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1화 〉 일상­9 (121/265)

〈 121화 〉 일상­9

* * *

참으로 괴랄한 명령이었다. 일단 지금까지의 명령과는 다르게 사람이 3명이나 필요했고, 명령의 수준이 무슨 의식의 흐름을 따른 것 처럼 이상하기도 했다.

뭐? 입에 빵을 물고 다니다가 부딪히라고? 갑자기 리라는 왜 쳐? 애초에 리라가 있기는 해?

'난 5번이라서 상관없긴 한데...'

자기가 걸리면 어쩌려고 저런 명령을 내린걸까?

연하의 왕관 모양이 사라지고 나타난 숫자는 3번이었다.

'이걸 피하네.'

"아니 이 자세에서 저 걸 어떻게 해!"

하연이는 4번이었다.

위에는 하연이가 안고 있었고 바닥에 머리를 박은 상태에서 1번과 부딪혀야 하는데...

"일단 내가 1번이다. 지렁이처럼 기어서 나에게 박으면 알아서 넘어져 줄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그런데 리라는 어딨죠?"

당연히 2번은 월하였다.

남은 사람이 얘 밖에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긴 하지만 말야.

"알아서 구해 오셔야죠."

"리라를 갑자기 어디서 구해요?"

"없으면 치시는 척이라도 하시던가요!"

월하와 연하 둘이서 말싸움을 하고 있을 때 천마가 냉장고로 가서 식빵을 꺼내서 입에 물었다.

"지각이군."

하면서 굉장히 여유롭게 거실로 다가오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위압감 있어서 그 유명한 천마군림보라도 쓰는 줄 알았다.

"아니... 씨..."

하연이가 머리를 바닥에 댄체 기어서 천마 쪽으로 이동했다.

분명히 바닥에 머리를 박고 이동하는 건데 엄청나게 빨랐다.

'이게 S급?'

S급씩이나 되는 각성자의 신체 능력을 이렇게 사용하는 걸 보면 웃기면서도 슬퍼졌지만. 다행이 하연이는 천마와 부딪힐 수 있었다.

"으악!"

천마가 매소드 연기를 하면서 넘어지고 그 식빵을 멀리 날렸다.

"너 때문에 내 식빵이 날아가 버렸으니, 책임 져."

"알겠습니다 천마님."

웛하가 허공에 손을 대고 손을 튕기기 시작했다.

리라는 없었지만 마나를 이용해서 소리를 냈는지 청아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브라보!"

연하가 소리쳤다.

박수를 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땅에 손을 대고는 박수를 칠 수 없었기에 휫바람만 계속 불러댔다.

"이제 그만하자. 정신 나갈 것 같아."

"엥? 왜요? 재밌잖아요."

"재미만 있고 정신이 없어질 것 같아..."

"슬슬 뇌절 인 것 같다."

바로 소파에 들어누우니, 천마와 월하도 소파 앞 공간에서 소파에등을 대고 앉았다.

아이들까지 어깨 동무한 걸 푸니 연하가 입을 삐죽 내밀며 바닥에서 손을 때고 일어났다.

"그래도 오늘은 충분히 놀았으니까 괜찮아요."

연하도 소파에 등을 대고 앉았다.

내가 소파에 누워서 애들이 못 앉는 구나, 하는 생각으로 일어나서 소파 위에 제대로 앉았다.

"그냥 그대로 계셔도 되는데요?"

"혼자서 자리 차지하기 미안해서 그러지."

제대로 앉긴 했는데 소파 위로 올라 오는 애들은 한 명도 없었다.

다들 한국인이라 그런지 소파에 등대고 앉는 게 더 편한 모양이다.

"점심은 간단하게 비빔면 해서 먹을까?"

"좋아요!"

"나도 좋다."

입이 많다보니 좋다는 소리만 7번 들렸다.

"그런데 면이 있나?"

"찾아보시면 있을 거에요."

냉장고에 안 넣어도 되는 식재료를 보관하는 곳을 살펴보니 가볍게 끓여 먹을 수 있는 면 사리가 있었다.

비빔면이야 면 끌이고 소스를 만들어서 비비면 완성되는 음식이니, 간단하게 소스를 만든 뒤 면을 끌였다.

차게 식힌 후 면을 비비니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그럴싸한 점심이 완성됐다.

상 위에 반찬을 올려두니 애들이 하나 둘씩 상으로 모였다.

"오, 맛있어 보여요."

"그러면, 먹을까?"

각자의 자리에 비빔면들을 올려 놓고, 나도 자리에 앉았다.

여자애들은 커다란 그릇이고, 나는 적당한 그릇인데 나름의 웃음 포인트였다.

애들은 당연히 작은 그릇에 줬는데, 가연이랑 아리가 적다는 듯이 빤히 바라보길래, 그릇을 바꿔서 추가로 줬다.

"점심 먹고 나서는 내가 아해를 독점해도 되겠나? 권총쓰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 그렇다."

"굳이 독점할 필요 있어요? 다같이 가서 다 같이 배우면 되죠. 저희가 가지고 있는 총은 없어도, 오라버니한테 말은 들을 수 있잖아요? 저는 그냥 다 같이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괜찮군, 아이들도 같이 데려가는 게 좋겠지?"

"그렇지 않을까요? 애들만 내버려 두고 가는 것도 좀 이상하고."

"오라버니는 괜찮으신 거 맞아요?"

이 정도 사안의 일은 굳이 내 의견 안 묻고 진행해도 되는데, 예전에 한 번 터진 적이 있어서인지 하연이가 조심히 물어왔다.

"난 상관 없는데 내 사격술은 누구한테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 그냥 되는 대로 쏘는 건데 괜찮겠어?"

최근들어 알게 된 내 능력인 반사신경과 순발력에 모든 걸 의존해서 동물적인 감각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총알이 움직일 궤도 라던가, 상대방의 움직임을 읽는 것 정도는 계산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엄청 체계적으로 사격을 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호신용 권총이지 않은가. 적당히 배워도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겠지. 내가 아해보다 반사신경이나, 순발력은 훨씬 좋다."

그래, 다들 나보다 대단한 애들이니까.

"사현이는 권총 배우지 말자. 나같은 사람한테 야매로 배우는 것 보다, 예지씨 같은 분한테 본격적으로 배우는 게 더 나을거야."

사현이는 평범한 민간인이니까.

"그러면 집에서 혼자 있어도 돼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오빠! 당연히 우리랑 같이 가야지!"

"맞아!"

아리랑 가연이가 사현이를 양 옆에서 꼭 끌어안았다.

"일단 밥부터 먹자. 점심 다 먹고 갈거니까."

비빔면을 입에 집어넣으니, 새콤하며 매콤한 게 상당히 맛있었다.

다른 애들도 맛있게 먹으니, 괜스래 기분이 좋아졌다.

"맛있어요!"

"진짜 맛있다. 요리 참 잘하는 군 아해야. 좋은 신랑이 되겠어."

애들의 칭찬을 들으며 면을 먹다보니 어느새 모두 그릇을 비웠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사현이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저희도 도울게요!"

가연이와 아리의 표정이 상당히 간절해서, 굳이 어른들이 하겠다고 나서지 않고 애들한테 맡겼다.

"그런데 이 건물에 사격장 있어?"

"당연히 있죠. 각성자들한테 총은 큰 의미가 없지만, 비각성자들한테는 굉장히 유용한 무기 인걸요. 저희 조직에 속해 있는 비각성자들은 대부분 왠만큼 총을 쏠 줄 알아요. 훈련도 훈련이고 가끔 기분 전환으로 쏘는 사람들도 있어서 사격장은 구비해 놨어요. 아, 미리 다 나가있으라고 해야겠네요."

월하가 전화기 같이 생긴 무언가를 꺼내서 부하들에게 연락했다.

"어, 지금 사격장에 사람 있어? 아무도 없다고? 그러면 이따가 우리가 쓸거니까 아무도 못 들어가게 출입 금지 시켜 놔."

월하가 전화를 끊고 우리를 바라봤다.

"바로 이동할까요? 아니면 조금 쉬었다 갈까요?"

"쉴 필요가 있나 바로 가면 되는 것을."

어느새 천마의 손에는 멋들어진 권총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는 거지만, 저거 두 개가 내가 쓰는 권총 보다 더 좋다.

"설거지도 다 했어요!"

"그러면 바로 갈까?"

월하를 따라서 건물 안을 이동하니 꽤 넓찍한 사격장이 나타났다.

"지하에 있는 사격장인데, 아마 그럭저럭 쓸만한 거에요."

"가장 좋은 사격장은 게이트라고 생각하는 데 말이지."

"...그거 좋은 데요?"

월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연씨, 비는 게이트 아는 거 없어요?"

"닫힐 때 까지 아직 시간이 남은 게이트들이 있긴 하지."

"그러면 게이트로 가서 연습해요. 가만히 있는 무생명체한테 쏘는 것 보다는, 움직이는 몬스터를 향해 쏘는 게 더 연습이 될테니까요."

"여긴 왜 온거야 그러면..."

월하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지금 부터 기사님의 사격쇼가 있겠습니다!"

월하가 박수를 치자 다들 갑자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와! 오라버니 멋져요!"

연하 쟤는 아직까지 하이텐션이네.

"무작위로 나타나는 표적을 맞추시면 돼요."

근데 거리가 존나 멀어 보이는데?

"여기 권총용 사격장 아니야?"

"아닌데요?"

왠지 거리가 엄청 멀어보이더라.

"일반 탄환으로 쏴야 해?"

"그래야 더 간지가 나지 않을까요?"

권총의 유효사거리는 50미터도 안 된다는 걸 알고 말하는 거니?

"장거리 저격은 내 특기가 아닌데..."

내가 권총을 들고 다니는 이유는 원거리에 있는 적을 요격하기 위해서가 아닌, 근접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다.

20m안 쪽에 있는 적 정도는 아무리 격하게 움직여도 맞출 수 있었으니까.

"이게 장거리에요?"

"이거 소총 아니야. 권총이라고, 100m면 엄청 장거리야."

"그래도 가만히 있는 데다가 기사님이 쏘시는 거니까 잘 맞출 수 있지 않을 까요?"

"글쎄..."

될라나 모르겠네...

"일단 한 번 해볼게."

'야, 손 떨림 잡는 거랑 미세한 조정은 너한테 맡긴다.'

'오케이.'

바닥에 원으로 표시된 부분 위에 섰다.

­삑!

가장 가까운 100m거리에 사람 모양 표적이 올라왔다.

바로 손을 그쪽으로 움직여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표적이 쓰러지는 걸 확인하자마자 다음 표적을 향해 권총을 돌렸다.

'저건 아무리 봐도 250미턴데...'

최대한 정교하게 계산해서 총을 쐈다.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는 실내다 보니 아슬아슬하게 맞고 표적이 쓰러졌다.

'바람까지 계산하는 건 개 오바지.'

몇번 더 표적이 일어났지만, 차분하게 계산해서 쏘니 맞출 수는 있었다.

"뭐에요. 잘 하시네요."

"실내니까 할 수 있는 거지 밖에서는 못해."

그리고 내 권총이 일반 권총보다 위력이 더 세서 되는 거지 일반 권총이었으면 못했다.

"나도 해봐도 되나?"

천마가 권총을 들고 사격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