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54화 (54/67)

❦제54화

무거워진 몸을 늘어트리며 서훈이 눈을 떴다. 무심히 허공을 응시하는 눈길이 어둠에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눈을 뜨면 늘 보이는 것은 시야를 사로잡는 저 까마득한 어둠. 서훈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의문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여긴 어딜까. 난 죽은 건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잠긴 눈동자가 반응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나서였다.

어디선가 귓가를 스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내내 꼼짝도 하지 않던 서훈이 그 작은 소리를 따라 귀를 기울였다.

‘저건 어디서 나는 소리지?’

곰곰이 생각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뭔지도 모를 소리는 한없이 잔잔하게 귓가로 스며들었다.

그건 고요한 호수에 던져진 돌의 파동과도 흡사했고, 아래로 졸졸 흘러내리는 물방울 소리와도 엇비슷하게 들리는 듯했다.

“…아…….”

그제야 마른 입술 사이로 그가 힘겨운 숨을 토해 냈다. 더듬거리며 목을 자극해도 쉽지 않았다.

무언가 목을 콱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머릿속의 생각이 소리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재차 입술을 축이며 성대를 들쑤시다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러고도 한참 더 목을 자극하고서야 신음 섞인 말을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하, 으… 아…….”

소리를 확인하고서야 안심한 듯 그가 신경을 제 몸으로 돌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 만큼이나 몸이 무거웠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광경이 지독히도 낯설었다. 서훈은 온통 까맣게 칠해진 어둠을 응시하며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고작 손가락이나 눈을 자극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 자꾸 피곤한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꾸 나른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서훈이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을 다시 곱씹었다.

온전한 기억이라면 죽음인가?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왜 아직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아픈 건지, 살아 있을 때처럼 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죽으면 이런가. 아직은 죽지 않았다고 했는데.

어떤 게 정답인지도 모른 채 서훈은 묵묵히 욱신거리는 심장의 통증을 인내하며 참았다.

“진아, 서유진.”

바로 앞에 유진이 있는 것처럼 허공으로 뻗은 팔이 무언가를 잡듯 휘젓다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 녀석이 여기 있을 리가 없나. 그래. 없겠지.”

텅 빈 허공을 바라보면서 서훈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게 제 안에 남은 감정을 모조리 토해내듯 웃기만 하던 그가 불현듯 휙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의지가 제법이야, 살아야겠다는 그 느낌도.”

가늘어진 눈으로 서훈이 빈 허공을 빤히 주시했다. 어디선가 분명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거기, 누구?”

“그래도 슬슬 받아들일 때가 된 것 같은데.”

고개를 위로 든 서훈이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분명 귀에 상당히 익은 소리였는데.

단순히 착각은 아니었는지, 눈 깜짝할 사이 누군가 서훈의 눈에 비쳤다. 시선이 마주치자 유독 새하얀 얼굴이 보였다.

저번의 그 존재였다.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시선만으로 알 수 있었다. 속내를 꿰뚫을 듯 바라보는 시선이 희미한 웃음기를 담아 서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라리 마음을 비워.”

“무슨…….”

“그게 나을 테니까.”

오히려 그편이 좋아.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서늘한 눈초리와 달리 오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포기하란다, 제 목숨을.

끝내 아래로 툭, 고개를 떨어트린 서훈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무 쉽게 나오는 말에 허탈해졌다.

“하하, 포… 기….”

“그래, 포기.”

“포기, 포기가 되나, 삶이.”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할까. 서늘한 시선을 마주하며 서훈은 못다 한 말을 꺼내 놓았다.

“정말 그거밖에는, 없는 겁니까?”

“시간은 누구한테나 있을 수도, 또는 없을 수도.”

만약, 저 존재가 정말 신이라면 이렇게 잔인할 수는 없는 거라고 서훈은 생각했다.

“그럼 정말로 죽는 겁니까?”

다시 또 죽는 거냐는 물음에는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떨궈버린 서훈의 잇새로 서글프고도 허탈한 숨이 터져 나왔다.

사실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벌써 자신의 코앞까지 성큼 다가와 있음을.

이건 지독하고도 잔인한 꿈이다.

모든 걸 포기하듯 눈을 감으려는 찰나, 지금까지와 다른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렇게나 살고 싶어?”

“당연히, 그 여자를 놓고 갈 수는 없어서.”

그 말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감정 없이 내려다보는 시선 위로 스치듯 한 줄기의 묘한 차이가 드러나는 듯했다.

“증명할 수 있겠어? 인간, 네가 말하는 그 사랑을.”

“도대체 뭘 증명하라…….”

제 마음을 증명하라니, 여기서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증명이란 뭘 뜻하는 건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증명할 기회.”

“당신한테는 그게 가능합니까?”

“그만큼 간절하다면, 죽음에서 건져 줄 수도 있고.”

이번엔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가만히 듣던 서훈의 눈이 뒤늦게 그 말을 이해한 듯 경악으로 크게 부릅떠졌다.

“도대체 당신, 어떤 존재이길래…….”

“나는 미카엘. 인간들이 흔히 부르는 그 존재일 수도, 아닐 수도.”

미카엘이라니. 알아들을 수 없는,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멍하게 듣고 있을까?

서훈이 일렁이던 시선을 천천히 들었다. 아마도 놓지 못한 희망, 그 하나의 끈을 부여잡아서.

“자, 이제는 너도 선택할 시간이야.”

“…그 선택이라는 건…….”

“어차피 내 시간은 무한대라 상관없지만, 인간은 아니잖아?”

“…….”

“슬슬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나라고 해도 타나토스는 피곤하니까.”

나지막하게 소리를 굴려 따라 읊조리는 서훈에게 미카엘은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이며 선택을 강요했다.

“너한테도 마지막 시험이자 다시 사는 기회가 될 거다.”

시험의 끝은 계약의 시작.

서훈은 당장 유진에게로 돌아갈 수 없음을 슬퍼하는 대신, 살 수 있다는 가능성에 초점을 잡았다.

그 시험을 통과한다면 자신은 돌아갈 수 있을까. 회오리처럼 어지러운 생각이 서훈에게로 마구 몰아쳤다.

“살고 싶다면 시험을 통과해 봐, 직접 증명해.”

상황을 만들어 줄 테니, 직접 증명하라며 미카엘은 반쯤 일방적으로 제 말을 쏟아 부었다.

이윽고 끄덕이는 서훈을 본 미카엘이 팔을 뻗어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힘이 실리지 않은 손길은 영혼까지 밀어내는 듯 생경했다.

“…으윽.”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짓눌리듯 서훈이 털썩 주저앉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절대 잊지 마. 그건 현실이되, 또 다른 꿈이라는 걸.”

환청처럼 귓가에 흘러드는 그 한 마디와 함께.

* * *

긴 잠에서 깬 듯 서훈이 눈을 떴다. 곧장 시야로 낯선 벽지가 눈에 띄자 본능적으로 그가 느릿하게 제 얼굴을 더듬거리며 확인했다.

“감촉이…….”

다르다, 지금까지와 전혀 달랐다.

금세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서훈이 욕실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제 얼굴을 보며 안도하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때.

‘그 여자한테 네 기억은 없어.’

‘유진이가 날 기억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어째서?’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게…….’

‘스쳐 지나는 조각인 널 기억하게 만들어 봐라,’

‘…….’

‘나에겐 그게 너의 증명이 되겠지.’

스치듯 떠오르는 대화를 곱씹으며 서훈이 눈앞의 거울을 툭 손바닥으로 짚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자신을 모두 잊었다는 유진의 마음도 이 거울처럼 차가울까.

“하아, 그럴 리가.”

아니,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뜬금없이 떠오른 생각에 사로잡힌 서훈이 고개를 내저으며 떨쳐 냈다.

‘절대 잊지 마. 그건 현실이되, 또 다른 꿈이라는 걸.’

현실이지만, 또한 꿈이다. 그 한 마디를 되뇌며 거울 속의 얼굴을 훑어 내린 서훈이 씁쓸하게 웃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서훈은 기가 막힌 상황에 그저 웃기만 했다.

“기억을 몽땅 지워 놓고, 그걸 되돌리라고?”

도대체 뭘, 어떻게 되돌리라는 거지? 어떻게든 붙든 기회인데도 눈앞으로 차오르는 감정은 막막함이었다.

‘기간은 딱 일주일. 그 여자가 조금이라도 널 기억하게 만들어. 그걸 끄집어낼 정도의 마음이라면 도와줄 테니까.’

세면대에 두 팔을 뻗어서 상체를 기울이며 서훈이 일주일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읊조렸다.

“고작 일주일이라…….”

짧다면 짧고, 또 길다면 긴 시간이 아닌가.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서훈은 금세 모든 상황을 계산하다가 이내 피곤한 듯 인상을 썼다.

그가 움직인 건, 다음 날부터였다.

서훈은 집 근처 길목에서 유진을 무턱대고 기다렸다. 하루에 한 번쯤 습관처럼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아는 탓이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길목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끝에 유진이 나타났고, 서훈은 모르는 사람인 척 곁을 지나가다 일부러 어깨를 탁 부딪쳤다.

“…어?”

“이런, 책이…….”

바닥으로 떨어진 책을 내려다보며 서훈은 들으라는 듯 혀를 찼다. 그 소리에 어깨를 잡던 유진의 시선이 덩달아 바닥으로 향했다.

반은 제 실수라고 여기는 건지 유진이 대뜸 떨어진 책을 집었다.

“죄송해요, 제가 주워 드릴게요.”

“아, 괜찮은데.”

서훈이 쓰게 웃었다. 책이 떨어지며 엽서가 보였어야 했는데. 반쯤 포기한 순간, 유진이 책을 내밀다 말고 튀어나온 엽서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저거!”

엽서를 아는 눈치였다.

“이런 엽서, 혹시 좋아하세요?”

“네? 아, 좀 익숙해서.”

민석에게 부탁해서 책에 넣어 둔 것과 같은 엽서였다.

“저, 그런데 그 엽서 어디서 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잠시 머뭇거리던 유진이 고개를 들어 서훈과 시선을 마주했다.

유진은 착실하게 예상 질문을 던졌다. 모르는 사람인데 기분 나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길이 서훈을 살피기도 했다.

“이거 ○○동 사거리 지나서 ○○고등학교라고 있어요.”

“아하, 그쪽은 잘 아는데.”

“그 앞 문구점에서 파는 엽서예요.”

서훈이 미리 만들어놓은 대답을 유진에게 자연스럽게 읊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유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란 기색이었다.

“○○학교… 라구요?”

“예, 거기 문구점이 몇 개 있는데 아마 첫 번째 집에서 팔 거고.”

“아….”

“지금까지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서훈은 책을 펼쳐서 안에 엽서를 다시 꽂아 넣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최대한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는 어려웠다.

문구점은 함께 살기 시작하고도 유진과 종종 들르던 단골 가게였다. 두 사람에게 집 다음으로 가장 추억이 많이 쌓였을지도 모를 장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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