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없다면 그날 넌 죽었겠지. 내 눈앞에서.”
“내가 널 두고 죽을 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왔을걸.”
단호한 그 대답이 유진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래서 넌지시 묻자 서훈은 다시 또 묘한 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직접 겪었으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뭐야 그 웃음은? 꼭 비밀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웃네?”
“기적이라는 말이 참 모호하게 들려서 말이야.”
“내가 봐도 기적이야. 직접 봤으니 믿을 수 있어.”
유진은 스치듯 그의 심장이 멈추는 순간 들린 소리를 되새기는 듯 구겨지려는 표정을 다잡았다.
“뭐든, 이제 다 괜찮을 거야.”
“그 말 들으니까 진짜 괜찮을 것 같긴 하다.”
“내 말 믿어, 진짜 괜찮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서훈의 목소리는 제법 단호했다. 마치 자신처럼 미래를 아는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설마, 그럴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너무 예민해진 것 같다. 쓰게 웃으며 그를 향해 유진은 그러냐며 웃을 뿐이었다.
어쨌건 주서훈을 되찾았으니 그걸로 됐다. 가볍게 정리를 하며 유진은 트레이를 올려, 손수 만들어 온 전복죽을 활짝 펼쳤다.
아직 서훈은 소화 장애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밥 대신 대부분 죽을 먹었고, 일부러 유명한 가게까지 가서 직접 포장해 온 것이다.
원래대로 항암을 받았더라면 지금 더 나아졌을까. 아닐 거다. 이미 합병증으로 혼수상태까지 간 그를 퇴원시켜 줄 도민이 아니었다.
“곧 점심 나오지? 그거 이번엔 건너뛰고 이거 먹자.”
“웬 전복죽? 설마 직접 만들었어?”
불쑥 앞으로 내민 전복죽과 유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서훈이 모호하게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표정을 읽은 유진이 와락 인상을 썼다. 누군 좋은 거 먹인다며 다쳐 가며 만들다 포기했는데 저 다행이라는 표정이라니.
사귀는 내내 제 손으로 직접 뭘 만든 적도 몇 번 없지만 나름대로 애를 쓰기는 했었다.
“포장이거든? 그리고 내가 만들면 안 먹으려고?”
“솔직하게 진아, 다 좋아도 요리까지는 감싸기 힘들더라.”
“주서훈, 내 요리가 그렇게 별로였어?”
서운한 마음이 울컥 차오르자 유진이 눈꼬리를 휙 치켜올렸다.
“어? 그게, 별로라는 게 아니라…….”
“더듬는 거 보니 딱 알겠네. 뭐 일일이 변명을 해.”
괜한 심통으로 그를 흘겨보고도 유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냥 웃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기분이 상했을까, 힐끔거리며 곁눈질하는 시선이 보이는데 무슨 말을 하랴.
못내 귀엽기까지 했다. 유진은 애써 확 풀리려는 입매를 다잡으며 서훈에게 손에 쥔 수저를 내밀었다.
나 기분 상했으니까 말 잘들어, 라는 느낌을 가득 실어서.
“일부러 유명한 곳까지 가서 사 왔으니까, 다 먹어.”
“당연하지, 누가 사 준 건데 이걸 남겨.”
건네주는 수저를 받은 서훈은 연신 기분 좋은 듯 싱글벙글이었다.
이건 남의 속도 모르고 좋단다. 차마 드러내지 못할 한숨을 삼키며 이내 유진이 빈 종이컵에 냉장고에서 꺼낸 물을 따랐다.
이건 누가 보더라도 그녀가 병간호를 해 주는 게 아니라 아픈 사람을 괴롭히는 꼴이 아닌가.
어쩐지 제 처지가 우스웠지만, 다시 생기가 도는 모습을 보며 유진은 그를 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 * *
의사들은 자신이 맡은 환자를 고치겠다는 의무감과 함께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에 관한 호기심도 적지 않았다.
도민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증상 관찰에만 몇 주가 걸렸다. 그는 호전되는 속도가 예상치를 훨씬 웃돈다는 걸 확인한 뒤, 서훈에게 항암을 다시 권했지만.
“됐습니다, 이제 항암을 그만하죠.”
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거절하는 서훈을 보며 오히려 놀란 사람은 도민이었다.
“뭐? 이만큼이나 좋아졌는데 그걸 포기하겠다고?”
“설마요, 누구보다 간절한 사람은 난데.”
“그럼 이유가 뭐야? 이유나 좀 알자.”
다그치는 소리에도 서훈은 곤란한 듯 미간을 찡그리다가 한숨을 작게 쏟아냈다. 자기도 답답하다는 듯이.
“우선 저랑 같이 지켜보시죠, 얼마나 나아질 수 있는지.”
“알아듣게 말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그 말을 듣고도 서훈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듯 미간을 찡그릴 뿐이었다.
오히려 그게 도민의 답답함을 더 부추긴 듯했다. 이내 오만상을 구기며 그가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정확하게는 설명이 쉽지 않은데.”
“간단하게 풀면 되잖아.”
“나중에 말할 테니까, 우선은 한두 달만 좀 지켜보죠.”
반쯤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면서 그가 곤란하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도민도 그걸 보고서야 무언가가 있음을 약간 느낀 모양이다.
“하아, 나도 모르겠다.”
치켜 올라간 눈을 누그러뜨리며 도민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의사로서도 환자가 거부하면 억지로 치료를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밖에 없을 터.
물론, 그대로 다 넘어가 줄 도민이 아니었다.
“유진 씨하고는 상의한 거야, 그거?”
“그 녀석한테도 비밀로 부탁합니다, 의외로 잔걱정이 많아서.”
불쑥 유진이 거론되자 서훈이 한 박자 늦게 도민에게 넌지시 비밀로 해 달라며 부탁을 넣었다.
그나마 유진이 자리를 비운 틈에 찾아와서 다행이었다. 옆에서 이걸 들었다면 왜 치료를 거부하냐며 길길이 날뛰고도 남았을 거다.
“알았다, 우선 네 말대로 지켜보자.”
“고마워요, 선배.”
“대신 증상이 심해지면 바로 유진 씨한테 말한다?”
끝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긍의 말이 흘러나왔다. 심해졌을 때를 빌미로 조건부를 더 내걸려던 도민은 오후 진료가 임박한 듯 급히 병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얼마 뒤, 잠깐 집으로 간 유진이 돌아왔다. 몇 분만 늦었어도 그대로 부딪혔을 텐데, 그나마 타이밍이 좋았다.
“훈아, 나 왔어.”
“빨리 왔… 너 품에 그건 다 뭐야?”
“물건 좀 챙겨 온다고 했잖아.”
병실로 들어서는 유진의 품엔 커다란 가방이 들려 있었다. 물건을 가득 채운 가방을 내려놓으며 유진이 살겠다는 듯 길게 숨을 토해냈다.
“으, 무거워서 죽는 줄 알았어.”
“적당히 가져오지, 아니면 민석이라도 부르든가.”
대놓고 나민석을 언급하며 그가 보일 듯 말 듯 미간을 찡그렸다.
딱 봐도 조금이 아니었다.
두 팔을 벌려야지만 들 수 있는 크기의 쇼핑백으로 한 가득이라니, 도대체 뭘 싸 왔나 싶을 지경이었지만.
“걔도 사회인이잖아, 아무 때나 부를 수는 없지.”
“연락하면 알아서 빠져나올 놈이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게다가 너 없을 때 도움도 많이 받았고.”
의외로 그의 기분이 상한 부분은 민석을 챙기는 듯한 유진의 저 태도였다.
하지만 유진 앞에서 왜 나민석을 챙기느냐며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도 돌연 자취를 감춘 서훈이었으니 말이다.
“걔가 나 없을 때 많이 도와줬다고?”
“뭐, 이래저래.”
쇼핑백에서 꺼낸 수건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유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뒤로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가 그때의 일을 떠올리기도 싫은 듯했다.
질투가 나도 이건 아닌데.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달은 듯 서훈이 스스로를 탓하듯 혀를 찼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가다듬으며 그는 유진이 가져온 쇼핑백 속 물건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뭘 바리바리 챙겨 왔어, 무거울 텐데.”
“그냥 좀 챙겼어, 이것저것.”
“수건도 다 있는데 몇 개씩이나 가져오고.”
쇼핑백에서 꺼낸 물건을 둘러보는 서훈의 표정이 묘해졌다.
항암치료를 들어가지 않으면 일이 주 안에는 퇴원할 거다. 굳이 뭐하러란 느낌이었지만, 제 딴에는 신경 써서 챙긴 눈치였다.
“여기서 계속 빨아가며 쓰는 건 찝찝하잖아.”
“괜찮아, 너 힘든 것보다야 낫지.”
서훈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그녀 또한 쓸데없이 너무 과하게 챙겨왔음을 깨달은 듯했다.
무심결에 뭘 자꾸 넣기는 했다면서 곤혹스럽게 웃는 유진을 향해 서훈이 별다른 말 없이 제 팔을 내밀었다.
“그것보단 이리 좀 와. 열심히 기다린 상 같은 거 없어?”
“갑자기 무슨 상을 줘, 저리 가.”
“얌전히 올 때까지 기다렸잖아, 뽀뽀라도 해 주면 안 돼?”
다시 언제나의 주서훈으로 돌아간 채로.
* * *
당연히 병원 내에서도 서훈의 얘기는 알음알음 퍼져 나갔다. 입으로 흘러 나간 소문은 그만큼이나 눈덩이처럼 크게 부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따금 병실 주변으로 낯선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그러려니 넘기는 유진과 달리 그는 꽤 예민하게 반응했다.
“쯧, 병원에 항의라도 넣던가.”
“그만큼 간절하단 거잖아, 그러려니 넘겨.”
투덜거리는 서훈을 간호하며 유진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로 달랬지만.
“그래도 자꾸 힐끔거리는 건 거슬려.”
“그냥 입장을 바꿔. 너라면 안 그럴 것 같아?”
“뭐, 그거야…….”
서훈은 매번 그 말을 듣고서야 조용히 입을 닫았다. 은근히 제 기분을 살펴 주는 연인의 행동이 기분 좋았다.
어쩌면 그게 좋아서 일부러 더 짜증을 내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좋은 게 좋은 거다.
“휴게실에서 쉬기는 힘들겠네.”
“도로 병실로 갈까?”
“그래, 차라리 그게 더 속이 편하겠어.”
거슬리는 얼굴로 그가 휴게실로 가던 걸음을 짜증스럽게 돌렸다. 난감한 듯 쓰게 웃으며 그녀가 곧장 서훈의 뒤를 따랐다.
“별것도 아닌 일로 짜증 내기는.”
“좀 거슬려서. 너한테 짜증 내는 거 아냐.”
“알아, 나한테 화낼 리가 없잖아?”
지은 죄도 있는데. 새초롬한 눈길로 덧붙이는 유진의 입가가 짓궂게도 치켜 올라갔다.
역시나 이제 유진에게서 불안함 따윈 엿볼 수 없었다. 그 묘한 변화를 마주하며 서훈은 가끔 의문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재밌다는 듯 휘어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서훈이 덩달아 찡그려진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평생 갚아도 이자만 겨우 낼 것 같아서 걱정이다.”
“어머, 돈도 많으면서 왜 이러실까?”
타박하는 말투와 달리 산책이 실패로 돌아가서 제법 아쉬운 얼굴이었다. 몸이 좀 나아져서 나온 산책이니, 아쉬운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