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민석의 말을 다 듣고서야 서훈은 그가 왜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유진이를 물고 늘어진다고?”
“느낌이 그래, 그쪽으로 소문이 퍼지는 것도 그렇고.”
“하, 주하린 이 미친!”
서훈이 살벌하게 이를 갈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필이면 그 여자가 목표로 삼은 타깃이 유진이었다. 당연히 자신일 거라 여긴 서훈의 반응이야, 얌전할 리가 없었다.
“네놈 반응 뻔하니까, 일부러 장난 좀 쳤다.”
“이게 장난칠 일이냐, 넌?”
날카로운 물음을 흘리듯이 한숨을 내쉰 민석이 무심하게 서훈과 눈을 마주했다. 그러고는 냉정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날뛰는 게 최종 목적인 여자야, 그거.”
“…그거야…….”
“무작정 화내서 좋을 건 뭔데?”
일순, 할 말은 잃은 서훈이 조용히 입을 닫았다. 신랄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을 모를 리 없다.
“어쨌든 조심해라, 너도.”
겨우 진정이 된 서훈에게 그는 강조하듯 다시 한번 우려를 드러냈다.
“유진이한테는 당분간 입 닫고 있어.”
“걱정 말고, 너나 잘 챙겨라.”
“알아서 할 테니까,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그래, 주하린 접근만 제대로 막아.”
언제나처럼 대화는 길지 않았다. 세세히 풀어 놓지 않아도 몇 마디로 충분히 뜻이 전해질 만큼 알고 지낸 시간이 길었다.
괜한 일에 유진이 휘말리지 않는 것.
그건 늘 사이가 나쁜 두 남자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자 그나마 몇 안 되는 공통점이기도 했다.
소위 재벌가에서 온갖 인간 군상을 보며 자란 그들에게 유진은 특별한 존재였다. 누구라도 상처 주는 꼴은 볼 수 없었다.
민석의 말이 스트레스가 됐는지, 회사로 돌아오고 서훈은 점심 먹은 게 다시 또 심하게 얹힌 듯했다.
“으윽, 진짜 병원을 가 보던가.”
반쯤 책상에 엎드린 채, 그가 고통스러운 숨을 내뱉었다.
바늘로 찌르듯이 쿡쿡 쑤시기에 곧장 소화제를 사 먹었는데 효과가 미미한 건지, 명치부터 서서히 쥐어짜는 통증이 퍼져 나갔다.
가뜩이나 이번 정기 검진도 가족들 몰래 그냥 넘어간 서훈이 아닌가. 점점 몸 상태가 이 지경이니 속이 편할 리 없었다.
혹시라도 김 비서가 눈치를 챌까. 서훈은 아픈 명치를 손으로 꾹 누르며 서랍을 다급히 뒤적였다.
‘분명히 여기 어디쯤 넣어 놨을 텐데.’
엊그제 상비용으로 사다 놓은 제산제가 보이지 않자 서훈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팍 찌푸렸다.
“…대표님?”
그때였다, 놀란 듯 입구에서 김 비서가 그에게로 급히 달려왔다.
‘이런 씹, 젠장.’
최대한 태연한 척 욕을 삼키며 서훈이 느릿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신경이 여기로 쏠려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다.
“어디 안 좋으신 겁니까?”
“별거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죠?”
그런데 또 바로 몸을 펴려 하니, 통증이 심했다. 반쯤 상체를 숙인 서훈을 본 김 비서가 눈썰미 좋게 먼저 상태를 알아차렸다.
“설마하니 또 위가 뒤집히신 거 아닙니까?”
눈썹을 슬쩍 치켜 올린 김 비서가 ‘또’라는 말을 유달리 강조하며 물었다. 최근 들어서 자꾸 얹힌 걸 돌려서 지적하는 것이리라.
짜증 나는 인간.
거기에 또는 왜 붙냐고, 또는. 애써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키며 서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쓰게 웃었다.
“뭐, 조금 안 좋긴 한데.”
“약은 드셨습니까? 없으시면 제가 바로 나가서…….”
“먹었어요, 효과가 별로라서 문제지.”
억지로 웃는 얼굴로 김 비서를 마주 본 서훈은 가뜩이나 얹힌 속이 한층 더 뒤틀리는 착각이 들었다.
딱히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라 김 비서가 불편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서훈은 못내 그 사실이 신경 쓰였다.
확실히 조금 상황이 곤란하다.
괜한 소리가 새어 나가는 건 원치 않았다. 얼굴에 그게 드러난 걸까. 걱정 마시라며 김 비서가 그를 안심시키듯 먼저 말문을 열었다.
“함부로 쓸데없는 말 흘리진 않습니다.”
“기분 상했다면 미안합니다, 김 비서.”
내가 그런 얼굴이었나. 뒤늦게 표정을 다잡으며 서훈이 쓰게 웃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반대의 입장이라면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간혹 대표라는 자리가 그랬다. 생각 없이 던진 몇 마디가 아래 직원들에겐 타격이 큰 경우가 종종 있었다.
“병원 예약이라도 잡을까요?”
“됐어요, 그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통증이 꽤 심해 보이시는데.”
걱정스러운 기색을 한껏 내비치는 김 비서에게 서훈이 찌푸려진 미간을 다잡으며 작게 웃었다.
“하아, 김 비서는 그게 다 보입니까?”
말을 할수록 아픈 명치가 더 심하게 쿡쿡 쑤셨지만, 서훈은 최대한 태연하게 굴었다.
“비서팀에도 위가 안 좋은 직원이 있어서.”
“하하, 그래서 바로 눈치챈 건가?”
“아무래도 자주 본 모습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새삼 그 말이 서훈은 가슴 깊이 와닿았다.
그럴 수밖에.
지금 김 비서는 대표인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척하며 은근슬쩍 비서팀의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지적하는 셈이었다.
* * *
김 비서의 태도는 제법 강경했다.
당장에라도 놓친 검진을 예약하겠다는 단호함을 본 서훈이 버티다 못해 스스로 먼저 내과를 찾아올 만큼.
“주서훈 씨,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간호사의 호명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복도를 가로지르며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회사에서 나올 때 소화제와 위를 가라앉히는 지산제까지 넘겨서인지 그나마 속은 좀 편했지만, 명치끝으로 미약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가끔 방문하는 내과가 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위염을 한 번 호되게 앓고 난 뒤로 유진 모르게 서훈이 종종 찾는 병원이기도 했다.
달―칵.
진료실로 들어간 뒤, 기다리는 의사를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며 서훈이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어서 오세요, 한동안 통 안 오시더니.”
서훈을 기억하는 듯 의사는 반갑게 마주 인사를 했다.
“최근에 자꾸 얹혀서요. 속도 좀 쓰리고.”
“언제부터 그런 증상이 생기셨죠?”
모니터로 서훈의 증상을 차분히 보며 의사가 무언가를 확인하듯 의사가 시기를 물었다.
“글쎄요, 정확히는 저도 잘…….”
“대충이라도 괜찮아요, 어림잡아서 말해 주시면 됩니다.”
“1년까진 안 됐고, 심해진 건 몇 달 전쯤?”
아마 그즈음인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은 듯 모호하게 웃으며 서훈이 곤혹스레 미간을 찡그렸다.
‘위염이 재발한 것 같습니다. 그것도 꽤나 증상이 심한데.’
‘심하다면 많이 안 좋은 겁니까?’
‘글쎄요, 소화 불량이나 속 쓰림, 어지럼증도 위염의 한 증상이니까요.’
‘아, 위염인데도 어지럼증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 증상이 나오는 분도.’
진료실을 나서기 직전, 의사와의 대화를 곱씹으며 서훈이 차의 시동을 걸었다. 어쨌거나 위염이라니, 그나마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난처해진 서훈이 내비게이션의 시간을 확인했다. 다른 날보다 퇴근하기에 시간이 너무 이른 탓이었다.
“뭐, 가끔은 괜찮겠지.”
적당히 김 비서에 관한 핑곗거리를 떠올리며 서훈이 입꼬리를 쓱 올렸다. 오랜만의 이른 퇴근이라, 기분이 꽤 좋았다.
“김 비서님이?”
“그래, 약간 미안해하는 눈치더라고. 일부러 나도 빨리 나왔어.”
“잘했어, 그럴 땐 상사가 눈치껏 좀 빠져 줘야지.”
역시나 김 비서라는 핑계는 유진에게 제법 잘 먹혔다. 다른 때처럼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도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적당히 넘어가고서야, 서훈은 마음 편히 유진과 함께 저녁을 차렸지만.
“요즘 그렇게 일이 많아?”
반찬을 내려놓던 유진이 불쑥 회사에 관해 물었다.
“어? 어, 조금 그러네.”
“조금이 아니잖아. 맨날 늦으면서.”
“확실히 요즘 자주 늦었지?”
서훈이 당혹감을 감추며 태연하게 되물었다.
“자주 정도가 아니잖아.”
“으음, 그랬나?”
“한동안은 너무 빨리 퇴근해서 탈이더니.”
어쩐지 뒤통수가 조금 따가웠다.
“대표가 좀 그래. 바쁠 땐 또 정신없이 바쁘고.”
뻔히 걱정하는 마음을 알면서도 서훈은 대충 얼버무리듯 넘기며 식탁으로 재빨리 남은 그릇을 옮겼다.
가뜩이나 유진의 감정 기복이 심해지며 종종 까칠해지고는 했다. 애써 숨긴다고 그 불안한 모습을 늘 곁에 있는 서훈이 모를 리 없었다.
그저 자신이 모르기를 바라는 눈치라서 원하는 대로 해 줄 뿐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런데 혹시 말이야, 혹시.”
“어? 혹시 뭐?”
갑자기 뜨끔해진 서훈이 애써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유진과 눈을 마주하며 되물었다.
뺨으로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무언가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유진이 빤히 쳐다보는 탓이리라.
“눈에 힘부터 좀 풀어 주시죠, 부인님.”
“내가 뭘?”
“아주 찌르겠는데? 어디 서방님 무서워서 살겠나.”
잘못한 것도 없이 양심이 쿡쿡 찔리자 괜히 서훈은 더 호기롭게 말장난을 걸었다.
“됐거든요, 누가 누구 서방님이야?”
“그거야 내가, 서유진의.”
“웃기지 마셔. 서방님 안 삼아줄 건데?”
서유진 은근히 맹꽁이라 거짓말은 눈치도 잘 못 챘었는데. 확실히 함께 살면서 제법 눈치가 빨라진 것 같았다.
“혹시 내가 바람났을까 걱정했어?”
장난으로 툭 뱉은 것까진 좋았는데, 거기서 바람 얘기가 왜 나왔을까. 주서훈 이 미친 새끼.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반이나 갔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유진의 반응은 순식간에 바로 드러났다. 그것도 상상하던 그대로 너무 쉽게.
“뭐야, 주서훈 바람났어?”
“나 바람 안 났는데?”
“웃기지 마. 지금 찔려서 실토한 거잖아.”
추궁하는 눈초리로 콧방귀를 뀐 유진이 삐딱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장난이야, 알면서 그래.”
“원래 도둑이 제 발 저린댔어.”
아무래도 말실수한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며 서훈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너 놔두고 다른 여자를 왜 만나. 안 그래?”
“자기가 먼저 바람 어쩌고 했으면서.”
“그러니까, 내 말의 요지는 그게 아니라…….”
우선 핵심을 짚고 넘어가려던 서훈의 말은 유진에 의해 다시 틀어 막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