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리우잉2
* * *
한국어 할 줄 알아?
분명 먼 외국인 줄 알았는데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니! 나 엄청 놀랐어!
"아, 네. 저희 할머니가 한국에서 태어나셔서요. 어릴 때 많이 듣고 자라서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아요."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완전 잘하는 것 같은데? 나도 어릴 때 부터 천마님께 한국어를 배웠는데 듣는 거만 하지 말하는 건 하나도 못하는데...
'근데 잠깐, 얘 고위 각성자잖아.'
게이트 안에 몇 안 되는 기득권층일게 틀림 없어! 분명 그년의 충직한 부하일텐데 어떡하면 좋지?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하티아한테는 굉장히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하티아? 그년의 이름일까?
왜 반감을 가져? 너는 A급 각성자잖아. 아무리 본인이 S급 각성자라고 해도 A급 각성자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닐텐데, 하티아가 널 괴롭히기라도 한거야?
"제가 쓸대 없이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라서요, 저는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이 하티아의 손에서 괴롭혀지는 걸 보니까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한시라도 빨리 현수를 구하러 가아 한단 말이야!
"하티아에게 일행분이 납치됐고 보고 받았어요. 그쪽도 하티아에 대한 반감이 클 것 같은데 서로 손을 잡는 건 어때요?"
하티아의 함정이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불리한 상황에선, 몇몇 가능성들을 배제해야 승리할 수 있으니까.
좋아. 대신, 빨리 하티아를 쳐야만 해. 우리 동생이 하티안가 하피인가 하는 년의 손에 더럽혀지는 꼴은 볼 수 없으니까.
"일단 저희 아지트로 안내할게요."
그러고 보니 너는 이름이 뭐야?
"한국 이름은 김아연이에요."
좋아, 외워두고 있을 게.
아연이를 따라서 이동하니 작은 집에 도착했고 아연이가 바닥을 여니 숨겨진 입구가 들어났어.
"새 조력자 분을 데려 왔습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기지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경계하며 뒷걸음질 쳤어.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아연이를 바라봤어.
아직 나를 무서워 하는 사람을 대하는 것엔 적응이 되지 않거든, 괜히 먼저 다가갔다가 내가 실수해서 상처를 주면 어떡해.
그런데 S급각성자를 우리 힘으로 잡을 수 있는 거야?
하티아는 온전한 S급 각성자가 아니에요. 게이트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진 저와 같은 A급 각성자였는데 게이트 안의 특별한 유물의 힘으로 게이트 안에서만 S급 각성자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러면 방법이 있지.
게이트 밖으로 끌어내도 되고 그 유물의 힘을 막아도 되는 거잖아.
'그런데 아무리 게이트 안으로 한정됐다고 해도 사람의 힘을 S급 각성자 급으로 올리는 게 가능한가?'
내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된다는 결론이났지만 뭐 어떡하겠어. 내가 게이트에 대해서 전부 아는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야지.
"저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리우잉이야!
"리우잉씨를 보고 느꼈습니다. 분명 겉으로 보이는 마나는 F급 각성자도 겨우 될 것 같이 약하게 느껴졌는데, 몸도 엄청 단련되어 있으시고, 마나도 엄청 잘 사용하실 것 같은느낌이 들더군요."
... 그게 느낌만 가지고 알 수 있는 거야?
"제 능력이 탐색쪽 계열입니다."
그러면 그럴 수도 있지.
"마침 리웅이씨가 맡으면 적당한 임무가 있습니다."
아연이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 봤어.
말만해! 다 들어줄게!
"하티아는 자신의 힘의 근원인 유물을 마나로 보호처리된 상자안에 넣고 다닙니다. 상자도 유물의 일종이라서 어지간히 강한 충격을 주는 게 아니라면 깨지지 않는데 특별히 설정된 마나패턴을 사용하면 상자를 열 수 있습니다."
나보고 그걸 열어달라는 거야?
"네."
내가 그걸 할 수 있을지 없을 지 어떻게 알고?
"그래서 상자 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아연이가 손짓하자 사람들 중 한명이 빠르게 움직여 작은 상자를 하나 가져왔어.
"이 상자의 패턴은 저밖에 모릅니다."
열어 보면 되는 거지?
상자를 손에 쥐고 상자의 마나에 집중했어. 사실 이런 쪽은 내 전문분야가 아니긴 한데, 내가 하지 못하면 하티아를 무찌를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힘이 났어.
오, 열렸다.
"역시, 성공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와!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무난하게 열 수 있었어.
"그러면 바로 계획을 진행해도 되겠군요."
응? 바로?
"네, 바로요."
나야 일이 빨리 진행되면 좋지만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른게 아닐까? 나 여기 온지 10분도 안된거 같은데 바로 일이 진행되다니, 뭔가 이상하잖아.
"다들준비해! @#@#!"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아연이가 한국어로 한 번 말한 뒤 자기네 말로 외쳤어.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나도 뭐라도 하고 싶었는데, 이쪽 전략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뭘 할 수가 없더라.
"리우잉씨는 이 아이의 안내에 따라 상자가 보관된 곳으로 침투하셔서 상자 안에 있는 유물을 박살 내시면 됩니다."
하나 약속해. 내 동생을 만나면 절대로 건드리지 말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유물이 깨진 이후부터 제대로 된 전투가 진행 될텐데, 리우잉씨가 유물을 부수고 돌아오실 때까지 전투가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거든요."
그러면 상관없고.
아연이가 알려준 아이를 쳐다보니 애가 바들바들 떨면서 아연의 뒤로 숨었어.
'나 무서운 사람 아닌데...'
차라리 나를 미워하면 편하겠는데 저렇게 겁을 먹고 덜덜 떠니까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어.
평소에는 나를 무서워하는 사람과는 굳이 대화하지 않고 피해오기만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잖아?
'그래, 까짓거 해보지 뭐!'
현수가 위험한 상황이야, 쓸데 없는 트라우마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순 없어.
꼬마야, 언니가 무섭니?
부드럽게 전음을 보내니 꼬마가 더 떨면서 아연이 뒤로 숨어 들어가. 조금 상처인데.
'천마신교의 애들도 나를 보면 이런 반응을 보이곤했지.'
다들 피하고 무섭다고 떨었어.
머리를 잠식하는 기억들에 몸이 파르르 떨렸지만 용기를 냈어.
현수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이, 내 트라우마보다 더 강했거든.
꼬마야 언니는 무서운 사람 아니야. 언니는 꼬마를 괴롭히지도 않을 거고, 꼬마가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켜줄거야.
분명 초면일텐데 애가 왜 이렇게 나를 무서워 하는 걸까? 내 얼굴이 그렇게 무섭게 생긴 건 아닌데 말이지?
천마신교의 애들은 내 나쁜 소문을 들어서 무서워 한다고 쳐도 이 아이는 나를 무서워 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인가. 보네.'
우리 꼬마, 언니랑 같이 놀까?
"%#@!"
당연히 뭐라고 하는 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감정은 전달됐어. 처음 보다는 두려움이 많이 가라앉은 모습이었거든,
'좋아! 하면 되잖아!'
다른 사람들이 준비를 하는 동안 꼬마랑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꼬마의 두려움이 점점 옅어지고 어느새 미소를 만면에 띄었어.
진짜 오랜만에 보는 아이의 웃음에 내 마음까지 다 행복해지는 거 있지?
마음놓고 웃으려 하니 현수가 걸려서 웃을 수 없었지만,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
'무사히 천마신교에 돌아가면, 천마신교의 아이들이랑도 친해져 보자.'
차근차근 친해지고, 다른 사람들이랑도 대화하면서 나에대한 두려움을 풀어내면 되겠지.
"이제 출발하시면 됩니다."
갔다올게.
아이를 따라서 이동했어. 몰래 잠입할 필요가 있는 일이라 하수구를 타고 이동했는데 냄새가 독해서 내 코랑 아이의 코를 마나로 막아줬는데 꼬마가 고맙다면서 허리를 꾸벅 숙이더라.
나도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움직였어.
다른 사람들이 시선을 제대로 끌고 있는지, 아니면 원래 호위가 없는 건지 상자가 보관된 장소에는 제대로 된 호위병이 없었어.
상대쪽에도 A급 각성자가 있는데 민간인을 호위로 남겨둔 건 생각이 있는 행동인가? 일단 일격에 전부 기절시키고 아이가 알려준 상자를 열고 안에 있는 유물을 박살냈어.
이러면 된거지?
아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어.
***
"거의 끝나가는군."
아담한 집에서 밧줄에 묶인채 뒹굴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천마가 중얼거렸다.
"나 이제 구해지는 거야?"
"그렇다. 아마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슬슬 이동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리우잉누나는 괜찮아 졌어?"
누나 트라우마 극복하려고 이짓 한 거라면서, 아무런 효과가 없으면 수많은 인력들을 헛되게 버린게 되잖아.
"그런 것 같다."
"심한 트라우마인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빠르고 좋게 해결됐네?"
리우잉은 원래 강한 아이니까. 첫 발걸음을 때지 못해서 그렇지, 한 번 발을 내 딛은 이후부터는 잘 할거야.
경비병 차림을 한 권마씨가 옆에 앉아서 말했다.
처음 들어왔을 땐 검마는 최종보스인데 자기는 동생한테 죽는 경비병 역이라고 엄청 서운해 하더니, 이젠 좀 괜찮아진 듯 싶었다.
"생각보다 효과가 너무 좋아. 이렇게 잘 먹혀 들어갈 줄 알았으면 진작 했을 걸 그랬다."
"얼마나 잘 먹혔길래 그래?"
"원래라면 천마신교로 돌아간 이후 네가 리우잉을 다른 사람과 연결해 주기를 바랬었다. 최소한 옆에서 응원이라도 해줘야,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지금 리우잉의 상태를 보아하니, 아무리 느리더라도 혼자서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이쯤에서 몰카를 중단시켜도 되겠지만, 리우잉이 너를 구해내는 성취감을 느껴야 더 효과가 좋은테니 일단 최종 장소로 이동하지."
뭔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누나가 괜찮아 졌다니까 오케이인 거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