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9화 〉 새 페이즈­5 (239/265)

〈 239화 〉 새 페이즈­5

* * *

화련이가 내 목을 베었다.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수도 없이 목과 몸이 분리됐다.

'대체 무슨 일이지?'

검을 들고 있는 상대가 화련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면 저 존재는 대체 누구지?

왜 내 목을 베는 거지?

수 백개의 목이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상대에 대한 추론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용사측 세력에게 끌려와 격자 무늬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몬스터를 잡고 있었다.

즉, 지금 내 목을 자르고 있는 존재는 용사측에서 만든 존재라는 것이다.

눈 앞에 있는 대상을 확정하니 그녀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목을 자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매우 짧았다.

발을 한 발 내딛고 팔을 휘두른다.

그 결과로 내 목이 잘린다.

몇 번이고 똑같이 반복됐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저게 화련이가 할 움직인가?'

화련이는 정말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고수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보여주는 움직임은 내가 알고 있는 화련이와 비교하면 상당히 모자랐다.

충분히 깔끔한 움직임이긴 했지만 글쎄?

상대가 화련이가 맞다면 저렇게 움직였을까?

'아니지, 그럴리가 없지.'

저 년은 화련이가 아니고, 화련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무언가도 아니다.

저 년과 화련이가 닮은 것은 겉 모습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베이는 것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녀가 내 목을 자르려는 순간 피의 마나를 사용해 목 근처에 방패를 만들었다.

­칵!

검이 무언가에 박히는 소리와 함께 방패가 갈라졌고 방패를 가르고도 여전히 힘이 남아있던 그녀의 검은 그대로 나의 목을 베었다.

'이 정도로는 안되나.'

방패로 그녀의 검을 막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현수도 반응이 없네.'

항상 내 의식 속에서 든든하게 존재했던 현수가 느껴지지 않는다.

현수가 사라져버린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살짝 들긴 했지만 그럴 확률은 매우 낮을 것 같다.

용사측이 굳이 현수를 없애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현수가 없다는 것에서 한 가지 더 추론 할 수 있는 것이 이 것이 내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육체 단위로 움직였으면 아마 현수도 같이 왔겠지.

굳이 현수를 끌고 들어와서 파악할 필요도 없는 것이 일반적인 육체를 가지고 수없이 목이 잘리는 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서걱!

오랜만에 내 마나를 움직여 상대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그녀는 늘 같은 각도, 같은 속도로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능력을 발현한 뒤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 마나는 잠들어 있을 차례다.

일반 마나랑 피의 마나를 같이 쓰는 방법은 없으니까.

­카각!

비스듬이 세운 방패에 그녀의 검이 부딪혀 튕겨져 나갔다.

잠깐동안 흐트러진 그녀의 몸을 향해 창을 꽂아 넣었다.

­퍼석!

분명히 창이 인간의 몸을 뚫었는데 마치 모래가 뚫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에게 일격을 허용한 그녀는 모래가 무너지듯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생각보다 쉬운데?'

이 정도는 반격하고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나 쉽게 쓰러져 내렸다.

­자기가 사랑하는 연인을 그렇게 무참히 찔러 버리다니, 당신도 참 참혹하시군요.

무미건조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사의 목소리는 확실히 아니었다. 목소리 톤도 달랐고 용사가 이렇게 까지 건조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넌 누구지?"

­당신은 용사님을 알고 계시니 친히 정체를 밝혀 드리겠습니다. 저는 용사님을 보필하는 성녀입니다.

"성녀?"

­네, 성녀요. 지금에 이르러서는 제가 성녀라는 칭호를 쓸 자격이 있는지 고민이 되긴 하지만 저는 성녀입니다.

용사도 있고 성녀도 있고, 흡혈귀도 있고.

"마왕도 있냐?"

­네, 저희 진영에서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용사랑 마왕이 같은 진영에 있다니.

말세다.

­당신은 첫 번째 시련을 통과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미련없이 죽일 수 있는 그 냉철함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런 말을 할 거면 좀 더 제대로 속이지 그랬어. 누가 봐도 천마가 아닌데 그걸 어떻게 속아?"

­그건 천마라고 불리는 존재가 너무 강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신 같이 특이점을 가지고 있거나 그녀같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완벽하게 똑같이 구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애들도 나를 보고 속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편해졌다.

­다음 시련을 진행하겠습니다.

"시련이라니, 그냥 우리를 죽이는 게 목적 아니었어?"

­다음 시련을 진행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바닥이 깨어졌다.

끝 없이 낙하하는 공간 속에서 성녀가 나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이 놈들 도대체 목적이 뭐야?'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한쪽 방향으로 수십분을 걸어간 다음에야 든 생각이었다.

분명 흡혈귀에게 우리가 이곳으로 끌려온 이유는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라고 들었다.

때문에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고 실제로 처음엔 몬스터가 나타나서 내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내 상식선에서는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시련이라는 이름으로 화련이를 닮은 무언가가 나를 공격하게 하고 그 공격을 막아내고 쓰러뜨렸더니 갑자기 다음 시련이랍시고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나를 떨어뜨려 놨다.

죽이려고 든다면 별의 별 방법으로 나를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아무것도 없는 곳을 그저 걸어가기만 하게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지?

'사람을 죽이는 데 제한이 있나?'

그들이 우리 세계로 넘어오는 데 제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곳에서 우리를 죽이는 것에도 제한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우리를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흡혈귀 측 인물들이 우리를 죽이는 것을 최대한 막고 있는 걸지도 몰라.'

어찌 되었든 그들이 우리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건 거의 확실시 됐다.

그들이 소환한 몬스터에게 공격당해 죽을 일은 있어도 아무런 이유 없이 급사하진 않겠지.

'그나저나 얼마나 더 가야 하는거지?'

피부를 태울 것 같은 무더위 속에서 끝도 없이 전진했다.

사막처럼 모래가 휘날리는 곳이라 방향을 정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능력을 통해 얼추 방향을 잡은 뒤 한쪽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는데 무언가와 마주하기는 커녕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다.

하다 못해 몬스터라도 나왔으면 마음이 좀 편할텐데 걸어도 걸어도 사막뿐이었다.

'땀은 줄줄 흐르는데 탈수는 또 안와.'

현수가 없는 시점에서 부터 어느 정도 눈치 챌 수 있었지만 이렇게 더운 사막을 계속 걸어가는 데도 몸에 이상이 없는 것을 보니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더욱 강하게 들었다.

'이 공간을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시련아니야?'

내가 이 생각을 지금까지 왜 안하고 있었지?

첫 번째 시련이라고 던져준 것은 화련이의 모습을 한 가짜를 죽이는 것이었다.

상대에 대해서 파악하는 시간이 필요해서 조금 지체 되긴 했지만 그녀를 죽이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즉, 육체적으로 이겨내는 시련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마찬 가지로 이 공간을 빠져나갈 수 있는 정신적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고통을 꾹 참고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해결책을 가능성도 있다.

끈기로 버티고 이겨내는 거지.

'근데 이건 너무 오래 걸린 거 아니냐?'

일단 자리에 앉았다.

뜨거운 사막의 열기가 내 엉덩이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들어왔지만 이 정도 온도를 버티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환각인가?'

가장 처음 든 의심은 이 공간 자체가 환각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생각이었다.

애초에 이곳이 정신적인 공간이라면 주변의 환경 정도는 얼마든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이 공간 전체가 거짓이라는 추론도 충분히 가능했다.

다만 이 공간이 환각이라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피의 마나는 다분히 파괴적인 마나였기 때문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은 많았지만 환각을 깨는 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사막을 벗어날 때 까지 계속 걷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가?'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고민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야!

더운 날씨가 나한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어디서 헛소리가 들리네.

­야! 너 내 말 씹냐?

"흡혈귀님이에요?"

심장쪽에서 울리기 시작한 소리는 갑자기 크기를 키워 내 귀를 때렸다.

­어, 나다. 어떻게든 뚫고 들어오긴 했거든? 그러니까 이제 안심하고 있어라. 어떻게든 해줄테니까.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나 알려줘요.'

­우리도 알아보고 알려줄게, 방금 뚫고 들어온 거라서 우리도 상황파악이 완전히 된 게 아니거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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