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그거 오늘 마감은 아니지?”
―어? 으응, 오늘은 아냐. 그거 오늘이면 나 죽어.
그래도 혹시 몰라, 걱정스럽게 묻자 오히려 기겁하며 유진이 정색했다.
“설마하니 내가 널 죽게 내버려 둘까.”
―그건 좀 오버스러운데.
“죽으면 안 되지. 서유진 없이 나 어떻게 살라고?”
장난처럼 스친 연인의 말을 짓궂게 되돌리며 서훈이 투덜거렸다.
마감에 치여 죽는다고 하질 않나, 아파도 죽는다고 하질 않나. 습관처럼 유진은 섣불리 죽는다는 말을 내뱉고는 했다.
괜히 듣는 사람 마음 아프게.
―입에 침은 바르고 하는 말이야? 나 그 거짓말 믿어도 돼?
“어라, 서유진 나 못 믿나 보네.”
이건 좀 속상한데. 전화에 대고 서훈은 집에서나 하던 것처럼 소리 죽이며 작게 속삭였다.
―내, 내가 또 뭘.
뒤늦게 아차 싶었던 건지, 잠잠하던 유진이 몇 초 만에야 다시 말문을 열었다.
“섭섭하게, 오늘 일찍 끝나서 외식이라도 할까 했더니.”
―어? 너 일 벌써 끝났어?
서훈은 잠깐 사이, 확 달라진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진 스트레스로 한껏 까칠하던 말투가 눈 녹듯 말끔히 사라졌다.
―그래서 언제 오는데?
“…….”
―아니다, 여기까지 오래 걸리면 내가 나갈까? 우리 저녁은 뭐 먹어?
기분이 좋아진 건지, 스피커 너머에서 연신 유진의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때아닌 애교가 오히려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평소에도 저러면 좀 좋을까. 은근히 아닌 척해도 서유진 천년 묶은 구미호 설에 한층 더 심증을 굳힌 순간이었다.
동네까지 어림잡아 30분인데 시간에 맞춰 나오라고 할까.
느긋하게 운전을 하며 서훈이 흘깃 시간을 확인했다. 날이 꽤 추운데 유진이 허술하게 입고 나올까, 괜한 걱정이 차올랐다.
“30분 정도 걸리겠다. 근처로 나올래?”
―나갈게, 오랜만에 주서훈이 사는 밥이야?
“오랜만은 아니잖아. 저번에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내가 돈 낸…….”
―크흠! 큼! 어우, 목이 칼칼하네, 감기가 오나.
일부러 장난치듯 서훈이 지난주를 들먹이자 스피커 너머로 연신 유진의 헛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었다. 시치미를 뚝 떼며 언제나처럼 유진은 그냥 얻어먹을 생각인 듯했다.
‘뭐, 어차피 사 주려고는 했는데.’
가난한 그림쟁이라는 타이틀 하나로 몇 년째 어지간히도 우려먹는 연인을 조금 골려 주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다.
물론, 그쯤은 만난 뒤에 해도 그만이겠지만.
* * *
꼬박 한 시간 만에야 오후 회의가 끝났다. 유독 피곤함이 짙게 밴 얼굴을 쓸어내리며 서훈이 먼저 회의실을 나섰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서훈의 뒤로 김 비서가 수족처럼 곧장 따라붙었다.
“바로 올라가시겠습니까?”
“그러죠, 오늘 컨디션이 영 별로야.”
안건 하나 때문에 다른 날보다 회의 자체가 길어진 만큼 더 지치는 느낌이었다.
물론, 회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조금 나아진 위염이 심해질까, 식습관을 바꿨더니 체력이 쉽게 지치는 것도 같았다.
“하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피곤함을 드러내며 그가 별일 없었는지를 김 비서에게 넌지시 물었다.
“하나 있기는 했습니다만.”
확인차 건넨 질문인데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서준에게서 연락이 왔었다는 소식이었다.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예, 회의 끝나면 연락 달라고 전하셨습니다.”
의외인 듯 서훈이 느릿하게 제 턱을 문질렀다.
“흐음, 갑자기 무슨 일로…….”
서준이 먼저 그에게 연락하는 경우는 지금까지도 몇 번 없었다. 극히 드물다는 뜻이기도 했다.
주하린 문제인가.
번뜩이는 속내를 드러내듯 돌연, 서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딱히 그것 말고는 서준이 연락할 이유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주하린하고 결혼은 왜 하냐고.
여전히 그는 서준에게 불만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벌써 서훈의 형이 그 여자와 결혼하고도 반년이 다 되어 가는 중이었다.
알아서 해결할 테니, 기다리라는 약속도 여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소리였다.
‘뭐, 통화해 보면 알겠지만.’
가볍게 결론을 내린 서훈이 대표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뒤따라 들어오려는 김 비서를 물린 뒤, 곧바로 서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 시간 좀 내라.
언제나처럼 그는 인사 한마디 없이 시간을 내라, 서훈에게 당당히 요구했다.
“잠깐이야 상관은 없는데, 왜.”
―왜겠냐, 할 말 있으니 부르는 거지.
“그러니까, 그 할 말이 뭐냐고.”
―전화로 할 말이었으면 부르지도 않았어.
재차 따져 물어도 서준은 나오기나 하라는 식이었다.
“알았으니까, 장소나 정해.”
짜증을 억누르며 한 시간 뒤쯤 만날 장소를 결정한 뒤, 서훈이 신경질적으로 손에 쥔 핸드폰을 거칠게 책상으로 내렸다.
더 물어봤자 만나기 전엔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대놓고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며 서훈은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서준은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데.”
빈자리에 앉으며 불퉁하게 묻자 조용히 차를 마시던 서준이 반응하듯 눈썹을 휙 치켜올렸다.
“넌 형한테 인사도 없어?”
“누구는 매번 인사하나 봐? 언제부터 격식 따졌다고.”
“여기 밖이다. 보는 눈 생각 안 해?”
쓸데없이 남의 시선 의식하기는. 서훈이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예, 예, 그놈의 애 취급은.”
“주서훈, 내가 장난으로 불러낸 것 같아?”
날카로워진 시선을 보며 서훈이 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서준은 커피가 나오고서야, 말문을 열었다.
“곧 이혼한다.”
무심한 목소리가 마치 상관없는 일을 말해주는 뉘앙스가 아닌가.
“그거 말이야, 진짜 하기는 해?”
“무슨 헛소리냐, 그건.”
“하도 소식이 없길래 난 또 생각이라도 바뀐 줄 알았지.”
서훈이 들어 올린 커피를 다시 밑으로 내렸다.
“작업이 오래 걸렸을 뿐이다, 거의 끝났어.”
“그 작업, 이쪽은 들은 것도 없어.”
이제 와서 뭐 어쩌라고.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그가 표정을 싹 굳힌 채,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지만.
“조만간 알게 될 거다.”
서준은 그 한 마디를 툭 뱉으며 느긋하게 커피를 마실 뿐이었다.
덩달아 손에 쥔 잔을 들어 올렸다. 굳이 다 듣지 않아도 저 말뜻을, 서준의 작업에 관해서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나마 더는 거슬리는 소문이 귀에 들어오지 않으니, 서훈도 참을 만했다. 결혼과 함께 주하린이 모든 행동을 딱 멈춘 것이다.
‘서유진이 몸으로 널 낚아서 집안에서 받아 줬단다.’
‘씹, 그딴 헛소리를!’
‘하나 더 있어. 주하린을 거절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고 돌더라.’
처음 민석에게 그 소문을 전해 들었을 땐 당장에라도 그 여자의 멱살을 틀어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과 다른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악의적인 의도가 뻔히 다 보일 정도였다.
‘기다려, 알아서 해결해 줄 테니까.’
‘결혼하는 형을 뭘 믿고?’
‘아무튼, 조금만 참아. 몇 달 안에는 끝나.’
‘…몇 달, 소문이 더 퍼지면 나도 장담 못 해.’
‘알았다, 그건 내 선에서 손 써보마.’
그때도 화가 난 서훈을 그가 붙들고 말렸었다. 따로 계획이 있으니 조금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어쨌건 이제 이혼인가?”
“그래, 예상보다 네 반응이 까칠하긴 했지만.”
조금 전 일을 들먹이며 서준이 픽 웃었다.
“주하린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고?”
“글쎄다. 태풍이 크게 한 번은 몰아치겠지, 우리도.”
“꿈쩍도 안 하냐, 본인 일인데.”
신랄하게 장난을 치며 서훈이 느릿하게 팔짱을 꼈다.
어차피 자신하고는 상관없었다. 서유진을 건드린 대가만 확실하게 돌려줄 수 있으면 그만이다.
뭐 사실 남의 집 불구경만큼 재밌는 것도 없지만, 그 여자가 순순히 이혼 도장을 찍어 줄 것 같진 않은데.
“네놈이 알아서 어쩔 건데.”
궁금한 듯 운을 띄우자 서준이 손등 위로 느슨하게 턱을 걸쳤다.
“말했잖아, 그냥 사소한 호기심이라고.”
“주하린과 합의를 할 필요가 있나?”
굳이 사정 봐줄 필요는 없지. 가볍게 덧붙이는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애당초 그는 주하린과 웃으며 이혼할 생각 따위는 없었던 거다.
그제야 이해한 듯 서훈이 조용히 잔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그를 따라 서준도 제 몫의 커피 잔을 위로 들었다.
“그보다 너희 두 사람은 여전하고?”
“우리야 뭐, 늘 비슷하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서훈이 가볍게 받아쳤다.
“그래, 아직도 안 벗겨진 콩깍지인데 오죽할까만.”
“알면서 뭘 일일이 물어, 귀찮게.”
“예의상 물어봤다. 그래도 너희한테는 내가…… 아, 잠시만.”
불현듯 그가 재킷 안쪽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급한 전화라도 온 모양이라, 넘기려던 서훈의 시선이 눈앞의 낯선 주서준에게로 향했다.
화면을 본 그의 얼굴에서 잠깐 사이, 여유가 말끔히 사라졌다.
“마여리?”
서훈에게도 익숙한 이름 하나를 읊조리며 그가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 * *
핸들을 쥔 서훈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웃었다. 먼저 카페를 나선 제 형의 돌발 행동이 그만큼 황당했던 것이리라.
‘여리 누나 전화야?’
‘그래, 오늘은 나 먼저 가야겠다. 여리가 뭘 좀 부탁해서.’
‘갑자기 무슨 부탁을 했길래 그래?’
‘네가 그것까진 알 것 없고.’
잡을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서준은 그대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불과 전화를 받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래도 여리 누나가 한국으로 들어오는 눈치였다. 픽 웃으며 서훈이 삐뚜름하게 고개를 꺾었다.
“주서준 이제 발등에 불 떨어졌네.”
서훈은 어렴풋한 기억 너머로 마여리라는 이름의 한 여자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건, 장례식이었다.
서준의 오랜 친구이자 서훈도 잘 아는 형, 그리고 여리의 남편이기도 한 남자의 빈소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오랜 친구의 부인이면서 그녀 또한 서준의 소꿉친구라는 사실이었다.
그래, 서훈이 기억하기로 마여리는 주서준에게 꽤 특별한 존재였다.
“본인이나 잘할 것이지, 누구한테 훈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