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55화 (55/67)

❦제55화

낯선 남자의 말을 듣고 무작정 도착한 학교 앞 작은 문구점.

그때까지도 별생각이 없던 유진에게 갑자기 두통이 몰려왔다. 지끈거리다 못해 당기는 두통을 그녀는 쉽게 감당하지 못했다.

“아, 으…….”

유진이 고개를 바닥으로 수그렸다. 지금껏 무심하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쪼개질 듯 아픈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유진이 작게 신음했다. 괜찮아, 금방 괜찮아지겠지. 세뇌하듯 중얼거려도 영 효과가 없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아윽.”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알 수 없는 장면과 낯설지만 익숙한 상황으로 유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씨! 한 판만 더 해!’

‘하하….’

‘아, 웃지만 말고. 좀.’

‘알았어, 알았어.’

‘빨랑?’

‘그런데 너, 지금 이게 몇 판째인 줄은 알아?’

크게 웃어젖히는 남자를 노려보며 입술을 삐죽거리는 제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 익숙한 모습이 점차 더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 선했다.

‘그냥 하자면 좀 하자고!’

‘하하. 내가 서유진 때문에 배 아파 죽겠다.’

‘왜 자꾸 막판에 지는 거야, 짜증 나게!’

‘어라? 우리 꼬꼬마 성질났어?’

오만상을 찌푸리며 오락기를 발로 툭툭 찼다. 옆에서 그걸 멀거니 바라보는 남자가 혀를 차며 그녀를 뜯어말렸다.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서슴없이 이름이 아닌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면서.

‘그거 좀 하지 마, 왜 자꾸 꼬꼬마래.’

‘싫어?’

‘진짜 싫어. 키 작다고 놀리는 것 같잖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오는 대답.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다. 새초롬하게 옆을 노려보는데도 남자는 마냥 웃기만 했다.

남자는 쏘아보는 눈길조차 귀엽다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누구지? 곱씹어 봐도 전혀 모르겠다.

‘큭, 귀여워서 그러지.’

‘조금 더 귀여우면 막 때리겠다?’

‘으이고, 또 성질이다, 서유진.’

‘또 성질이 아니라니까, 내가 몇 살인데?’

‘우리 나이야, 뭐….’

‘어머머! 아는 분이 맨날 꼬꼬마라 그러세요?’

머리에서 크게 메아리치는 투덜거림과 함께 유진이 딱딱하게 굳은 고개를 돌렸다. 몇 대의 낡은 기계를 보는 유진의 눈이 커졌다.

“저거….”

분명히 그때 그 오락기인데. 덩그러니 놓인 낡은 오락기를 뚫어지게 보며 유진이 입을 달싹였다.

설마, 라는 물음에 맞을 것만 같은 확신이 섰다. 이유는 모르는데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

백지상태인 기억이 혼란스러웠다. 뒤죽박죽 섞인 기억은 마치 꼬인 실타래와 마주한 기분과도 비슷했다.

애써 혼란을 가라앉히는 찰나, 이번에는 다른 기억이 그녀를 소리도 없이 덮쳤다.

그건 파란 하늘이 유달리 눈에 띄는 집이었다.

‘아씨! 짜증 나!’

‘어? 서유진?’

’짜증 나! 짜증 나! 짜증 ―나!’

대뜸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자신이 잔뜩 짜증을 내며 버럭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욕실로 들어가던 누군가가 놀란 듯 몸을 휙 돌렷다.

‘뭐야, 너 갑자기 왜 그래?’

‘이 짓을 내가 지금 몇 시간째 하는 거지?’

여전히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서 멍하게 중얼거리는 여자,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모양새가 딱 일할 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나 아무래도 직업을 잘못 고른 것 같아, 히잉….’

‘…음.’

‘차라리 이걸 거면 회사원이나 될걸.’

희미한 기억으로도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 와중에 일은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손은 본능처럼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리며 그림을 손보는 그녀에게 옆에서 웬 남자가 옆구리를 찌르며 자꾸 말을 걸었다.

‘요즘 취업난 장난 아닌데?’

‘…굳이 말하지 말아 줄래.’

그런데 내가 왜 저기에 있지? 이번에도 유진은 알 수가 없었다.

“끄-응….”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 기억은 소리도 없이 다시 멀어지며 유진이 낮게 침음을 삼켰다.

* * *

조용히 유진을 따라가던 그가 위태로운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몇 미터쯤 앞서 걷는데도 보는 사람이 더 불안해 보일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정신 좀 차리고 걷지, 저러다 길 한복판에서 쓰러지면 어쩌려고.’

문구점을 나설 때부터 뒤따라가는 시선은 이미 까맣게 타들어 가 재만 남은 것 같았다.

차마 먼저 다가갈 수도 업었다.

무조건 지켜봐야만 하는 상황이 아닌가.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지러운 그녀와 다른 의미로 서훈도 마음이 좋진 않았다.

여전히 유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기억이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는 건지도 서훈은 전혀 알지 못했다.

직접 마주하고 나면 낯설어하는 눈빛에 속상하겠지만, 유진을 저대로 놔둘 수도 없었다.

“어디서 헤매는 거냐고, 서유진.”

보다 못한 서훈이 기어코 홀로 중얼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뒤에서 대뜸 괜찮냐, 말을 걸었지만, 대답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났을 즈음이다.

“…왜, 그러시는 건지…….”

겨우 정신을 차린 유진이 느릿하게 물었다. 낯선 사람에게 제 상태를 알리기 싫은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어둠밖에 없는 공간에서 겨우 빠져나온 뒤, 처음으로 마주 보는 유진의 얼굴이었다.

팔이 저절로 움직이려고 했다. 자꾸만 뻗어 나가는 팔을 뒤로 돌린 서훈이 주먹을 꽉 쥐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기, 어디 아프세요?”

서훈은 제 말을 듣지 않는 몸이 서글펐다. 주인을 알아본 눈이 유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발은 자연스레 앞으로 가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다.

‘안 돼, 주서훈 안 된다고.’

마음대로 뻗어 나가는 팔을 꾹 잡고 누르며 서훈이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런 두 사람 사이로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났다.

사소한 바람에조차 떨리는 심정을, 걱정스러운 속내를 서훈은 고스란히 가슴에 묻었다.

상관없는 타인처럼 한 걸음 물러선 채, 낯선 표정을 드러내며 그가 유진에게 시선을 넘겼다.

“아까부터 자꾸 휘청거리시던데 괜찮아요?”

“…제가 그랬나요?”

“예, 조금 안 좋아 보여서.”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서훈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막힌 기억이 그리 힘들었을까.

“아뇨, 아뇨.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아프면 내가, 아니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예?”

습관처럼 불쑥 튀어나오는 반말을 삼키며 서훈이 재차 정신을 다잡았다. 타인에게 높게 벽을 치는 유진에게 이상하게 오해받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바로 유진에게 거절당했다. 잔뜩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서훈은 걱정스레 뻗던 제 손을 다시 아래로 떨어트리고 가만히 기다렸다. 서유진이 허락해 주기를 바라면서.

“전혀 안 괜찮아 보여서 그러잖아요.”

뒤늦게 혀를 차며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뱉어 내던 말을 멈추진 않았다.

“얼굴까지 파랗게 질려서 당장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데, 뭐가 괜찮아요?”

“그, 그건…….”

“지금도 봐요. 계속 휘청거리는 거 본인은 몰라요?”

흔들리는 유진의 몸을 넌지시 가리켰다. 걱정이 녹아든 말인데도 탓하는 뉘앙스가 없진 않았다.

곁에 있을 땐 벽이 저렇게 높고 견고한지도 몰랐다. 낯선 타인을 배척하는 모습도 마냥 좋았다.

온전히 그 안에 들어갈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이유라면.

‘쉽진 않을 거다, 네 생각보다.’

서서히 떠오르는 그 한 마디가 서훈은 어떤 의미인지 차츰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 걱정은 고마운데 정말 괜찮아서요.”

확연히 드러나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저 까마득하고, 암담할 뿐이었다.

시간은 고작해야 며칠.

한없이 곁을 내어 주던 연인은 없다.

보이는 건 견고한 벽에 가로막힌 여자와 그 틈새를 파고들려고 하는 낯선 남자가 전부였다.

“생각할 것도 조금 있고. 예, 그냥 그것 때문에 그래요.”

“그럼 공원에라도 잠깐 가죠.”

“…네? 도대체 그쪽하고 제가 왜…….”

되묻는 유진의 팔을 그가 익숙하게 잡아끌었다. 모르는 사람이란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절로 움직이는 몸은 완전한 컨트롤이 힘들었다.

* * *

수시로 눈을 굴리며 유진이 멀리 떨어진 낯선 남자를 힐끔거리며 살폈다. 자기가 먼저 데리고 왔으면서 그는 이상하리만치 긴장하고 있었다.

‘참 이상한 남자네.’

“좀 괜찮아요?”

“…네, 조금.”

소리에 반응하듯 고개를 돌리며 유진이 말을 얼버무렸다. 남자는 할 말이 없어진 건지 도로 입을 닫았다.

하여튼 조금 이상한 남자다.

단순하게 결론을 내리며 유진은 은근슬쩍 남자를 곁눈질했다. 깔끔한 슈트를 걸친 모습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 묘한 친근함 때문일까. 잔뜩 곤두서 있던 신경이 차츰 부드럽게 풀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착각.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에 사로잡힌 걸지도 모르겠다.

심하던 두통이 잦아들고, 욱신거리던 심장이 고요하게 가라앉는 걸까. 유진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기…….”

이번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난감한 듯 남자가 대뜸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무턱대고 이런 곳으로 끌고 와서… 요.”

“아, 별로.”

설마 그 말 하려고 저렇게 고민했던 건가.

“가만히 앉아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것도 꽤 즐겁거든요.”

가만히 듣던 유진이 무언가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벤치에 앉아, 상상하는 건 그녀가 취미 삼아서 일삼던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이상함을 느낀 유진이 그를 뚫어지게 관찰했다. 그런데도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남자는 공원의 한 귀퉁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다음에 한번 해 봐요.”

“뭘… 요……?”

“지나가는 사람 구경도 좀 하고, 하늘도 한번 올려다보고.”

“…….”

“볼 거 많지 않아요? 흔들리는 나무도 구경하고.”

남자는 무척이나 씁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문득, 희미하게 입매를 위로 끌어 올렸다.

웃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미묘하게 이질적이다. 이젠 웃는 법조차 잊어버린 사람의 그것처럼.

‘이유가 뭘까. 그저 안타까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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