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일상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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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가 게임을 모두 정리했지만 한 번 달아오른 열기는 우리에게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남겼다.
뭔가 더 놀고 싶긴 한데 자기가 먼저 놀자고 말하기는 애매한 상황에서 연하가 입을 열었다.
"더 놀고 싶은데, 놀만한 거 없을까요?"
"넌 그렇게 놀고 또 놀고 싶어?"
"언니는 놀기 싫으세요? 그러면 언니는 빼고 저희끼리 놀아요."
"아니, 그런 소리는 아닌데..."
하연이가 연하한테 지다니, 굉장히 특이한 광경이네.
'아니지, 요즘엔 연하가 늘 하연이한테 이기는 것 같기도 해.'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까지만 해도 둘이 엄청 친하다는 느낌이 없어서 더 센 하연이가 늘 이겼었는데, 둘이서 제대로 친해지면서, 조금 더 붙임성 있고 싸가지 없는 연하가 하연이를 이겨나가는 것 같았다.
"근데 뭐하고 놀 건가요? 연하씨가 가지고 온 보드게임은 그게 끝 아니에요?"
"보드게임 없어도 놀 수 있는 건 많죠. 당장 마피아 게임 같은 걸 해도 되고요."
"마피아 게임은 방금했던 게임이랑 너무 겹치지 않는가?"
사람이 많다보니 말 한 마디만 하면 어디서 반박이 나왔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끝내는 것도 아쉽잖아요. 모처럼 쉬면서 노는 분위기가 형성 됐는데,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 아쉽다고요."
"그러면 뭐 하고 놀지 네가 생각하던가."
하연이가 한숨을 푹 쉬며 말하고는 뒤로 누웠다.
"... 햄버거!"
하연이 제가 텐션이 오르다 보니, 정신이 좀 어려진 모양이다.
아주 해맑게 웃으면서 하연이 위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쟤는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 걸까?
싶었는데 연하의 뒤로 바로 리우잉이 따라서 올라가더니 천마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그 위로 올라갔다.
'나 없는 동안 단체로 술이라도 마신 거야?'
누가 보면, 보드게임을 한 게 아니라 마약이라도 한 줄 알겠네.
텐션이 아주 하늘로 치솟는 듯 했다.
다행이 월하는 아주 정상적인 텐션을 유지하고 나랑 비슷한 표정으로 층층이 쌓인 사람탑을 보고 있었다.
'어린애들도 안 그러는데 뭐하는 거야...'
하는 마음으로 사현이네를 보니 아리와 가연이가 사현이 위에 올라타 있었다.
'생각하는 걸 포기하는게 편하지 않을까?'
"뭐하는 거야! 빨리 내려와!"
"심심하단 말이에요! 더 놀고 싶어!"
"네가 무슨 애야? 오늘 따라 왜 자꾸 투정이야?"
하연이가 연하를 포함한 세명을 동시에 들어서 떨궜다.
"그렇게 심심하시면 왕게임이라도 하는 건 어떠신가요?"
"왕게임이요? 좋긴한데, 애들도 있잖아요."
"애들이랑 어른을 구분하는 거죠. 어른들은 어른들 끼리 뽑고 애들은 애들끼리 뽑아서, 어린이 1번과 성인 3번이 뭐하세요. 하면 수위 조절이 되지 않을까요?"
"좋아요! 바로 만들어 오겠습니다!"
연하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거니 2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종이 여러 장을 들고 왔다.
"각자 종이 한 장씩 받고요. 랜덤으로 왕이 배분되게 설정해 놨어요. 왕이 되면 자기 번호는 못 보는데, 명령을 내린 다음에 알고 보니 자기가 명령의 대상일 수도 있어요. 1번이 3 번 때려! 같은 걸 했는데 왕이 3번이면 정말 낭패겠죠?"
"뭐야. 자폭도 있어?"
"그래야 재밌거든요."
연하가 종이를 섞고 애들한테 먼저 나눠주고 우리에게 나눠줬다.
'내 번호는... 2번이네.'
"주상 전하 납시오!"
"그렇게 까지 해야해?"
"기분 내는 거잖아요! 저 혼자 기분 내는 것도 안돼요?"
"저요."
가연이가 슬며시 손을 들며 왕관이 그려진 종이를 내밀었다.
"전하, 명령을 내려 주시옵소서!"
"... 연하야, 너 혹시 우리 몰래 술 마시고 왔니?"
"제가 술을 왜 마셔요? 원래 이런 게임은 과몰입을 해야 재밌는 거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하이텐션인데?"
"제가 하이텐션인 거에 오라버니가 뭐 보태주신 거라도 있어요?"
"저어..."
가연이가 슬며시 손을 들었다.
"네, 명령만 내려주시지오 전하."
가연이가 사현이를 흘끔흘끔 쳐다 보며 말했다.
"어린이 1번이 어린이 3번한테 볼 뽀뽀!"
오, 가연이 머리 잘쓰는데? 3분의 1의 확률로 여자애들끼리 뽀뽀 하고 3분의 1의 확률로 사현이와 아리랑 뽀뽀하겠지만 나머지 3분의 1의 확률로 둘이서 뽀뽀할 수 있잖아? 충분히 가능한 도박 아니야?
"나는 3번!"
"저는 2번이에요."
가연이의 왕관이 스르르 사라지더니 1번이라는 글씨로 바뀌었다.
어른들은 다들 작게 웃었지만 가연이는 아랑 곳 하지 않고 아리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러면 다시 섞어 봅시다."
연하가 종이를 수거해서 섞은 뒤 다시 나눠졌다.
'이번에도 왕은 아니네.'
"주상전하 납시오!"
"본좌가 왕이느니라."
천마의 종이엔 명확한 왕관이 그려져 있었다.
"수위가 너무 세지 않은 명령이라면, 뭐든 가능한 것이지?"
"그렇사옵니다 전하."
"어른 2번이 어른 4번을 업거라. 단 이 명령은 왕 게임이 끝날 때 까지 유지된다."
아니 저런게 돼?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연하를 쳐다봤는데 연하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2번 4번 나와요."
천마의 왕관이 스르르 사라지더니 2번이라는 글자가 떴다.
자신의 번호를 보고 표정이 딱 굳어 버리는 천마의 변화가 참 압권이었다.
"하아... 2번이 누구지?"
"난데?"
내가 종이를 꺼내고 천마를 바라보자. 표정이 다시 상쾌하게 바뀌었다.
"노린건 아닌데, 마침 아해가 걸렸군, 업히거라."
천마가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내 무게 정도는 천마한테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고민 없이 천마의 등에 올라탔다.
"흐음, 아해의 온기가 참 기분 좋군."
천마가 다른 애들 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내 다리를 지지하는 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는데, 애들이 눈치 못채게 하기 위해서 조절을 했는지 아주 적나라 하진 않았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죠?"
하연이가 눈에 불을 켜고 천마를 바라봤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나?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나는 너희들끼리 업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지 내가 아해를 업고 싶어서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 절대 절대 아니다."
"다음 왕 뽑아요."
연하가 빠르게 카드를 수거해서 카드를 나눠졌다.
왕은 하연이,
"3번이랑 4번, 바닥에 손 대세요. 게임 끝 날 때까지."
응? 게임이 점점 변질 되는 거 같다?
3번이랑 4번은 연하와 월하 였다.
두 사람 모두 땅에 손바닥을 대고 하연이를 노려봤다.
'원래 왕게임이 이런 게임이 아니지 않나?'
그렇게 몇번의 차례가 더 지나간 다음의 우리는 아주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어린애들은 그나마 서로 어깨 동무를 하고 있는 선에서 끝이 났지만, 연하는 하연이를 안은채 땅에 손을 대느라 하연이를 덮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하연이는 하연이 나름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어야 해서 불편한 자세로 머리를 박고 있었다.
월하는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업드린 채로 천마를 위에 올리고 있었으며 그 위에는 내가 업혀 있었다.
'이거 왕게임 맞나?'
바닥에 색상 동그라미 그려놓고 손발 가져다 대는 게임이 생각나는 데.
"카드 뽑을 게요!"
손발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만큼, 마나로 종이를 섞어서 각자의 눈앞에 날렸다.
'왕이다!!'
"주상전하 납시오!"
"야 소리 지르지마 귀아파!"
"2번 5번, 지금 당하고 있는 모든 벌칙 해제!"
"뭐에요 그런게 어딨어요?"
"왕의 명령은 절대적인 거거든요? 그냥 들으세요."
내가 들고 있던 종이의 왕관이 사라지고 2번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나이스!!"
바로 천마의 등에서 내려왔다.
5번은 월하, 바닥에 손을 대고 있던 것도 때고 위에 있던 천마도 때어냈다.
3명이 자유로워 지고 두 명이 벌칙을 받고 있는 꼴이 되자 우리 셋 간에 눈빛이 오갔다.
"이제 벌칙류 명령은 그만하는 게 좋겠군, 게임의 본질을 흐리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미 하고 있는 명령을 해제하는 명령도 굳이 다시 안내려도 되겠죠?"
"아니 이 망할 인간들아!!"
연하의 절규가 터져나왔다.
"시끄럽다고! 내 귀에 대고 그렇게 말하지마!"
"싫은데요!!"
연하가 하연이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역시 백씨 자매는 사이가 좋군."
"그렇죠? 둘이 완전 친하다니까요."
"연하는 힘든 듯 하니 내가 종이를 섞도록 하지."
천마가 종이를 섞은 뒤 모두에게 배분했다.
"내가 왕이다!!!"
늘 주상전하만 모셔왔던 연하가 소리를 질렀다.
하연이는 이제 질렸는지 귀만 막고 아무런 대꾸도 안 했다.
'네가 고생이 많다 하연아.'
그렇다고 풀어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흐흐흐, 아주 어려운 명령을 내려 줄 거에요."
"빨리 명령이나 내리지?"
"지금 왕한테 재촉하는 거에요?"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전하."
내가 적당히 연하의 기분을 맞쳐주자. 연하가 즐거운 듯 입을 열었다.
"2번이 식빵을 물고 달리리면서 어머! 지각이야! 할 때 모퉁이에서 4번이랑 부딪혀서 넘어지고 너 때문에 내 빵이 날아가 버렸잖아! 책임져! 를 외칠 때 갑자기 1번이 등장해서 죄송합니다. 2번님. 하면서 리라를 연주하세요!"
... 쟤 진짜 약빨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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