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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앓다-41화 (41/67)

❦제41화

대학 병원은 그 주변으로 제법 큰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산책로처럼 만든 공간이 도심 한복판의 숲처럼 보기 좋았다.

벤치 앞으로 면회를 온 것처럼 보인 사람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입원 중인 환자들이 많았다.

‘많이 안 좋으면 병원부터 가라, 큰 아버지네 있잖아.’

‘우리 집안 모르냐? 그쪽이 더 불안하더라.’

‘흐음, 생각해 보니 또 그렇네.’

‘어느 병원이 좋을지도 사실 잘 모르겠고,’

‘동창은 묵혔다가 국 끓여 먹을 거냐.’

‘…의사가 있었던가?’

‘한 번 싹 훑어봐. 그중 의사 하나쯤 안 나오겠어?’

멍하니 벤치에 앉아, 며칠 전 만난 민석과의 대화를 곱씹으며 서훈이 고민스러운 기색을 얼핏 드러냈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왕이면 아는 사람이 낫겠지 싶은 이중적인 마음이 든 탓이리라.

“모르겠다, 어차피 받아 봐야 할 검사긴 하니까.”

확실히 최근 들어서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는 했다. 더군다나 연우가 담임 아플 때와 겹쳐진다고 했을 땐 그에게도 제법 충격이었으니 말이다.

그만큼 아파 보였다는 뜻이겠지.

쓰게 웃으며 캔 커피를 마시던 그가 멀찍이 걸어오는 낯익은 사람에게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선배 여깁니다, 여기.”

“아, 거기 있었냐?”

뒤늦게 그를 알아본 건지, 벤치로 향하는 걸음이 한층 더 빨라졌다.

그의 이름은 김도민.

제법 큰 대학 병원에서 펠로우로 근무하는 선배로, 서훈은 고등학교 때 도민과 동아리 선후배로 인연이 약간 있었다.

그 시절엔 늘 유진이나 민석과 붙어 다니다시피 했지만, 아이러니하게 그들은 도민과 거의 친분이 없는 상태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다?”

“지금이 딱 한산할 시간대잖습니까.”

“하긴 이맘때가 제일 한가하지.”

금세 벤치로 온 도민이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피곤한 듯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사업한다고 들었는데 잘되고?”

“예, 그럭저럭.”

“그럭저럭은, 금수저 물고 태어났으면 망해도 본전인데.”

도민의 말투는 바로 어제 만난 사이처럼 친근했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의 낯선 태도가 약간 당황스럽기는 했다.

붙임성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그가 얼굴에서 감정을 말끔히 지워냈다. 그런 뒤, 미리 사놓은 커피를 도민에게 건넸다.

“커피 괜찮으시죠?”

커피를 본 도민의 얼굴 위로 반가움이 잔뜩 묻어났다.

“안 괜찮을 리가 없지. 커피는 몇 잔이든 환영이거든.”

“잘됐네, 아직 시원할 겁니다.”

잽싸게 낚아채 간 커피를 반 이상 들이켠 뒤에야 내려놓으며 그가 서훈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너, 커피도 먼저 준비할 줄 아는 놈이었냐?”

“선배, 그 말은 왠지 욕으로 들립니다만.”

“못 본 사이에 센스 좋아졌다는 칭찬이다.”

그러냐며 서훈이 떨떠름한 표정을 드러냈다. 대놓고 칭찬이라는데 무슨 말을 하랴. 진짜 칭찬이려니 넘기는 수밖에.

매일 환자를 상대하는 직업이라서 그런지,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도 그는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래서 뭔데? 생전 연락도 없던 놈이 날 다 찾아오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는 서훈에게 몇 년 만에 연락한 이유를 불쑥 물었다.

“저, 그게 말입니다.”

“……?”

“제 몸 상태가 조금, 아니 최근 들어서 꽤 많이 안 좋아져서.”

“나한테 연락할 정도면 심한가 본데.”

“예, 솔직히 무슨 검사부터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서훈은 남의 일처럼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겉모습과 달리 긴장으로 연신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제야 대강 상황을 알아차린 건지 도민의 눈길에서 장난기가 싹 거둬지며 진중하게 변했다.

“체중이 눈에 띄게 확 줄진 않았고?”

“예, 약간은.”

“흐음, 그렇단 말이지.”

치켜뜬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가 서훈의 안색이 어떤 상태인지를 유심히 살폈다.

“선배가 보기에도 안 좋습니까? 지금 제 꼴.”

“어떨 거 같냐, 네 생각에는.”

서훈은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마냥 어색하게 웃었다.

고민을 듣는 순간부터 의사의 본분으로 돌아간 듯 도민은 느낀 그대로를 입에 올리며 미간을 잘게 찡그렸다.

“말해주랴? 딱 중병 걸린 놈처럼 보이는 몰골이다만.”

깊게 살펴본 서훈의 얼굴은 그만큼이나 엉망이었다.

퀭한 눈에는 다크서클이 제법 짙게 내려왔고, 입술은 퍼석퍼석하게 말랐으며, 광대뼈가 도드라지는 뺨은 얼마나 살이 빠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아, 진짜 미치겠네.”

정말 어디가 고장이라도 난 건가. 서훈이 짜증스럽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짙은 수심이 드리워지는 속내를 감추려는 듯 그가 손에 쥔 커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러지 말고 증상을 대충이라도 말해 봐.”

“…….”

“어디가 어떤 식으로 안 좋은지를 말해야 내가 도와주지.”

하지만 더는 입을 닫을 수도 없었다.

큰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면 도민에게 상담할 수밖에는 없었다. 생판 모르는 의사보다는 나으리라.

“위궤양으로 약을 복용 중인데 증상이 좀 심하다고 할까.”

“흐음, 어떤 식으로 통증이 와?”

다행히도 그는 서훈의 말을 한 문장도 허투루 듣지 않았고, 어떤 식으로 증상이 오는지 귀를 기울여 집중했다.

심한 위궤양으로 치료 중이라는 사실과 몸 상태. 제법 괜찮았던 검사 결과와 어느 날부터 통증이 더 심해졌다는 것까지 모조리 다.

“우선 말이다. 너 며칠쯤 회사 쉴 수 있겠어?”

그리고 나온 도민의 물음은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는 검사가 아니라는 뜻과 같았다.

* * *

병원을 나선 뒤로 서훈은 한층 머리가 복잡해졌다. 검사를 앞둔 탓인지, 쓸데없이 잡다하게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

가볍게 온 걸음이 가는 길에는 유난히 더 무거웠다. 서훈은 금세 회사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일이 손에 잡히지는 않았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눈치 빠른 김 비서가 그 상태를 모를 리 없었다.

“…그래 보입니까, 내 얼굴?”

“아까부터 내내 표정이 좋지 않으셨습니다만.”

한층 예리해진 시선으로 김 비서가 그의 안색을 살피며 대답했다.

“머리가 좀, 복잡하기는 한데.”

“그럴 땐 일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테고. 아닙니까?”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뉘앙스가 아닌가.

“신기하네, 혹시 얼굴에 다 드러난다던가?”

“늘 대표님의 패턴이잖습니까, 어디 한두 번도 아니고.”

“내가 졌습니다, 받아칠 말도 없고.”

나도 모르는 패턴까지 꿰는 사람이라니. 졌다는 듯 소리 없이 웃으며 서훈이 곧게 편 허리를 등받이로 느긋하게 기댔다.

자연스럽게 상체가 젖혀지며 서훈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그렇게 딴청 부리듯 감시자처럼 버티고 선 김 비서를 흘끗 올려다봤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귀신이라니까.’

복잡해서 통 일손이 잡히지 않는 것도, 생각이 많은 것까지 다 알면서 저런 말을 꺼낸 것이리라.

숨기는 것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겠지.

김 비서한테는 아직 무리였다. 백전노장 같은 남자 앞에서 꼬맹이로 보일 자신이 뭘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만 퇴근이나 하죠. 오늘 일하기도 텄는데.”

가볍게 넘긴 서훈이 손에 쥔 서류를 책상으로 내리며 김 비서를 향해 휙 턱을 치켜들었다.

“퇴근까지는 아직 한 시간도 넘게 남았습니다만.”

“겸사겸사, 비서팀도 숨 좀 돌리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이 시간에 퇴근하겠냐. 서훈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늘어놓았다.

책상 너머로 김 비서의 표정이 제법 볼만했지만, 그가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 올렸다.

“너무 뻔뻔한 거 아십니까?”

“음, 그랬습니까? 아버지나 형보다 별종이기는 하죠.”

“알고는 계시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김 비서가 포기한 듯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대답은?”

“흐음, 저도 생각을 좀 해 봐야겠습니다.”

“사람이 너무 빡빡하다니까.”

“대표님이 반대로 너무 여유롭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황당하다는 듯 되받아치며 김 비서가 눈썹을 휙 치켜올렸다. 남한테 문제를 제기할 처지가 되느냐, 꼬집는 듯한 시선이었다.

딱히 할 말이 없던 서훈은 그것도 그렇다는 식으로 대강 수긍하며 흘려 넘겼다. 이따금 유진에게도 혼이 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비서라는 자리가 원래 눈치 빼면 시체가 아닌가. 김 비서는 안 된다며 쳐내는 대신, 서훈에게 불쑥 급한 서류 하나를 들이밀었다.

“적어도 이것까지는 끝내 주셔야겠습니다, 대표님.”

이것만은 절대 양보 못 한다는 듯이.

“이건 좀, 너무 전투적인 것 같은데.”

“퇴근보다 비서팀이 더 기뻐할 겁니다, 그 서류 통과를.”

“도대체 무슨 서류길래…….”

“보시면 아실 겁니다, 대표님도.”

의아함을 느낀 서훈이 서류를 받아 페이지를 뒤로 넘겼다. 금세 매끈하던 미간 위로 서류를 훑어 내리며 옅은 주름이 잡혔다.

“흐음…….”

보면 알 거라더니. 김 비서가 건넨 서류를 확인해 보니, 이미 서훈이 몇 번이나 다시 작성하라며 반려시킨 내용이었다.

이번에는 제법 쓸 만해 보였다. 그사이 다듬어진 내용은 지적한 내용도 다 바뀌었고, 고생한 티가 났다.

“이번에는 마음에 드십니까?”

“앞으로 서류 올릴 땐 오늘처럼만 해 오라고 합시다.”

서류를 돌려주며 그가 만족한 듯 웃었다. 금세 김 비서가 나간 입구를 바라보다 그가 손목을 들어올렸다.

한 시간 남짓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보며 서훈이 슬슬 퇴근을 서둘렀다. 이쯤이면 조퇴했다는 오해는 받지 않을 거다.

‘오기만 해 봐, 이번엔 나 진짜로 화낸다?’

‘혹시 기분 안 좋아?’

‘그럼 또 조퇴하니까, 좋다 이럴까?’

‘난 저번에 네가 다치기도 했고, 일도 빨리 끝나서…….’

‘멀쩡하거든, 그게 언제 적인데?’

조퇴한다고 대놓고 타박하던 연인을 떠올리며 서훈이 픽 웃었다. 그리고 막 퇴근하려는 찰나, 책상에 놓인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어, 진아.”

타이밍 좋게 유진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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