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 누구에게나 흑역사는 있는법
* * *
"오셨어요?"
우리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하연이가 굉장히 어색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거의 3주를 만나지 않은 만큼 분노는 거의 사그라든 듯 보였지만 한 번 대차게 싸워놓고 제대로 화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어색함은 아직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 왔어..."
피차어색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연이와 나 모두 쭈뼛거리며 제대로 말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 화련이가 답답했는지 내 등을 확 밀어버렸다.
"그래서, 너희는 언제 화해할 것이냐. 어차피 앞으로 계속 같이 지낼 것인데 계속 이 상태로 있을 순 없지 않는가? 내 생각엔 지금 당장 화해하고 맛있게 밥을 먹은 뒤 다 같이 한 방에서 자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데 너희 생각은 어떤가."
"그게 좋을 것 같아요..."
하연이가 답지 않게 소심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아해는?"
"나도 지금 화해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자,스스로 말해봐라. 너희는 뭘 잘 못했지?"
"애들한테 말도 안하고 게이트에 들어간거, 아무리 나 혼자 들어가는 게 좋다고 해도 애들한테 언급정도는 하는 게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거."
"오라버니한테 화났다고 오라버니를 때리려고 했던거요. 그리고 제가 너무 흥분해서 과하게 화를 낸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 이제 서로의 잘못을 알았으니 그에 대해서 사과를 하면 되겠군."
"죄송해요 오라버니 아무리 화가나도 오라버니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면 안되는 건데 제가 너무 흥분해서 감히 오라버니께 주먹을 휘둘렀어요."
"나도 미안해, 괜히 걱정 끼쳐서..."
서로 제대로 사과를 하긴 했지만 우리의 어색함은 이것 하나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과보호지.'
이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나는 하연이와 친근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면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지. 하연, 너는 아해를 믿지 못하는가?"
"오라버니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오라버니가 어디가서 다치거나, 만약... 죽기라도 한다면... 그런 걸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끔찍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지경인 걸요."
"지금 아해의 무력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상당히 상위에 존재한다. 비록 등급은 F급 이지만 홀로B급 각성자나 몬스터와 대적이 가능한 수준이지. 어디가서 위험에 빠질 정도로 약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불안해요..."
"별걸 다 불안해 하는군, 아해는 저번에 리우잉과 단 둘이서 잠입임무를 수행한 적도 있고 애초에 하연 너 없이도 잘 살아오던 인물이었다. 그런 이에게 갑자기 혼자다니는 게 불안하다고 움직일 때 옆에 사람을 한 명씩 대동하고 움직이라고 하면 당연히 이상한 것 아닌가."
리우잉이랑 잠입임무를 수행한 건 내가 아니라 현수 아니었나?
물론 현수나 나나 실제로 발휘할 수 있는 실력은 거의 비슷하지만...
"이번에 실제로 위험할 수 있는 일이 생겼잖아요. 그리고 지금까지 오라버니가 혼자다니다가 위험에 빠진 적이 얼마나 많은 데요! A급 각성자한테 기억을 잃기도 했고 제 부하들이었기에 망정이지 모르는 각성자들이랑 밥을 먹기도 했다면서요!"
"다 무사히 해쳐나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앞으로 위험한 일이 있을때는 우리가 함께 하면 된다. 아해가 위험한 곳에 스스로 발을 들인다고 한다면 당연히 우리가 붙어서 지켜줘야 하는 것이 맞겠지만 평소 상황에서 그를 지킨다고 곁에 붙어있는 것은 방해나 마차가지인 행위다. 자네는 아해를 믿지 못하는가?"
"... 믿어요."
"아해도 앞으로는 위험한 곳에 혼자서 움직이지는 않는다고 하니 아해에 대한 과보호는 이제 그만뒀으면 좋겠다."
화련이의 진지한 표정과 말투에 하연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어요. 이제 그만하면 되잖아요."
하연이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오라버니, 딱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위험한데는 절대로 혼자가지 말것."
"알았어. 내가 충분히 강해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저를 이길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보내드릴게요."
하연이가 장난기를 섞어서 말하자 분위기가 확 풀렸다.
"후우. 좋게끝난 것 같으니 다행이군."
화련이가 기지개를 쭈욱 피면서 말할 때 문이 덜컥, 하고 열렸다.
터벅...
아주 무겁고 낮은 발걸음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퍼졌다.
"기사니이이임..."
월하가 거의 우는 것과 다름 없는 목소리로 나에게 다가와서 안겼다.
"월하야? 너 왜그래?"
"너무 힘들어요... 일주일 넘게 중국에서 쇠빠지게 뺑뺑이를 돌고 왔더니 그만큼 일거리가쌓여서... 지금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만 처리하고 있었어요..."
월하의 목소리가 너무나 서럽고 애처로워서 그녀를 꼭 끌어안은채 등을 쓸어줄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 마음 안다... 지금까지 계속 일만하다 왔으니."
화련이가 월하의 옆에서 그녀를 안아주니 그녀의 울음소리가 더더욱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흐아아아!! 일하기 싫어어어어어."
이런 어투는 연하만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월하고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굉장히 신선했다.
"내일부터는 내가 너의 일을 도와주도록 하지. 둘이서 일을 처리하면 아마 더 여유롭게 끝날거야."
"진짜로요?"
"그럼 진짜고 말고, 그러니 이제 진정 좀 하거라."
"네에..."
월하가 내 품에서 훌쩍이더니 갑자기 잠이 든 듯 호흡이 일정해졌다.
"우리도 슬슬 들어가서 자도록 하지, 오랜만에 다 같이 자보도록 하자꾸자."
화련이의 말대로 큰 방하나에 이불을 가득 핀 다음 다같이 누워서 잤다.
애들이랑도 같이 잤는데 사현이가 양옆에 애들을 끼고 꽉 안겨서 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 졌다.
요즘 사현이에 대한 아리랑 가현이의 사랑이 점차 무거워 지고 있는 눈으로 보이는 상황이라서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사현이에게 명복을 빌어주기로 했다.
***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니 사현이가 밥을 하고 있었다.
'늘 사현이가 가장 먼저 일어난단 말이지.'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내가 일어나는 데 이는 거의 항상 고정적인 일이었다.
월하나 하연이가 일 때문에 일찍 집을 나서게 될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사현이는 집안 어른들 밥 차려 준다고 일찍 일어나고 나는 애들 마중해 준다고 애들보다 먼저 일어났다가 밥 먹는 거 구경하고 다시 자기 때문에 이렇게 일어나는 게 국룰이었다.
"밥 다됐어요!!"
사현이의 외침과 함께 다들 방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점은 각자의 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에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는데 월하는 어제의 일이 기억이라도 난 듯 고개를 푹숙이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일하기 싫어요오오오."
연하가 월하의 옆에서 어제의 월하를 따라하며 빈정거려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단 호다닥 움직여서 식탁에 앉을 뿐이었다.
"월하언니 왜 그렇게 도망가세요?"
"시끄러워요!"
월하고 양귀를 막으며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역시 사람은 늘 제정신을 유지해야 해 괜히멘탈 한 번 터졌다가 영원히 박제되게 생겼잖아.
"월하가 저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해가 잠결에 나한테 했던 말이 생각나는 군."
"응? 내가 그랬어?"
"중국에서 게이트를 모두 처리하고 3일동안 잠자는 숲속의 왕자가 됐던 아해의 잠 중 이틀차때 벌어진 일이다. 아마 아해는 기억하지 못하겠지."
내가 이상한 말을 했었나?
꿈도 안 꾸고 편하게 잔 것 같았는데?
"지금 여기서 말했다간 아해의 어마어마한 흑역사가 될 것 같으니 나중에 아해가 없는 곳에서 말하도록 하겠다."
"나한테만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없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한테만 말하는 건 도대체 무슨 의도야?"
"아해가 아해의 흑역사를 안다면 지금의 월하처럼 바닥에 머리를 박고 괴로워 할테지만 아해가 아해의 흑역사를 알지 못 한다면 그럴 일이 없지 않나."
"그러면 그냥 다른 애들한테도 얘기해 주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니야?"
"이미 말을 꺼냈으니 모두와 공유하고 싶다. 나 혼자 알고 있기에도 아까운 일이니 말이야."
도대체 자는 중에 무슨짓을 저지른거야...
"이렇게 된 거 지금 말해주도록 하지. 아해는 혼자 방에 들어가 있어라."
내가 반항적인 눈빛을 잔뜩 가진 채 화련이를 바라봤지만 곧 연하에 의해 연행되어 방에 갖혀버렸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지난후.
"푸하하하하하!!"
뭔가 엄청난 웃음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이제 다 끝났어요. 나오세요."
화련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알 방법이 없었지만 모두의 눈빛에는 나를 향한 귀여움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사현이를 비롯한 애들 조차 나를 보고 웃고 있을 정도였으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사님, 귀여우시네요."
그러는 너도 아까는 흑역사에 엄청 고통받지 않았니 월하야?
다 같이 웃는 분위기 속에서 나만 웃을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