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차라리 특실로 옮겨 달라고 할까?”
“뭐? 갑자기 거긴 뭐하게?”
“여긴 둘이서 지내기도 불편하잖아. 거기가 낫지.”
넌지시 묻는 서훈에게 그녀가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반응 한번 참 빠르기도 하다.
“그냥 있을래. 차라리 불편하니까 빨리 퇴원하는 게 낫지.”
“으음, 그건 또 그런가?”
수긍하듯 끄덕이고도 서훈은 처음부터 넓은 병실로 잡을 걸 그랬다며 저 홀로 아쉬움을 삼켰다.
사실 여기로 잡은 이유는 가족 때문이기는 했다. 괜히 특실로 들어갔다가 부모님 귀에 얘기가 들어가면 여러모로 좋을 게 없었다.
물론, 말기 진단을 받을 당시엔 그것 말고도 어머니가 충격을 받으실까 염려한 이유도 없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서훈은 병실에서 다른 날처럼 유진과 둘이 느긋하게 지냈다. 저녁을 먹고, 또 평소엔 잘 보지도 않던 드라마를 시청했다.
“케이블에는 은근히 수사물이 많은가 봐.”
“그러게. 방금 그것도 꽤 볼만했고.”
“영화 같더라. 요즘 드라마 잘 만든다, 배우도 좋고.”
서훈을 보며 씩 웃은 뒤, 유진이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산책 한 번 못 하고 하루가 날아간 기분이지만, 서훈도 별로 불만은 없었다. 반쯤은 그녀의 기분 전환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코앞으로 닥쳤을 때 가장 후회한 것 중 하나가 유진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부분이었다.
20대가 된 후로 현실이 그랬다. 각자 마감과 회사에 치여 온전히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는 날이 생각보다 적었다.
유진에게 마감이 없는 주말이면 함께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것도 사실 1년에 몇 번 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게는 죽음 앞에서 겪은 후회를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랐다.
* * *
불이 꺼진 병실에서 희뿌연 무언가가 보일 듯 말 듯 움직였다. 창문으로 들어온 가로등에 반사되듯 비친 서훈의 팔이었다.
이미 자정을 넘긴 새벽이었다.
막 자다가 깬 듯 몽롱하게 눈을 찡그리며 서훈이 살짝 치켜든 제 손과 이어지는 팔을 묘한 눈길로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남의 몸이라도 보듯.
‘절대 잊지 마, 인간. 그 목숨 값만큼 나한테 빚졌다는 걸.’
‘…목숨 값이라면…….’
‘말했잖아? 나중에 네가 도와줄 일이 있을 거라고.’
그저 꿈이라고만 여겼는데 그것도 틀렸음을 알아차렸다. 미카엘의 말대로 살게 된 이후로.
‘인간은 가끔, 기적을 마주할 때가 있지.’
‘나처럼 말입니까?’
‘비슷해, 단지 인간이 신에게 바라고 염원하는 기적과는 다르겠지만.’
‘다르다면 내가 살아난 건…….’
‘따지고 보면 계약.’
‘이것도 계약?’
‘그래, 영혼과 그 파동을 담보로 하는 악마와는 약간 본질이 다를 뿐.’
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은 서훈으로서도 섣불리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천사와 악마, 그리고 신.
그 미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서훈은 나이가 적지 않았고, 그저 모든 상황이 꿈을 꾸는 듯 흐릿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이미 다 꿰뚫어 본 듯한 시선이 곧장 서훈에게로 무심히 날아들었다.
‘잊지 마, 꿈이라는 착각도 안 돼.’
‘깨고 나면 없어질 현실이면 그게 곧 꿈인 겁니다.’
‘하지만 단지 꿈일까? 넌 이미 살아났을 텐데.’
‘…….’
‘인간들은 그걸 기적이라고 부를 테고.’
그제야 얼핏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서훈은 깨달았다. 무심히 늘어지는 목소리가 다른 날보다 약간 지친 듯, 유난히도 아래로 까라지고 있었다.
‘혹시 천사도 아픕니까?’
‘신경 쓸 것 없어. 널 살리느라 힘을 써서 그런 거니까.’
‘그런 것 치고도 목소리가 조금…….’
‘아, 그 여자도 잘 챙기고. 쉽지 않았을 텐데.’
시간을 거스르는 인간이라, 드물게 적응력도 좋고. 들릴 듯 말 듯 살짝 덧붙여진 말을 아쉽게도 서훈은 듣지 못했다.
‘거기 어딘가에 있을 거다, 계약의 증표는.’
하지만 별 상관없다는 듯 미카엘은 서훈의 팔 어딘가를 흘깃 가리킨 뒤, 어둠 속으로 서서히 물들어갔다.
그건 모든 것들이 눈처럼 하얀 남자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악마의 그것처럼, 잡아먹힐 것만 같은 까마득한 심연처럼도 보였다.
“어째서 그런 꿈을 다 꿨지?”
잠결인데도 현실처럼 생생한 목소리에 서훈이 미간을 잘게 구겼다.
어쩌면 그건 꿈이라 착각하는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마냥 흘려 넘긴 그 남자와의 계약이 정말 효력이 생긴 걸지도 모르고.
이제라도 확인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일들이 꿈이지만, 또한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만한 그런 확신이.
애써 흐릿하게 풀린 시야를 다잡으려 서훈이 미간 사이를 좁혔다. 점점 초점이 또렷해지며 어둠에서도 희뿌연 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서훈이 팔을 걷어 올리다 일순, 행동을 멈칫 굳혔다.
“…으음…….”
곁에서 잠든 유진이 불편한지 잠결에 뒤척이고 있었다.
‘잠이라도 집에서 편히 자라니까, 쯧.’
하여간 사람 말도 징하게 안 듣는다. 걱정스럽게 유진을 내려다보며 서훈이 나직이 혀를 찼다.
금세 시선을 거둬들인 서훈이 다시 환자복의 오른쪽 소매를 어깨까지 쭉 단번에 끌어 올렸다.
어디쯤인지 찾는 것쯤은 간단했다. 설핏 깬 정신으로도 꿈에서 느낀 묘한 열기가 도드라지게 느껴진 탓이었다.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생경한 감각.
어딘가 데일 듯이 뜨거운데도 화상과는 달랐고, 아프지도 않았다. 그런데 온통 신경이 집중되는 묘한 감각이었다.
서훈은 팔뚝 어딘가를 더듬으며 올라간 손끝으로 화끈거리는 한 분위를 쓱 만졌다.
‘이게 그건가?’
찾았다, 계약의 증표라는 그걸.
피부 위로 깃털이 하나 내려앉은 것처럼 보이는 작은 표식은 어둠에서도 묘한 빛을 내고 있었다.
가볍지만은 않은 존재감이었다. 그건 꼭 무언의 약속을 기억하라는 것처럼 열기를 퍼트리며 서훈을 압박하는 듯했다.
* * *
문병이라며 생전 얼굴도 들이밀지 않던 민석이 대뜸 병실로 찾아왔다. 퇴원하기 며칠 전이었고. 서훈의 소문도 꽤 심해졌을 즈음이었다.
“제법 멀쩡하네, 그때보다는.”
병실로 들어선 그는 서훈을 찬찬히 훑어보며 놀랐다는 얼굴로 한마디를 툭 뱉었다.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예의라고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도 모를 첫마디가 아닌가. 서훈이 미간 위로 옅은 주름을 잡았다.
“오자마자 시비 걸지 말고.”
“보기 좋다고, 새끼야.”
그런 것치고는 민석의 표정이 영 못마땅했다.
“이왕이면 말하고 그 표정을 좀 일치하던가.”
예상대로 너희처럼 사방에 평지풍파 일으키며 사귀는 것도 힘들겠다며 그는 은근히 몇 마디를 덧붙였다.
보기 좋기는, 돌려서 시비 거는 거겠지. 들릴 듯 말 듯 낮게 중얼거리며 서훈이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문병도 아닌 민석의 방문이 그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하필 도민처럼 일부러 유진이 없는 시간으로 골라 찾아온 것도 그렇고.
“선배도 그렇고 너까지, 다들 유진이 없는 시간대 체크라도 하냐?”
“뜬금없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다들 유진이 없을 때만 타이밍 좋게 들어오길래.”
썰렁한 그의 두 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또 뭐하자는 짓이냐. 무심한 눈길을 볼썽사납게 구기며 서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문병까지 온 이유는?”
“네 눈엔 내가 문병 온 것처럼 보여? 아닐 텐데.”
단호히 받아치며 민석이 침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소파에 느긋하게 걸터앉았다.
말끝으로 날을 세우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금세 민석이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빤히 주시하는 눈길을 보니 따로 할 말이라도 있는 눈치가 아닌가. 그것도 하필 드물게 서훈이 혼자 있는 시간대였다.
유진이 이 병실을 나설 때는 몇 가지의 상황밖에 없었다. 사야 할 물건이 있다거나 집에 일이 생겨서 들를 때, 혹은 서훈이 뭔가를 부탁할 때가 전부였다.
“그래서 온 이유가 뭔데.”
섣불리 운을 떼지 않는 민석의 태도가 답답한 듯 서훈이 인상을 쓰며 먼저 물었다.
“눈치챘냐, 너한테 따로 할 말 있어서 온 거.”
“네 입으로 문병 아니라며,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뭐, 사실 별 얘기는 아니다만.”
“……?”
“그냥 너한테 나도 약속 하나만 좀 받자.”
“무슨 약속을 받아?”
민석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서훈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앞으로 또 비슷한 일 생기면 서유진한테는 제대로 말하라고,”
“…아, 그건…….”
“오지랖인 건 안다만, 이번에 그 행동은 내가 봐도봐도 아닌 것 같더라.”
그 말과 함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서훈이 도로 열리던 제 입을 닫았다.
“너희가 하루 이틀 사귄 사이야?”
민석이 재차 날카롭게 그를 탓했다. 따끔하게 찔러 들어오는 시선이 대뜸 사라져 버린 서훈의 행동을 지적하는 것이리라.
“서훈아, 사귄 시간이 긴 만큼은 사실대로 말해 주는 게 예의다.”
“누가 대우를 안 해? 내가 서유진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지. 내 말이 틀렸어?”
전부 다 맞는 말이었다.
유진을 위한다는 생각은 반쯤 스스로를 위한 핑계였을지도 몰랐다. 알아차리고도 외면하던 사실을 대뜸 찾아와서 민석이 끄집어낸 것이다.
“어이, 주서훈.”
“…그래.”
“너도 내 친구 아니었어?”
날카로운 칼끝이 사정없이 찌르는데도 따끔한 통증만이 느껴질 뿐, 크게 아프다는 자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양심의 가책일까. 지금 화를 내는 민석에게서 드러난 서운한 감정 때문일 거다.
“걔한테 죽어도 말 못 하겠으면 나한테라도 했어야지.”
서훈도 할 말이 없어진 듯 소리 없이 씁쓸하게 웃었다. 어쩐지 마냥 풀어져 있다가 확 잠이 깬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널 탓하자는 것도 아니고.”
“입이 열 개라도 무슨 할 말이 있겠냐, 내가.”
스스로 수긍하는 그에게 민석은 혀를 차며 그게 아니라는 듯 경고처럼 한숨 섞인 말을 덧붙였다.
“내 말은 유진이도 강하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