들도 다 돌아갔네, 이제 너희가 어떻게 해야할 지 안내해줄게."
"참고로 말하지만, 나랑 같이 온 다른 애들도 너에 비해서 아주 꿀리는 애들은 아니야."
"고급 인력이 들어온 건 좋지만 너무 뛰어나서 어디로 배치해야 할지 감이 안잡히네, 훈련도 크게 의미 없을거고."
식스가 고심하듯 턱을 잡았다.
띠리리링!!
그 때 시설 전체에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검성님 오셨나보다."
"검성?"
"우리 S급 각성자님 별칭, 검을 기가막히게 잘 다루시거든."
그의 말이 사실인 듯 얼마지나지 않아 A3실의 문이 열렸다.
검은 색 머리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눈은 벽안이었는데, 눈 자체는 시퍼렇다못해 살기가 철철 흐르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눈빛은 과묵하고 조용해서 무섭다는 인상이 들지는 않았다
"오셨어요?"
검성이라 불린 여자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과묵하신 분이셔."
근데 이거 큰일 난 거 아닌가? 아무리 하연이랑, 이수아라도 이 정도 근거리에서 S급 각성자를 상대로 기세를 숨기고 있을 순 없을텐데...
아니나 다를까 검성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하연이랑 이수아를 바라봤다.
"이 사람들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에요, 비각성자이긴 한데 꽤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식스는 저 표정을 보고도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걸까? 아주 해맑게 우리를 소개해 주고 있었다.
긴장감에 침 한 번 꼴깍 삼켰는데, 다행히 검성은 하연이와 수아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근데 왜 저렇게 사납게 노려봐?'
검성의 눈빛은 하연이나 수아가 아니라 나한테 고정되어 있었다.
근처에 있는 식스를 바라보는 게 아닐까 싶긴했는데 각도로 보나, 감정으로 보나, 나를 바라보는 게 분명했다.
'아니 내가 뭘 잘못 했다고 그래?'
이 잠깐 사이에 내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일을 했던 걸까?
"검성님?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식스의 한 마디에 검성이 고개를 짧게 좌우로 돌렸다.
그리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을 들어 내 단검을 가르켰다.
'그냥 말로 하면 안되나? 뭘 바라는 거야.'
"검성님이 너한테 한 수 가르쳐 주시려는 모양인데?"
"방금 처음 봤는데?"
"나는 실력이 모자라서 네 실력을 한 번에 파악하지 못 했지만, 검성님은 네 실력을 파악하셨나 보지,"
다시 앞을 바라보니 검성이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과묵한 거 맞아?'
"S급 각성자랑 비각성자라니... 체급 차이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괜찮아. 검성님은 너랑 신체능력을 거의 동일하게 맞추실 수 있거든, 아마 마력도 사용하시지 않으실 테고,"
그러면 할만 한가?
단검을 쥐고 검성을 바라봤다.
'그럴리가 없지, 별칭이 검성인데,'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도 나는 자만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다는 전제 하에 내가 졌던 사람은 지금 까지 단 한 명, 천마밖에 없었으니까.
이길 수는 없어도 좋은 승부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내가 검성에게 패배하는데에는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제대로 검을 맞 붙이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넘어져서 목에 칼을 겨눠졌으니까.
어떻게 졌는지는 명확했다.
쓸 대없이 높은 내 동체시력은 그녀의 움직임이 어땠는지 전부 읽어냈고, 적절한 대응방법을 떠올려 대응했다.
충분히 괜찮은 대처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나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다.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었다.
근력이 강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실력이 나보다 월등했을 뿐이었다.
내가 필사적으로 계산해서 날린 일격을 검을 몇 번 비트는 걸로 무력화하고, 내가 취하는 모든 대응 하나하나에 가장 적절한 방법을 사용해 막아냈다.
오랜만에 느끼는 패배감에 짜릿한 감정이 내 온몸을 덮었다.
떨어져 나간 단검을 다시 쥐고 검지 손가락으로 1을 표시했다.
그녀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부탁한다.'
이번엔 검성이 먼저 나에게 돌진해왔다.
걸음 걸이 하나하나, 검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녀의 모든 걸음은 언제든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세로 전환할 수 있으면서도 빨랐다.
그녀는 내가 사거리에 들어서자마자 검을 휘둘렀다.
단순한 휘두름에 불과해 보이지만, 그 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변화들을 나는 보아왔다.
단순히 단검을 들어 막으려 한다면, 검에서 금세 변화가 일어나 내 목이 뚫려 버리고 말겠지.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녀의 검로에 단검을 가져다 댔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녀의 검로를 읽어내어 겨우 그녀의 검과 내 단검이 맞붙을 수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그녀의 검격을 막아냈다고 안심하고 있을 순 없었다. 검과 검이 맞붙자 마자 그녀의 검은 자연스럽게 흘러서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단검을 잡고 있는 오른 손을 다른 인격에게 맞긴 채 왼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손쉽게 피해내긴 했지만, 그녀의 자세를 조금은 흐뜨러 뜨릴 수 있었고, 그녀의 검또한 안전하게 흘려 낼 수 있었다.
괴이 하구나.
머리로 어떠한 의사가 전해져 왔다.
굉장히 특이한 느낌이었다. 언어를 듣는 느낌과는 달랐다. 마치 그녀의 의사를 내 뇌에 쏘아 붙는 느낌이었다.
네 놈은 정신이 두 개라도 되는 것이냐?
감도 좋아.
나는 말없이 그녀에게 단검을 휘둘렀다.
그녀가 내 팔을 잡아 업어 치려는 도중 역으로 그녀를 잡아 땅에 박았다.
그 사이에 다시 내 목을 노려 오는 검을 막으려 했지만, 한 손으로 그녀를 잡은 채였기에 힘이 살짝 부족했다.
결국 다시 검 끝으로 목이 노려진 나는 단검을 내려 놨다.
'계산이 틀렸네...'
그녀를 놓고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자, 그녀가 아까와는 다른, 나름 인정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