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28화 (28/67)

❦제28화

“확실히 조금 이상한데.”

“끄응, 또 뭐가.”

골이 아프다는 듯 서훈이 제 미간을 손으로 탁 짚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요즘 따라서.”

“……?”

“맞아, 최근에는 유독 늦게 들어오는 날도 많았어.”

눈을 도르륵 굴리며 그녀가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또 수긍한 듯 홀로 끄덕이기도 했다.

“…저, 진아?”

그제야 난감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그가 다급히 유진을 불렀다.

“흐음, 내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서유진? 진아?”

“너무 주서훈을 믿기만 한 거야.”

이미 유진에게는 들리지 않는 눈치였다.

저건 장난으로 꺼낸 말을 왜 혼자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괜히 말 꺼낸 사람 더 무안해지게.

식탁에 앉은 서훈이 수저를 들어 올린 채, 유진을 보다 못해 기어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장난으로 던진 말에 진심으로 받지 말자, 서유진.”

“정말 찔릴 짓이라도 했나 봐?”

“안 했어, 진짜 안 했다니까. 사람 말을 좀 믿어.”

“뭐, 그렇다고 치고.”

“억울해, 나 완전 결백하다고.”

그 와중에도 서훈은 넘어가지 않는 음식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밖에서라면 유진이 보지 않으니 상관없지만, 집에서는 무리였다.

‘끄응,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말 한 번 잘못 꺼냈다가 이게 웬 고생인지 모르겠다.

그는 당분간 이 말도 안 되는 놀림이 이어질 것만 같은 예감과 함께 손바닥으로 진득한 땀이 차올랐다.

* * *

재미가 들렸는지 유진의 말장난은 꽤 오래 이어졌다. 식탁을 다 치우고도 멈추지 않았으며 거실로 나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장난기가 담긴 연인의 고집스러운 눈초리가 제법 매서웠다. 오늘따라 서훈은 거실 소파가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바가지 긁는 결혼 10년 차 와이프가 이것보다 더 무서울까. 그건 좀 웃긴 것 같기도 하고.

“……풉.”

입을 막으며 웃음을 삼켰지만, 유진에게 곧장 들키고 말았다.

“뭐야, 갑자기 왜 웃어?”

“아냐, 아무것도.”

소파에 비스듬히 팔을 걸친 채, 바라보는 유진의 시선이 한층 가늘어졌다.

“뭔데? 어?”

눈매가 제법 불순하다. 저건 영락없이 다시 장난칠 건수를 노리는 꼬맹이의 그 느낌이 아닌가.

또다시 말려들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내 서훈이 휙 시선을 돌려 화면을 보는 척 대놓고 시치미를 뗐다.

“저거 무슨 프로야? 상당히 재밌는데.”

“주서훈, 이럴 거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넌 안 웃겨?”

은근히 노려보는 시선이 뺨을 찔렀지만, 서훈은 뻔뻔하게 화면을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나마 유진의 뚫어질 듯한 시선은 오래지 않아, 다시 거둬졌다. 자꾸만 말을 돌리는 서훈에게 큰 호기심이 동하지 않은 눈치였다.

금세 유진은 그를 따라 예능프로가 한창인 화면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묻고 싶은 질문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유진이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엔 계속 회사가 바빴잖아.”

“…약간 정신없기는 했지,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해서. 언제쯤 한가해지나.”

돌고 돌아서 유진이 꺼낸 질문은 걱정과 궁금증이 겹친 느낌이었다.

“글쎄…….”

언제쯤이라. 이걸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서훈은 진료실에서 의사가 꺼낸 말을 떠올리며 미간에 옅은 주름을 잡았다.

서훈이 나가기 전, 의사는 증상이 적진 않으니 조만간 간단한 검사를 몇 가지 해보자며 권유했었다.

‘예약은 오늘 하고 가면 되는데 시간은 괜찮으십니까?’

‘하루 정도는 별문제 없습니다.’

‘잘됐네요. 그럼 최대한으로 빨리 잡죠. 만약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의사는 단순 위염이라고 진단 내렸지만, 그 마지막 말 때문인지 서훈은 영 찜찜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검사해 보면 답이 나오겠지.’

어쨌거나 의사의 조언대로 검사할 생각이기는 했다. 그럼 유진에게도 괜한 걱정시키지 않고, 해프닝으로 끝날 테니 말이다.

서훈이 검사를 예약해둔 날을 계산하며 보일 듯 말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으음, 다음 주부턴 그나마 한가하겠는데?”

“이번 주 내내 늦는다고?”

유진이 티 나지 않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럴 리가, 이제 많아야 한두 번일걸.”

급히 제 말을 정정하며 서훈이 억울한 듯 쓰게 웃었다. 일찍 퇴근한다고 눈치 주더니, 이젠 늦는다고 구박이었다.

“저번엔 또 퇴근이 빠른 것도 싫다면서.”

“누가 싫대? 적당히가 중요하잖아.”

“어렵네, 그놈의 적당히는.”

“그땐 하루가 멀게 조퇴했으니 그런 거였고.”

새초롬한 눈길을 마주하며 서훈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튼, 너 진짜 수상해.”

“수상할 것도 많다.”

“원래 그렇다니까. 설마가 잡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

일순, 할 말을 잃은 듯 그가 유진을 빤히 주시했다. 그러자 가늘어진 눈이 느슨하게 착 접히며 유진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거 개그야?”

“응, 나름 하이 개그였는데.”

대놓고 개그였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할까. 대강 수긍하며 넘긴 서훈이 목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몰래 삼켰다.

“무뚝뚝하다니까, 그냥 좀 웃어 주면 좀 좋아.”

그게 서운했는지 유진이 불만스러운 듯 작게 투덜거렸다.

반응 없어서 삐진 눈치다. 서훈은 당황하는 대신, 이번엔 평소처럼 달래듯 유진의 말을 가볍게 받아쳤다.

“그래, 그래. 짜증 나는데 과자라도 하나 줄까?”

“이왕이면 비싼 걸로.”

굳이 또 비싼 걸 찾는다. 아무 과자나 직접 꺼내 먹으면 될걸.

만사가 귀찮은 성격이면 웃어넘기겠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 생긴 행동이지만, 매번 유진은 그의 정신을 쏙 빼놓고는 했다.

“얼른 과자 줘, 주 집사.”

“갑자기 또 무슨 집사 타령이야, 이 아가씨야.”

금세 유진이 쭉 내뻗은 손을 흔들며 서훈을 재촉했다.

“됐으니까, 얼른 과자나 내놔.”

이럴 땐 참 잽싸다. 거실에서 몇 걸음만 더 움직이면 과자가 있는 선반까지 가고도 남을 텐데.

서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선반에서 꺼낸 과자를 유진에게 건넸다.

그제야 기분이 조금 풀어진 건지, 헤실헤실 웃었다. 조금 뒷맛이 씁쓸했다. 이것도 서유진표 장난 중 하나인 모양이다.

“그래, 다른 남자도 아니고 우리 훈이가 수상할 리가 없지.”

“이제 와서 그런 말, 안 고맙거든.”

“그래도 오해받는 것보단 낫잖아, 안 그래?”

“모르겠다, 나도.”

포기한 듯 서훈이 한숨을 푹 내쉬며 털썩 앉았다.

직업을 그나마 프리랜서로 잡아서 망정이지, 들쑥날쑥한 저 성격으로 일반적인 회사라면 안 봐도 뻔하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잘렸을 거다.

서훈은 새삼 제 연인이 쉬운 여자가 아님을 깨달으며 남은 과자를 유진에게 다시 또 건넸다.

* * *

검사는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바로 결과가 나왔다.

서훈이 간 병원은 동네의 작은 의원이었고, 검사는 피를 뽑는 몇 가지의 혈액 검사와 수면 내시경이 전부였다.

결과는 서훈이나 의사의 걱정보다 나쁘지 않았다.

“자주 얹히는 것도 원인은 위염 쪽이 맞네요.”

“다른 문제가 아니라요?”

“예, 신경성으로 보입니다만, 최근에 스트레스가 심하셨다든가.”

“글쎄요, 딱히 그런 건 없었는데.”

치료를 길게 해야겠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서훈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며 의사는 소견을 냈다. 서훈에게는 그나마 위로가 되는 말이었지만.

“여기서 더 심해지면 위궤양으로 갈 수 있으니, 명심하시고요.”

의사는 마지막까지 걱정하듯 서훈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금세 약국에서 처방된 약을 기다리는데 커피 자판기가 눈에 띄었다. 습관처럼 서훈은 그쪽으로 가다 말고, 의자에 도로 앉았다.

이래서 습관이라 무서운 거다.

난감하게 미간을 찡그린 채, 서훈이 쓰게 웃었다. 커피도 조심하라고 들었는데 자판기를 보니, 습관처럼 발이 먼저 향한 것이다.

“궁금한 건 없으시죠?”

“예, 뭐 딱히.”

약사에게 간단히 설명을 들은 뒤에야 그는 나른한 정신을 수습하며 약국을 나섰다.

수면 내시경의 여파 때문일까. 코끝으로 시린 바람이 스쳐 지나자 몽롱하던 정신이 그나마 조금 또렷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다행이라며 서훈은 안도했다.

어쩌면 그래, 위염이라는 말을 듣고도 조금 무서워진 건지 모르겠다. 큰 병이면 어쩌나, 괜한 조바심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하아, 벌써 겨울이 코앞인가.”

작게 달싹이는 잇새로 뿌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허공으로 소리도 없이 흐트러지는 광경을 주시하며 서훈이 슬쩍 입꼬리를 휘었다.

본능적으로 겁을 집어먹은 건가. 하긴 서유진 혼자 두고 자신이 죽을병이라도 걸리면 정말로 큰일이었다.

서유진이라면 어떨지 뻔히 보인다.

아픈 사람 붙들고 밤새 울기만 할 텐데. 불쑥 솟구치는 상황을 덧그리며 서훈이 거리 한복판에서 작게 소리를 죽이며 웃었다.

“점심은 지났는데 아직 자려나?”

괜히 더 기분이 좋아진 그가 핸드폰으로 불쑥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엔 자는 날이 많아서 웬만해서는 문자를 더 선호하는 서훈이었다.

그래서일까.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금세 의아함이 담긴 유진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한마디만 들어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서유진의 목소리가.

―…주서훈?

“혹시 자고 있었어?”

서훈은 흘러나오는 제 목소리가 지나치게 부드럽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하암, 무슨 배부른 소리야. 일하는 중이었어.

“아침에도 그 상태였잖아, 아직 안 잤어?”

―정확하게는 아직 못, 잔 거지.

“몇 시간이라도 눈 좀 붙이라니까, 사람 말 좀 듣지.”

기분 좋은 듯 풀어진 서훈의 미간 위로 옅은 주름이 파였다.

―하던 부분만 마무리하고.

“그 말도 내가 서유진한테 가장 많이 듣는 멘트인데.”

대강 넘기라며 유진이 불만을 작게 툴툴거렸다. 걱정스럽게 혀를 차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서훈은 웃고 말았다.

뭐라고 해 봤자 들을 리도 없고.

서훈은 스피커 너머 목소리만 듣고도 유진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졸린 걸 참으며 꾸역꾸역 일을 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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