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40화 (40/67)

❦제40화

“훈아, 주서훈?”

막힌 문틈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유진의 불안한 떨림이, 심하게 요동치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져 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절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유진 앞에서는 티를 내면 안 된다.

결심하며 서훈이 급히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낸 뒤, 태연하게 늦은 대답을 꺼냈다.

“어! 진아! 나 불렀어?”

“너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냐, 그런 거.”

가뜩이나 요새 유진의 상태도 조금 수상쩍었다. 한 번씩 악몽을 꾸고, 이유도 없이 불안함을 내비치기도 했으니 말이다.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뭐야, 우리 마누라 내 말도 안 믿어 주네.”

역시나 쉽게 믿지 않는 목소리다.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쓰게 웃으며 서훈이 일부러 더 크게 소리를 높였다.

“갑자기 배탈나서 그래, 뭘 부끄럽게 일일이 묻고 그러냐.”

“아, 그런 거였어?”

재차 말문을 열던 서훈이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아직 다 잦아들지 않은 통증이 바늘로 쿡쿡 찌르듯 퍼져나가는 탓이었다.

겨우 참으며 명치끝을 꾹 누른 채로 서훈이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거칠게 짓씹었다.

문으로 가로막혀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서유진 상태가 어떨지. 울 것처럼 구겨져 흔들리고 있을 눈동자가,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나 이리저리 불안하게 동동 구를 걸음까지도.

“그런데 너 아까는 왜 얼굴까지 창백해져서…….”

여전히 불안한 듯 유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것 봐라, 지금도 저 여자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목소리가 아닌가.

“나 괜찮으니까, 진아.”

“…알았어.”

“거실에서 좀 기다려… 금방 나갈 테니까.”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걸까. 차마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한 물음을 삼키며 그는 저 불안이 언제부터였는지를 천천히 곱씹어갔다.

기억도 또렷하지 않은 어느 날부터 유진의 감춰진 불안을 서훈은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악몽 꾸는 걸 처음 알아차렸을 때가…….’

특별할 것 없는 새벽녘이었다.

잠결에 주방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 침대로 가던 서훈에게 슬픔이 짙게 밴 유진의 잠꼬대가 들렸다.

‘…아, 서훈아….’

울먹이듯 새어 나온 소리는 그의 이름이었다. 무슨 꿈이기에 잠결에도 제 이름을 저리 서글프게도 부르는 걸까 싶었다.

‘…쯧!’

나직이 혀를 차며 그는 유진이 누운 방향으로 몸을 돌린 채, 손을 올려 잠든 연인의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쓸어 넘겼다.

다른 이름이었으면 당장 깨워서 화를 냈을 것을. 하필이면 잠결에 튀어나온 이름이 자신이라니.

서훈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괜히 안쓰러운데도 기분이 꽤 좋았다. 꿈에서조차 그와 함께인 연인이 묘한 만족감을 충족시켰지만.

‘…안 돼, 아니야… 가지, 가지 마.’

이어지는 잠꼬대에 그 미소는 어디론가 돌연, 사라지고 말았다.

이별을 말하고 있었다.

잠결에도 유진에게선 두 사람의 이별을 암시하는 듯한 말이 끊길 듯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디… 가… 버리지… 흐윽….’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뺨으로 손을 내렸다. 손끝으로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지만, 서훈은 그게 눈물인 걸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알아차렸다.

도대체 뭐가 널 그렇게 아프게 하는 건데. 왜 자꾸 속으로만 쌓아 두냐고.

사실은 진작 알아차리고도 묻지 못한 물음이, 수없이 속으로만 삼킨 지난 일들이 서훈은 어렴풋이 떠올랐다.

“훈아, 주서훈?”

다시 또 떨리기 시작하는 부름에 그가 쓰게 웃었다. 이래서 아픈 모습을 더 보여줄 수가 없다고 여기면서.

“서훈아, 왜 대답이 없어?”

“별일, 윽, 별일 아니야. 거실로 가 있으라니까.”

그제야 멀어지는 기척이 들리자 내내 참았던 숨을 쏟아내며 서훈이 아픈 명치를 더 세게 눌렀다.

“…쯧.”

시간을 쪼개서라도 조만간 검사해보긴 해야 할 것 같았다. 힘겹게 욕조 귀퉁이에 걸터앉으며 그가 짙은 수심이 밴 속내를 드러냈다.

* * *

오랜만에 민석과 저녁 약속이 잡혀 있었다. 연우와 넷이 저녁이라도 먹을 생각이었지만, 유진에게 불쑥 급한 수정건이 들어오고 말았다.

“약속 취소할까?”

“이왕 잡은 약속인데 가서 밥이나 먹고 와.”

“혼자 가는 건 별로 안 내켜서…….”

미간을 찡그리며 서훈이 귀찮다는 듯 말끝을 길게 늘였다.

“가끔은 둘이 알아서 좀 어울려 봐.”

“뭐, 따지고 보면 원수에 더 가깝지 않나?”

서훈이 픽 웃으며 나민석과 자신의 관계를 유진에게 알려 주듯 가볍게 정의 내렸다.

친구보다는 원수인데도 미운 정이 무서운 거라면서.

“알기는 하네, 만나기만 하면 눈에 불을 켜고 싸우더니.”

“성격이 안 맞아. 딱 봐도 상극이잖아?”

서훈이 억울하다는 듯 상극이라는 단어를 강조했지만, 딱히 그 효과는 없었다.

“거기에 그 말은 왜 갖다 붙여?”

진짜 상극인 사람들이 억울하겠다며 유진은 가볍게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서훈이 가기 싫은 것도 당연했다. 연우와 친한 것도 아니고, 굳이 유진이 없는 민석과의 저녁이 반가울 리도 없었지만.

“연우도 불러놨잖아, 그냥 다녀와.”

“됐어, 너 혼자 저녁까지 먹게 하는 것도 안 내켜.”

“저녁 먹기도 글렀어, 뻔히 알면서.”

그냥 들어오는 길에 저녁거리나 포장해 달라, 덧붙이며 그녀는 나가기 싫어하는 서훈을 반쯤 억지로 내보냈다.

그렇게까지 등 떠밀어서 내보내는데 버틸 재간이 있나.

괜히 너 때문에 신경 쓰여서 일이 더 안 되겠다. 은근히 투덜거리는 소리에 그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너 혼자 오냐?”

“그러게 말이다, 우리끼리 즐겁게 저녁 먹을 사이는 아닌데.”

혼자 나타난 그가 의외인 건 민석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래서 서유진은 어디 버리고 왔어?”

민석이 거침없는 질문을 던졌지만, 평소와 달리 서훈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오늘 못 나와, 급한 수정 건이 생겨서.”

“…그놈의 수정은 또 하냐?”

“몇 시간 전에 연락을 줘서 방법이 없더라고.”

직원이 놓고 간 메뉴판을 대강 훑어 넘기며 대답하자 민석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꼴랑 몇 시간? 좀 심하잖아.”

“내 말이 그거다. 사람을 기계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거기가 원래 그렇게 진상이냐?”

“대충 비슷해. 유독 매너라곤 없는 곳이니까.”

자초지종을 듣던 민석도 서훈만큼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나직이 혀를 찼다.

“업체가 거기 하나뿐이야? 넌 또 그걸 왜 가만히 놔둬?”

“나라고 설득을 안 해봤겠냐고.”

자신이 더 답답하다는 듯 서훈이 와락 인상을 썼다. 따지고 보며 유진과 함께 일하는 업체가 서훈의 눈엔 다 진상으로 보일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약간의 필터가 낀 탓이겠지만, 어쨌거나 좋게 보이진 않았다. 과한 요구와 반복되는 수정은 누구라도 지치기 마련이었다.

“흐음, 문제는 본인이라는 건가?”

하긴 서유진 고집이야 장난 아니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수긍하듯 민석이 쓰게 웃었다.

“거봐라, 너도 수긍할 정도인데 나라고 다를까.”

“은근히 고지식하다니까, 서유진 그거.”

아니다 싶을 땐 빠질 줄도 알아야 할 텐데.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말투엔 지금쯤이면 일하고 있을 유진에게로 향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서훈이라고 그 걱정을 못 느낄 리 없었다.

“걱정은 그 정도만 해라, 나민석.”

“뭔 소리야, 또.”

“남의 애인한테 걱정이 과해 보여서 말이다.”

민석은 이미 그런 서훈의 태도가 익숙한 듯 태연하게 도로 받아쳤다. 약간의 불쾌감을 담아서.

“너도 그 집착 좀 버려, 누가 누구보고 적당히를 운운해?”

“정도를 지키라는 게 성질낼 일이야?”

“내가 못 지킨 건 뭔데. 어디 들어나 보자.”

“말했잖아, 걱정이 과해 보인다고.”

오랜 친구라도 이따금 거슬리는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쓸데없는 집착이건, 질투심이건.

그 말을 듣자마자 민석은 기분 나쁘다는 듯 와락 인상을 썼지만, 서훈은 태연하다 못해 당연하게 서유진의 애인으로서의 제 권리를 주장했다.

“서유진하고 내가 몇 년 친구인지도 뻔히 알면서 그래?”

“가끔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더라.”

옆에서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지켜보며 연우는 난감한 듯 쓰게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나오지 못한 유진에 관한 화제만으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어쩌면 두 남자의 연결점이기도 했고, 언제나처럼 중간에서 자를 유진이 없으니, 식사하는 내내 끊길 듯 말 듯 대화가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너는 또 왜 꼴이 그래?”

“내 꼴이 어떤데.”

“그 얼굴 말이다. 며칠은 굶은 것처럼 핼쑥하잖아.”

무심히 젓가락으로 밥을 집으며 그가 서훈의 얼굴을 턱짓했다.

“아, 살이 빠져서 그런가?”

“혈색도 별로야.”

그제야 쓰게 웃으며 서훈이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내 얼굴, 그렇게 안 좋아 보이냐?”

좋을 리 없었다. 이미 진창으로 속이 다 망가진 상태였으니까. 오히려 생기 있는 얼굴이면 그게 더 이상한 상태일지도.

“몰라서 묻냐. 딱 봐도 아픈 얼굴인데.”

“그냥 몸살기가 좀 있더라고.”

별일 아니라며 대답한 그가 손에 쥔 젓가락을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눈에 띄게 혈색이 나빠서는 아닌 듯 연신 곁눈질로 힐끔거리는 연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말… 별일 없으신 거 맞죠?”

“갑자기 그건 왜? 네가 보기에도 얼굴 꼴이 별로야?”

“아뇨, 별로라기보단 좀…….”

슬쩍 시선을 던지며 묻자 연우가 시선이 곤혹스러운 듯 난처하게 뺨을 긁적였다.

묘하게 말을 얼버무리는 기색이 아닌가. 하긴 평상시부터 세 사람 중에 서훈을 가장 어려워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편하게 말해, 그런 것까지 꼬아서 듣진 않으니까.”

괜찮다는 듯 서훈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게, 사실은 형 보는데 그때가 겹쳐 보여서요.”

“그때? 뭐가 겹쳐 보였는데?”

“아빠가 아팠을 때, 그러니까 발병 초기 때요.”

무심하게 손등 위로 턱을 걸치고 있던 서훈의 표정이 그 말과 함께 딱딱하게 굳었다.

미묘하게 엇나간 핀트 사이로 정확하게 짚어낸 연우의 예리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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