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57화 (57/67)

❦제57화

남자의 뺨을 감싼 채, 유진이 당황한 듯 그 얼굴을 빤히 주시하던 그때.

‘서… 서훈, 주서훈?’

책을 읽다가 말고 멍하게 허공을 주시하던 유진의 눈이 별안간, 크게 부릅떠졌다.

그래, 드디어 기억났다. 저 남자의 이름이.

서훈, 주서훈.

하나뿐인 제 연인.

“…주, 서훈……?”

그 이름 석 자를 입으로 뱉자마자 놀란 듯 유진이 손에 든 책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투-둑.

서서히 채워지는 작은 기억의 조각은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차곡차곡 원래의 형태를 맞춰 가고 있었다.

“무슨…….”

그림이 완성될수록 유진은 점점 더 당황하고 말았다. 시간까지 거슬러 찾았는데 그걸 잊어버리다니.

‘내가 왜, 어째서 주서훈을 잊어버린 거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며 유진이 불안한 듯 연신 안절부절못했다.

만날 때부터 유독 낯익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것처럼 익숙하고도 편한, 알아보지 못한 게 이상할 만큼.

“왜, 내가 널……?”

틀어 막힌 목을 쥐어짜듯 그녀가 한 마디를 툭 뱉었다.

아니, 아니다. 그 전에 주서훈은 지금…….

‘요즘 말 잘 들어서 진짜 예쁘다.’

‘어어? 그 거짓말 진짜야?’

‘거짓말 아니고 진짜로 예뻐서.’

‘뭐야, 그럼 상이라도 하나 주셨어야죠.’

‘상?’

‘이왕이면 좋은 거.’

‘받고 싶은 거라도 있어?’

그래, 병원이었다. 그 남자는 지금 많이 아프니까. 병원에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공원에서는.

‘다음에 한번 해 봐요.’

‘뭘… 요……?’

‘지나가는 사람 구경도 좀 하고, 하늘도 한번 올려다보고.’

‘…….’

‘볼 거 많지 않아요? 흔들리는 나무도 구경하고.’

서훈은 이상하리만치 멀쩡했다. 언제 아팠냐는 듯 혈색도 좋았고, 출근 때처럼 깔끔하게 차려입은 슈트도 익숙했다.

그럴 리가 없다, 지금쯤 그는 중환자실에 있을 텐데.

‘미안한데, 잠깐 편의점 좀…….’

‘편의점?’

‘…가서, 노트랑 펜 좀 사다 줘… 갑자기, 내가 좀 필요해서.’

휘몰아치는 기억과 현실이 어지럽게 유진의 머릿속을 덮었다. 어디부터가 현실이고, 또 어디까지가 꿈인지도 가늠이 되질 않았다.

지금까지 지독한 악몽이라도 꾼 건 아닐까, 아니, 어쩌면 지금 깨어난 이 상황이 반대로 꿈일지도 모르겠다.

잠든 서훈이 깨길 간절하게 바라다 못해 만들어진 스스로의 환상. 그래도 공원에서 본 그는 건강해 보였다. 그거면 됐다.

“훈이가 아픈 꿈을 꾼 거야, 내가.”

애꿎은 입술을 짓씹으며 유진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썼지만, 여전히 현실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급기야 정신없이 거실을 서성거리던 발은 잠깐 사이, 현관을 뛰쳐나갔다.

다시 한번 더, 서훈을 직접 만나면 알 수 있을 테니까.

* * *

“…헉!”

유진이 헐떡이며 휙 고개를 치켜들었다. 당황한 듯 두리번거리는 시야엔 온통 새하얀 느낌의 병실뿐이었다.

‘방금 꿈이었나? 그래, 훈이가 깨어났을 리가.’

차츰 맑아지는 시야가 또렷했다. 그제야 쓰게 웃으며 유진이 제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뿌옇게 흐린 시야가 어딘지도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분 좋은 꿈이라, 그만큼 깨기 싫었던 모양이다.

서유진 정신이 나갔어, 아픈 사람 옆에 두고서 졸면 어쩌자고. 스스로에게 혀를 차며 그녀가 구부정한 상체를 곧게 폈다.

“하아…….”

나직이 숨을 내뱉으며 서훈을 보자 여전히 그대로였다. 고요하게 잠든 것처럼 그는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며 버티고 있었다.

꿈에선 멀쩡하더니.

이상하다, 꿈이 꼭 현실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는데. 희미해진 꿈을 더듬으며 그녀가 서훈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아주 긴 꿈이었다.

그건 꿈이자 서글픈 과거의 조각처럼도 느껴졌고, 한순간에 사라질 허망한 물거품 같은 모호한 신기루였다.

“뭐, 그래도 좋긴 했어. 내가 널 잊어버린 이유는 모르겠지만.”

“…….”

“꿈이라도 좀 서운했겠다, 주서훈.”

혼자만 담아 두기엔 묘한 꿈이라 섭섭했다. 그래서 잠든 서훈을 붙들고 그녀는 이런저런 잡다한 수다를 한창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때,

“…어? 이게 왜……?”

규칙적으로 울리던 기계에서 불현 듯 길고도 작은 알람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삐―

마치 누군가의 죽음을 암시라도 하는 것처럼.

서훈이 죽을 리가 없는데. 놀란 유진이 급히 호출 버튼을 누르며 서훈에게 다가갔다.

“훈아? 주서훈? 너 갑자기 왜 이래?”

삐―

소리는 그가 아닌, 기계에서만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훈아, 훈아? 주서훈!”

“잠시만요!”

그런 유진을 이제 막 들어온 간호사가 뒤로 밀치며 다른 간호사들을 호출했다.

“주서훈 씨? 갑자기 왜 멈춘 거야?”

“당장 CPR부터 해야겠어요!”

“바로 준비하고 과장님 호출 넣어! 빨리!”

다급하게 움직이는 간호사와 그 옆에서 고함치고 있는 인턴, 담당 의사를 호출하는 또 다른 간호사까지.

“제대로 체크했었지?”

“네, 아까 체크할 때까지 다 정상이었어요.”

“과장님 콜 됐어?”

“네, 최대한 빨리 오신대요.”

멀찍이 떨어진 유진만 제외하고 모두가 분주하게 서훈의 침대를 에워싸고 있었다.

“아직이야, 조금 더 올려.”

“네? 더 올려요?”

“빨리빨리 안 움직일래?”

모르겠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째서지, 왜 다들 저러는 건데.’

그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유진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후, 훈아?”

들릴 듯 말 듯 겨우 뱉어낸 한 마디엔 이미 진득한 울음기가 담겨 있었다.

속절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지도 못한 채, 그녀가 한 걸음씩 서훈에게로 다가갔다.

“하아, 하아, 한 번 더!”

푹. 콰―당.

거칠어진 의사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은 앞으로 다가가는 유진을 재차 안 된다면서 뒤로 밀어냈다.

“저기…….”

“안 돼요, 보호자 분은 기다리세요.”

몇 번이고 의사의 외침이 들려오고 기계에서는 귀를 먹먹하게 만들 소리만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의료진들에게 가려진 서훈이 보이지 않았다. 한층 불안해진 그녀가 초조함을 어쩌지 못한 채, 마구 발을 굴렀다.

급기야 힘껏 움켜쥔 손바닥으로 날카롭게 손톱이 파고들려는 찰나, 안도하듯 간호사가 나직이 숨을 뱉어냈다.

“하아, 됐다!”

“지금 막 바이탈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제야 긴장이 풀어진 듯 유진이 그 자라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다행, 다… 다행이다…….”

정상적으로 바뀐 기계음과 함께 한숨 돌리던 간호사가 놀란 듯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보호자 분 괜찮으세요?”

“아, 긴장이, 긴장이 조금 풀려서.”

“그럴 만하죠. 이제는 마음 놓으셔도 돼요.”

“…감사… 합니다…….”

간호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며 유진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어쩐지 전신의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몸에 힘이 없었다. 잔뜩 늘어진 몸이 한순간 확 풀어진 듯, 전신으로 안도가 퍼져 나갔다.

한순간 추락해 버린 기분이 이럴까. 건강해진 그를 꿈에서 만난 직후, 눈 뜨자마자 그의 심장이 멈춰 버린 현실이라니.

모두가 나간 텅 빈 병실에서 애써 스스로의 감정을 삼킨 뒤에야 유진이 힘이 풀린 듯 서훈의 곁에 앉았다.

“아주 사람을 들었다가 놨어, 주서훈.”

굳게 감긴 눈동자는 그대로였지만 잠깐 사이, 환자복이 엉망이었다.

이 꼴이 뭐냐고, 다 큰 어른이. 듣지도 못할 소리를 중얼거리며 유진이 흐트러진 연인의 환자복을 정리한 뒤, 손을 올려 서훈의 뺨을 쓸었다.

그사이 자라난 수염이 따갑게 손가락을 찔렀다. 피부라고 해도 크게 다를 건 없는 상황이었다.

항암치료 때문인지 볼썽사나울 만큼 파리해진 혈색이며 비쩍 마른 입술도 꽤 거칠거칠하게 변했다.

하긴 이 상황에서 혈색이 좋은 게 더 이상할 거다. 오히려 꾀병처럼 보이는 것도 난감하긴 하겠다.

“주서훈 아주 눈 뜨기만 해봐. 해 준 거 몇 배로 다 갚으라고 할 거야.”

거칠어진 뺨을 꾹 누르며 유진은 일부러 더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억울해서라도 당장 눈을 뜨라는 뜻이었다.

그게 의외로 효과를 본 것일까.

끊길 듯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유진의 시야로 파르르 떨리는 서훈의 눈꺼풀이 보였다.

“…어? 훈아? 주서훈? 너 내 말 들려? 들리는 거지?”

놀란 듯 크게 눈을 부릅뜨며 유진이 바짝 고개를 수그리는 찰나, 지금껏 꽉 닫힌 채 움직이지 않던 서훈의 눈꺼풀이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드디어, 주서훈이 깨어났다.

* * *

어렵사리 깨어난 것 치고도 상태는 급속도로 호전되고 있었다. 심장이 한 번 멈췄다고는 여길 수 없을 만큼이나 놀라운 회복력이었다.

“이런 식으로 깨어날 줄은 저희도 예상 못 해서.”

“오히려 더 안 좋아졌다거나…….”

“혹시 몰라서 검사도 좀 해 봤는데 잘 나왔으니 괜찮을 겁니다.”

도민도 처음에는 유진만큼이나 놀란 눈치였으나, 검사 결과를 보고 조금 안심한 듯했다.

“진짜 괜찮은 거겠죠?”

“예,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까 본 게 있어서 그런가. 자꾸 불안해져서.”

“오히려 그게 전화위복이 된 거죠.”

안심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도민은 의사로서 결과를 자세하게 설명해주며 안심시켰다.

그러고도 무언가 자꾸 걸리는지 마지막으로 그는 당분간은 잘 지켜봐 달라, 유진에게 당부까지 건넸다.

“문제없다고 하셨는데 왜…….”

“이런 경우는 저희한테도 드문 케이스라서요.”

물론, 도민의 걱정은 말 그대로 기우일 뿐이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서훈은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의사들이 놀랄 만큼이나.

금방 산소 호흡기도 떼어낼 수 있었고, 처음 사라진 그를 찾으러 그녀가 병원으로 발을 들인 첫날보다도 그사이 혈색은 더 좋아져 있었다.

마치 신의 가호라도 받은 사람처럼.

그런 서훈을 모두가 신기하게 여겼다. 옆에서 전부 지켜본 그의 선배이자 담당의인 도민도 기적이라 일컬었고, 유진의 생각도 비슷했다.

“기적이라, 글쎄.”

하지만 서훈의 생각은 조금 달랐나 보다.

“…훈아?”

“정말로 신의 기적이 있긴 할까?”

오히려 모든 말을 부정하듯 묘한 의문을 표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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