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44화 (44/67)

❦제44화

며칠 만에야 돌아온 집이었다.

서훈은 현관으로 들어선 직후, 자신을 와락 끌어안는 유진을 본 그의 눈동자가 의외인 듯 살짝 커졌다.

“뭐야, 왜 이렇게 반겨 줘?”

“서프라이즈라고 생각해, 반가워서 그러니까.”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그가 유진의 등을 감싸 안았다.

“나쁘진 않네, 격한 환영 인사도.”

“으음, 약간 찔리긴 한다. 갑자기 달려들어서.”

“난 화끈해서 좋던데?”

일부러 더 허리를 휙 끌어당기며 서훈이 가느다란 어깨로 제 입술을 파묻었다.

아직 재킷도 벗지 못한 상태였지만, 서훈은 상관없었다. 그저 이 순간, 서훈은 이틀 동안 간절했던 이 체온만이 더 중요할 뿐이었다.

익숙한 체향을 한껏 들이마신 뒤에 서훈이 고개를 들어 올리려는 찰나, 제 옷깃을 꽉 움켜쥐고 있는 유진의 작은 손이 스치듯 눈에 띄었다.

‘아……!’

그제야 서훈은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이상하게 혼자 있을 때마다 불안해하는 유진의 지난 모습들이.

실수했다, 조금 더 유진은 안심시키고 나갔어야만 하는데.

뒤늦게 찾아드는 후회를 애써 삼키며 그가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유진을 더 꽉 안았다.

“뭐야, 갑자기.”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좋다.”

평소라면 그만 놓으라며 쏙 빠져나가고도 남았을 텐데.

“뭐, 그러던가.”

이번에는 유진도 얌전하게 안겨 있었다. 팔이 풀어질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투덜거리면서도 억지로 서훈을 떼어내거나 하지 않았다.

“우리 이산가족 상봉해?”

한참이 만에야 떨어지는 서훈을 향해 일부러 들으라는 듯 유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싫어?”

“누가 싫다고 했나,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네가 싫은 게 아니면 됐어.”

불퉁한 말투와 달리 유진의 입가는 이미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그 미소를 보니, 덩달아 쌓인 긴장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금세 멀어진 그가 유진의 뺨을 잡은 채, 장난치듯 이마 위로 제 입술을 누르듯이 꾹 찍었다.

쪽. 쪽쪽.

가벼운 키스치고는 서훈의 밀어붙이는 힘이 상당했다. 마치 작정하고 노리는 맹수의 그것처럼.

가볍게 콧등으로 내려온 입술이 뺨으로 내려가고, 다시 또 미끄러지듯 턱에 닿았다. 그 열기가 더 내려갈 즈음, 유진은 소파 근처까지 밀려나 있었다.

“주서훈, 지금 나 유혹하는 거야?”

“뭐, 사심이 없진 않았는데.”

아슬아슬하게 닫는 고개를 뒤로 젖히는 유진을 보며 갈증이 나는 듯 서훈이 제 아랫입술을 핥았다.

“대놓고 티 나거든?”

“어쩔 수 없어, 나도 본능을 이기기는 쉽지 않거든.”

“하여간 말은,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아슬아슬하게 닿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녀가 눈꼬리를 착 접어 내리며 서훈의 넥타이를 슬쩍 잡아당겼다.

“그럼 더 예뻐해 주시죠, 아가씨.”

그 말에 반응하듯 손에 쥔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유진이 그와 함께 소파에 털썩 쓰러졌다.

며칠 만의 키스는 오랜 연인에게 사라진 애틋함과 열기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키스에 몰두하던 그녀가 눈가를 찡그리며 돌연, 서훈을 뒤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읍, 으-읍.”

“…….”

“읍… 으으, 읍!”

처음에는 가볍게 밀던 손길이 점점 거칠어지자 이상함을 느낀 듯 그가 숨을 고르며 제 입술을 살짝 떼어 냈다.

“하아, 집중하는데 왜.”

“나 뒤쪽이 조금, 등이…….”

“갑자기 등?”

“아프니까 우선 좀 나와 봐, 얼른!”

급기야 언성까지 높이는 유진에게 놀란 서훈이 후다닥 몸을 떼어냈다.

“놀래라, 성질부터 내지 좀 말고.”

“그래서 비키라고 했잖아. 윽, 아파. 도대체 뭐가 찌르는 거지?”

오만상을 구긴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를 마구 더듬었다. 구석으로 손을 넣어 뒤적이는 모양새가 무언가를 찾는 모양이다.

한순간 깨진 분위기를 아쉬워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서훈은 괜히 더 짜증을 낼까, 얌전히 입을 닫고서 유진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 찾았다!”

그때였다.

소파 귀퉁이에서 꺼낸 열쇠고리를 그녀가 서훈에게 건넸다.

“어라, 소파에 웬 열쇠고리가…….”

“내 말이 그거야. 이런 게 왜 박혀 있지?”

아파 죽는 줄 알았다며 투덜거리는 유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그가 손에 쥔 열쇠고리를 위로 들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그래? 난 처음 본 것 같은데 아닌가?”

“아냐, 분명히 어디선가 많이 봤어.”

흔들리는 열쇠고리를 빤히 주시하며 서훈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렇게 한참을 뚫어지게 보고 나서야 그는 물건을 출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어머니가 선물해 주신 건데 도대체 어디로 굴러 들어간 거야?’

바로 나민석이었다.

쓸데없이 남의 집 거실을 들쑤시고 다니더니만.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서훈이 열쇠고리를 휙, 가볍게 한 손으로 낚아챘다.

* * *

사실 그때까지도 모든 건 그대로였다.

서훈은 다시 또 며칠이 흐르는 동안 평소처럼 회사를 나갔고, 퇴근한 뒤엔 유진과 투닥거리는 일상을 보냈다.

어쩌면 조금 시간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유진에게 마음 편히 털어놓을 자신이 없는 탓도 있었지만.

“으음, 저녁엔 마트 좀 가야겠다.”

“또 찬거리 다 떨어졌어?”

“라면도 없다, 아예 찬장이 텅텅 비었는데.”

작업실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민 그녀에게 보란 듯이 찬장을 열고, 툭툭 쳤다.

손길을 따라 찬장을 본 유진의 눈가가 잘게 찡그려졌다. 늘 인스턴트 제품으로 가득하던 공간이 텅 비어있었다.

“진짜네, 마트 몇 시까지 하더라?”

“10시까지는 하지 않나. 일 많이 남았어?”

“아냐, 이제 곧 끝나. 잠깐만.”

“천천히 끝내. 난 떨어진 물건 확인하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 손을 내저은 뒤, 서훈은 주방에서 사야 할 물건이며 찬거리를 하나씩 체크하기 시작했다.

마트를 자주 안 나가서 그런가. 주방엔 단지 찬거리뿐 아니라 식용유 하나까지도 똑 떨어지고 없었다.

“이 지경으로 며칠이나 잘도 버텼네.”

서훈이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이건 뭐, 찬거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재료가 있어도 뭘 만들 상황도 아니라는 소리였다. 둘 다 어지간히 주방엔 무심했던 모양이다.

적당히 다 둘러볼 즈음, 타이밍 좋게도 막 유진의 작업이 끝났다.

“괜찮겠어? 피곤하면 좀 쉬다 나갈까?”

“다녀와서 쉴래, 마트는 어디가게?”

“대형 마트로 가자. 보통 큰 곳이 12시까지는 하니까.”

하지만 평상시처럼 유진과 함께 마트로 들어선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소리도 없이 통증이 다시 찾아들었다.

“어? 갑자기 왜 멈춰?”

“그게, 여기 화장실이 어디더라?”

갑자기 멈춘 서훈을 의아하게 보던 그녀가 마트 끄트머리를 가리키며 작게 웃었다.

“놀랐잖아, 급하면 진작 가지.”

“그런 거 아냐. 그냥 좀.”

“알았으니까 얼른 다녀와. 난 식품 코너에 있을게.”

유진이 그의 손에서 카트를 빼앗으며 어딘가로 발길을 옮겼다. 조금 전 말한 식품 코너가 있는 방향이었다.

서훈은 그 모습을 보며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시야에서 유진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가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삼키며 입구로 급히 나갔다.

“…으-윽.”

그나마 약을 가져오길 망정이지, 그대로 나왔으면 고통이 심했으리라.

‘선배, 이 약은…….’

‘진통제야, 마약성이니까 심할 때만 복용해.’

‘이틀 동안 유독 통증이 없던 이유가 이거였습니까?’

‘그래, 마약성은 효과가 좋으니까.’

재차 귓가에서 맴도는 목소리를 흘려 넘기며 서훈이 주머니에서 꺼낸 약을 물과 함께 넘긴 뒤,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하아…….”

하지만 마약성이라고 해서 통증이 몇 초 만에 잡히는 것도 아니었다. 괴로운 듯 이를 악물며 그는 통증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유진에게로 돌아갔다.

“너 뭐야, 한참 기다렸잖아.”

“화장실에 사람이 좀 많더라고. 물건은 골랐어?”

자연스럽게 건네받은 카트로 시선을 내린 서훈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적당히 담고 있으면 될 걸. 그사이 늘어난 물건이라곤 딸랑 참치 캔과 고작해야 냉동 만두가 끝이었다.

“식품코너엔 더 살 거 없어?”

“별로, 냉동식품이나 몇 개 담으면 되겠지.”

불퉁하게 변한 유진을 보며 그는 상황이 대강 짐작이 갔다. 일부러 장도 안 보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더 둘러봐. 뒤늦게 생각날 수도 있잖아.”

“뭐, 그러던가. 넌 따로 살 거 없어?”

서훈은 뻔히 다 알면서도 유진의 팔을 식품코너로 잡아끌었다.

“아, 맞다. 플레인 요거트.”

“평소에 너, 그거 안 먹지 않았어?”

“의사가 권하더라고.”

여전히 다 잡히지 않은 통증은 오랫동안 서훈을 괴롭혔다. 마트를 나설 즈음에서야 완전히 다 가라앉은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며 서훈은 안도했지만, 그 미묘한 균열을 본능처럼 느낀 유진이 이상하다는 듯 한 번씩 그를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물론, 며칠 동안 미뤄 놓은 일정을 처리하는 것도 만만치는 않았다. 김 비서가 적당히 추려 냈다고 해도 그 양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겨우 한숨을 돌릴 즈음엔 정신없이 며칠이 훌쩍 지나 있었다.

쉴 틈 없이 빡빡한 일정이 정리되고 여유가 돌아오자 반대로 그는 일부러 외면해 둔 도민의 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자.’

‘그래도 당장은 무리라서, 하아…….’

‘지금 회사가 중요하냐? 목숨이 걸렸는데.’

‘…….’

‘어떻게든 해 달라며,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입원해.’

‘…그래야… 겠죠……?’

‘당연한 소리를 하냐. 우선은 살고 봐야지.’

우선은 사는 게 중요하다고, 그를 붙잡고 도민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 목숨보다 중요한 게 있을 리가.’

이미 균열이 가기 시작한 일상은 애를 써도 원상 복구가 되질 않았다. 서훈은 비슷한 듯 달라진 현실을 차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다 그대로인데 자신만 급격하게 바뀌는 이질감처럼.

지금껏 외면하고만 있는 몸 상태를 자각할수록 서훈은 점점 마음이 다급해져만 갔다. 슬슬 무언가를 정리해야 할 시기라는 직감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그게 설령 유진을 멀리 떼어 놓는 일이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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