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 새 페이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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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해주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흡혈귀의 말이 끊겼다.
금방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아서 가만히 앉아서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다른애들은 어떻게 하고 있으려나.'
화련이는 걱정이 안됐다.
나보다 월등히 대단하기도 하고 아무리 힘든 시련이 찾아온다고 해도 화련이가 꺽이는 모습은 상상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다른 애들이 문제였다.
하연이는 은근히 멘탈이 튼튼해서 걱정을 덜할 수 있고, 연하도 언니 닮아서 그런지 멘탈이 튼튼해서 걱정이 안됐는데 은근히 월하가 멘탈이 안좋았다.
'리우잉도 문제지.'
비단 월하나 리우잉이 아니더라도 나한테 시련이랍시고 화련이를 닮은 무언가가 나온 것을 생각한다면 그녀들에겐 나를 닮은 무언가가 나올텐데 그걸 해소할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을 하고 있다 보니 주변의 환경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콰직!
모든 것이 다 환상이라는 가정이 틀리지 않은 듯 세상 전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작은 모래들이 끝도 없이 땅으로 흘러내렸고 나는 흘러내리는 모래들 사이에서 밑으로 쭉 내려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곳으로 끌려오기 전에 있던 곳에 도착해 있었다.
'뭐야, 이게 끝이야?'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곳은 현실이었다.
'진짜 끝난거에요?'
심장 부근에 있는 피의 마나에 물었다.
흡혈귀라면 사건이 제대로 마무리가 된건지, 그렇지 못했는지 알고 있겠지.
어,끝났어. 걱정하지마.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는 데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며 불안감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그렇게 서 있는 나에게 하연이가 다가와 안겼다.
피부의 닿는 살의 감촉, 냄새, 미묘한 몸의 떨림, 모든 것이 그녀를 하연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제가 죄송해요. 아무리 환각이어도 제가 오라버니를 베었어요."
하연이가 내 몸을 끌어 안고 엉엉 울고 있을 때 다른 애들도 나에게 다가왔다.
연하는 비교적 멀쩡해 보였지만 월하는 정신을 놓은 듯나에게 좀비처럼 다가오고 있었고 화련이는 구석에서 다리를 모으고 앉아있었다.
모든 것이 다 현실감 있었고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화련아, 너 괜찮아?"
"응? 아해냐?"
화련이가 잔뜩 처진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봤다.
그녀의 눈빛에는 왠지 모를 애처로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애처로움이 얼마나 심한지 나도 모르게 그녀를 껴안을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내가... 내가..."
화련이가 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평소처럼 힘 조절을 하고 있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평소에 느끼던 힘과 비교하며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화련이가 이렇게 까지 약해지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상대가 용사측이었던 만큼 이렇게 약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괜찮아. 네가 나한테 무슨 잘못을 하든, 나는 다 용서해 줄 수 있어."
"아해야..."
화련이가 내 몸을 꼭 끌어안았다.
뒤쪽에서 옅은 질투가 담긴 애들의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당장 화련이의 상태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됐어?"
"미안하다."
1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화련이는 내 몸을 슬 밀고 일어났다.
언젠 당당하고 강인해 보였던 화련이가 오늘은 무척이나 작고 초라해 보였다.
그 점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분명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화련이가 맞았고 세세한 습관까지 완벽하게 화련이가 맞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화련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가 어떤 모습이 되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다고 다짐했던 나였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화련이는 내가 아는 화련이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미안해 할 거 없어."
나는 화련이에게 집중하느라 더 이상한 것을 보지 못했다.
화련이가 저렇게 망가질 수 있는가, 라는 애매한 물음보다 더 확실하게 이 공간의 어색함을 증명해줄 내용을 찾지 못했다.
"일단, 밥부터 먹자꾸나.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그래."
내가 먼저 움직여서 밥을 차렸다.
흡혈귀가 챙겨줬기 때문인지 나는 비교적으로 멀쩡한 상태였기 때문에 다들 마음을 다친 상황에서 나 혼자 움직여 밥을 차렸다.
"후우..."
하연이가 밥을 먹으면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공격은... 굉장히 날카로웠네요."
"사람의 마음을 공격해 오다니, 전혀 상상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시련이 어려웠어도 우리는 다 함께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구 하나 죽은 것 같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겪은 고통은 그리 크지 않지만 그녀들이 겪은 고통은 컸고 그 고통을 단순히 환각으로만 치부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 밝은 분위기를 낼 수 없었다.
이렇게 분위기가 처질 때 마다 앞장서서 텐션을 올려줬던 화련이가 다른 애들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없었다.
우리가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선 시간이 꽤 흘러야 겠지.
"다시 한 번 이렇게 공격해 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연하의 물음이 무겁게 퍼졌다.
사람의 정신을 공격한다는 것은 아주 무서운 일이었다.
그토록 강했던 화련이가 지금은 내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두려워 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강한 공격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마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을 겪은 거겠지.'
나는 화련이를 위로해 줄 수 없었다.
나를 목표로 삼는다는 화련이가 저렇게 까지 변할 정도로 큰 고통을 겪었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그래."
연하가 식기를 거둬들이고 가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무심코 식탁을 보니 식탁이 참 넓어 보였다.
분명 다 같이 앉아있고 연하만 일어나 있는데 남는자리가 4개나 보였다.
우리집에 손님이 들어올 일도 없는 데 왜 이렇게 큰 식탁을 쓴거지?
생각이 그곳에까지 도달한 순간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내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나는 이 집에서 가장 이상한 것.
화련이의 마음이 꺾인 것 보다 몇 배는 더 말도 안되는 것을 알아차렸다.
'애들 어디갔어?'
사현이, 가연이, 아리.
애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리우잉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각성자들이 모두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절대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었는데 화련이를 달래는 데 한 시간을 쓰고 밥까지 먹을 때 까지 애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가연이와 아리가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다는 최악의 가정을 한다고 해도 각성자가 아닌 사현이는 집안에 있어야만 했다.
'없는 사람이 하나 더 있지.'
의식이 공허했다.
늘 내 가장 깊은 곳에서 존재감을 빛내며 나를 든든하게 지원해 주던 나의 형제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현수가 없어졌다.
시련을 받을 때 나와 분리되었다는 건 느낄 수 있었지만 현실로 돌아온 지금까지 현수가 없다?
실체도 없는 현수가 몬스터에 의해서 죽은 걸까?
시련을 당하면서 그의 정신이 완전히 파괴되기라도 한걸까?
모르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선 가장 확실한 것을 기점으로 생각해야지.'
리우잉, 아리, 가연이, 거기에 현수까지. 그들이 사라진 것은 최악을 가정하면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라졌다면 가슴찢어지듯 아프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런데 사현이는 도대체 어디갔을까.
걔는 비각성자인데.
"얘들아. 사현이 어디갔는지 알아?"
내가 입을 여는 순간.
모든 공간이 깨어졌다.
"너무 오래 걸린 거 아니야? 너라면 들어가자마자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몇시간이 지난 다음에서야 눈치를 채네."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긴 했을 지도 모른다.
의식적인 영역에서 거부했기에 지금까지 모르는 것 처럼 있던 거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트니 용사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어떻게든 버티고 있어."
그녀가 흡혈귀의 목소리를 따라했다.
진자 흡혈귀의 목소리와 너무나 비슷해서 가짜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혹할 뻔했다.
"어때, 나 연기 잘하지?"
"나를 위한 시련이야?"
"어, 다른 놈들은 다 사막에서 길찾고 있어. 천마 혼자서 사막을 깨고 다음 시련을 깨고 있는 중이고."
역시, 화련이가 그렇게 쉽게 망가질리가 없지.
"내 시련은 모두 끝난건가?"
"그럴리가. 가장 대단한 시련이 너를 기다릴거야. 앞으로 보게 될 게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 네 평행세계의 미래라는 것만 잘 알아 두길 바래."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시야가 암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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