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무심히 창밖을 보는 서훈의 시야 너머로 서준이 눈에 띄었다. 이제 막 카페로 들어온 그가 테이블로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어쩐 일이냐, 네가 날 다 불러내고.”
“그래도 나오기는 했네, 아까는 무슨 일이냐고 따져 묻더니만.”
“어지간해선 날 찾아오는 놈이 아니니까.”
주문을 끝낸 뒤, 그가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며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상당히 바빠 보였다. 일이 많아서라기보단 따로 약속이 잡혀 있는 듯했지만.
“급한 약속이라도 남았어?”
“한 시간 뒤에 여리랑 만나기로 해서.”
“의외로 자주 나오네, 그분도.”
“한국에서 슬슬 자리 잡을 생각인가 보더라.”
넌지시 묻던 서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고 눈 풀어.”
“내가 뭘.”
“그게 뭐든, 네 상상하고는 달라.”
묘한 눈길이 거슬리는지 서준이 짜증스럽게 인상을 썼다.
그런데도 서훈이 영 믿지 않는 눈치로 쳐다보자 한숨을 푹 내쉬며 그가 만나려는 이유를 설명했다.
“아들 옷 사는 것 좀 도와달라더라. 남자 옷은 모르겠다고.”
“형이 그런 것까지 챙겨?”
아무리 죽은 친구의 자식이라도 옷까지 챙기는 건 오버 같은데. 슬쩍 차오르는 말을 삼킨 서훈은 그냥 싱겁게 한 번 웃고 말았다.
“남의 일에 신경 꺼. 그보다 부른 이유가 뭐냐.”
“물어볼 것도 있고, 겸사겸사.”
별거 아니라는 듯 서훈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생각이 많아지니, 그래도 가족이라고 하나뿐인 형을 찾게 되는 것 같았다.
어쨌든 형제가 아닌가.
하지만 입이 잘 떨어지진 않았다. 서훈은 한참이나 제 몫의 커피를 홀짝이고 나서야 서준에게 궁금한 점을 넌지시 물었다.
“형은 말이야. 여리 누나를 왜 저대로 둬?”
“무슨 소리냐, 그건 또.”
“좋아하잖아. 그 누나가 결혼하기 한참 전부터.”
서훈은 돌려 물어보는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파고드는 전공법을 골랐다.
“…주서훈, 너…….”
“모를 리 없지, 형한테 특별 대우를 받는 유일한 존재인데.”
굳이 변명할 필요 없다는 뉘앙스를 느낀 듯 서준이 쓰게 웃었다.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뒤늦게 수긍하듯, 내가 그랬었던가 홀로 읊조릴 뿐이었다.
“트집은 아냐. 그냥 좀 궁금해져서.”
“뭐가 그렇게나 궁금한데.”
“여리누나 말이야. 혼자되고 벌써 몇 년째잖아.”
무심하게 잔을 들어 올리던 서준은 그가 마여리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미간을 잘게 구겼다.
“여리는 또 왜.”
“질문이 그거니까, 아직도 고백하지 않는 이유.”
그 이유가 궁금하다는 서훈을 보는 그의 눈길로 스치듯 짜증이 들어찼지만.
“넌 항상 가져야만 그게 사랑이냐?”
“아니면 뭔데.”
서준은 금세 스스로의 감정을 다잡았다. 평정을 찾은 그가 테이블로 잔을 내리며 허우대만 멀쩡한 제 동생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글쎄다. 하긴 모르니 답을 찾으려는 거겠지.”
“설마 친구한테 양보하는 거?”
“가끔은 행복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쓸 만한 기분이거든.”
어울리지 않게 진심을 드러내는 그와 눈을 마주했지만, 오히려 더 속내가 짐작되지 않았다.
차라리 다른 상대가 말했더라면 이해가 쉬웠을 텐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주서준이었다. 핏줄도 서슴없이 남이라고 칭하는 남자가 아가페적인 사랑 운운하는 말 따위 곧이곧대로 믿어질 리가 없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봐, 형은?”
“모르지. 늘 가장 급한 순간엔 날 찾아서 그런 걸지도.”
“오히려 더 이기적인 것 같은데.”
거르지 않고 툭 내뱉은 감상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인정하듯 픽 웃었다.
본인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서훈도 사실 여리를 자주 만나보진 못했다. 어쩌다 가끔 서준과 함께 있는 그녀와 몇 번 부딪혔을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서준은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은근슬쩍 시야에서 그를 치워냈고, 자연스럽게 서훈은 그 둘의 관계를 지켜보게 된 것이다.
“흐음…….”
서준이 말한 그 감정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듯 서훈이 미간 위로 옅은 주름을 잡았다.
“모르겠네, 방식이 너무 다른 건가.”
“각자의 선택이겠지. 사랑도 마찬가지겠고.”
쓸데없는 고민할 것 없다며 서준은 손에 쥔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그냥 서로의 방식이 다른 건가?”
“당연한 거 아니냐. 성격이며 사는 인생까지도 다른데.”
“흐음, 당연한 건가.”
“주서훈, 고작 이따위 질문이나 하자고 날 불러냈어?”
“그래서 말했잖아, 궁금해서라고.”
서훈은 천연덕스럽게 받아쳤지만, 오히려 그의 눈은 한층 더 의심스럽게 가늘어졌다.
“나보고 그걸 믿어라?”
“물고 늘어지지 말고. 이쪽도 사정이 좀 있어.”
우리가 언제 그렇게까지 가까워졌냐. 비아냥거리던 서준은 한숨 섞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말없이 등을 뒤로 느슨하게 기댔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면 때려치워.”
“사정이 뭔 줄 알고 무작정 때려치우래?”
“아니면 네가 끔찍하게 위하는 유진 씨랑 헤어지기라도 하냐?”
짜증스럽게 인상을 쓰며 서훈이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남의 일이라고 아주 막 뱉지?”
“아니면 뭐가 또 있고?”
“그건…….”
“거봐라, 너도 입 닫으면서 누구한테 질문을 던져?”
그렇다고 사실대로 이유를 말할 수도 없었다. 그게 질문세례를 받은 서준에게도 퍽 답답해 보인 모양이다.
네 애인이나 잘 챙기라며 서준은 그에게 따끔히 충고했다. 하지만 평소처럼 서준은 알겠다며 쉽게 수긍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그 이해 못 할 서준의 감정을 자신이 곧 그대로 따라가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 * *
물론, 헤어지기까지의 결심은 쉽지 않았다. 그에게 서유진이란 존재는 강산이 하나 바뀔 만큼의 시간을 함께 걸어온 친구이자 연인이었다.
‘뭐? 다음 주?’
‘저한테도 그게 한계라서 말이죠.’
‘그놈도 참, 목숨보다 일이 더 중요하냐?’
‘목숨이 중요하니, 최대한 빨리 가는 겁니다, 저도.’
‘알았다, 더 빨리 가능하면 연락하고.’
깊이 생각에 잠긴 서훈이 허공을 물끄러미 주시하며 책상 귀퉁이를 톡톡,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다음 주…….”
이제 그때까지 며칠이 남았더라. 머릿속으로 남은 날짜를 헤아려 보는 서훈의 얼굴 위로 수심이 짙게 차올랐다.
세상이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처음 병명을 들었을 땐 그저 현실감이 없고 멍했다. 그러다 왜 하필 나인 거냐며 세상이 원망스러워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원망은 서유진에 대한 걱정으로 뒤바뀌었다.
“그 녀석만 아니어도 마음이 좀 편할 텐데.”
직접 유진에게 말할 자신은 없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사는 것도 괜찮을 거라, 서훈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쉬울 리 없다. 아무것도 모를 여자를 버리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회사를 내던져 버릴 미래가.
“이것부터 마무리하자, 무작정 놔 버릴 수는 없으니.”
퍼석퍼석한 손으로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뒤, 서훈이 곧장 김 비서를 불러들였다.
“당분간 잡힌 일정은 다 취소해요, 새로 잡지도 말고.”
어렵게 머리 굴릴 필요도 없이 서훈은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한동안은 내가 연락이 잘 안 될 겁니다.”
“…….”
“우선 김 비서만 알고 있어요.”
김 비서는 꽤 당황하고 있었다.
애써 표정을 다잡는 티가 났지만, 몇 년을 함께 일한 사람이 아닌가. 한눈에도 당황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서훈이 믿는 몇 안 되는 최측근이었다. 조금이라고 언질을 줘야 대응하기가 수월할 거라 짐작했지만.
“확실하진 않으니까, 우선 김 비서도…….”
“제대로 얘기를 해 주셔야 저도 이해할 것 아닙니까!”
평소와 달리 동요한 듯 김 비서의 언성이 높아졌다.
“소리 안 질러도 김 비서 무서운 거 나도 압니다.”
“아는 분이 그러십니까?”
“하하, 어쨌든 알고 있으라고 꺼낸 말이니 대충 넘어가죠.”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지. 그것도 예상한 듯 겸연쩍게 웃으며 그가 미간을 쓱쓱 문질렀다.
“…대표님.”
“그렇게만 알면 됩니다.”
느슨한 눈을 치켜뜨며 서훈이 단호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더는 묻지 말라는 신호를 느낀 김 비서에게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습니다.”
그제야 김 비서는 포기한 눈치였다.
“미안합니다, 이런 부탁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만큼 절 믿어 주셔서겠죠.”
“김 비서만큼 내 사정 잘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한고비 넘겼다는 듯 서훈이 쓰게 웃으며 제 뒷머리를 거칠게 털어냈다.
그나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직은 뚜렷하게 정해 놓은 것도 없었지만, 김 비서가 있으니 여긴 괜찮을 거다.
지금 서훈에게는 회사의 운영보다 자신의 병이 더 중요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마찬가지다. 주서훈이라고 다를 게 없는 본능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별일은 없을 거다. 애써 좋은 쪽으로 최면을 걸며 서훈이 나가 보라는 말과 함께 김 비서를 내보냈다.
김 비서는 나가는 순간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서훈을 연신 힐끔거리며 살폈다.
하기야 잠수 탄다는 말도 맞지. 대뜸 못 나올 거라는 상사의 통보를 직속 비서가 좋게 받아들일 리 없으니까.
그래도 꽤 눈치고 좋은 남자였다.
정확하게 이유를 듣지 못한 상황이니, 그는 아버지에게도 입을 닫을 거다. 서준에게도 정말 위급해진 뒤에야 연락할 것 같았다.
그래도 우선…….
‘네놈 회사를 내가 뭐하려고.’
‘만약이라고 했잖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너 오늘 뭐 잘못 먹었냐?’
‘당장 도와달라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뭐,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냥 보험이라고 쳐, 속 편하게.’
서준의 떨떠름한 반응을 떠올리는 그의 미간이 깊이 파였다. 그쪽으로는 부탁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직이 혀를 차는 시선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래도 남보다는 사업 수완이 좋은 서준이 나았다. 김 비서는 말 그대로 비서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의외로 많지 않았다.
자신이 없는 그 공백을 주서준이 메워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