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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앓다-60화 (60/67)

❦제60화

“지금 장난해? 그 여린 녀석이 강하다고?”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입바른 말이라도 괜한 짓했다는 걸 알려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유진이 병원으로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서훈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틀렸다는 걸.

뻔히 보이는 실수를 알면서도 지금껏 제 고집으로 인해 미안하단 말조차 꺼내지 못한 것이다.

“어쨌든 이번 일은 고맙다, 나 대신 유진이 곁을 지켜줘서.”

“알면 다 낫고 몇 배로 갚아라.”

“그래,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꼭 갚으마.”

괜찮다는 흔한 말 대신 민석은 퉁명스럽게 그 말을 받아쳤다. 오히려 그게 나민석다워 안심이 되는 잔소리였다.

생각해 놓고도 우스운 듯 서훈은 당당하게 제 병실을 차지한 오랜 친구를 비스듬한 시선으로 빤히 주시했다.

어쩌면 그래, 냉정히 아플 연인을 떨어트려 놓고도 안심할 수 있었던 건 민석이 곁에 있어서가 아닐까, 조금은 늦은 결론을 내리면서.

* * *

다시 돌아온 유진은 소파를 차지하고 앉은 민석을 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깐 근처에 일 때문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의외일 수밖에.

“뭐야, 나민석 언제 왔어?”

“좀 됐어. 그보다 별로 안 반가운 표정이다?”

“당연한 소리를 해. 반가울 리가.”

오라고 할 땐 죽어도 안 오더니. 투덜거리며 침대로 간 그녀가 옆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서훈의 곁에 앉았다.

“훈아, 점심은?”

“먹어야지, 같이 먹으려고 일부러 기다렸어.”

“그거 다행이다, 너 주려고 샀는데.”

마치 뒤에서 지켜보는 민석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유진은 포장해 온 음식을 그에게 펼쳐 보여주며 씩 웃었다.

이따금 그가 좋아해서 함께 가던 가게의 카스테라였다. 담당 의사한테 허락도 받았으니, 크게 탈이 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선배한테 혼나는 거 아냐?”

“괜찮아, 내가 더 물어보고 나서 사 온 거야.”

역시나 걱정하는 그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유진이 손을 내저었다.

“꼼꼼하네, 우리 마누라.”

“현모양처 감이지? 나도 다 알아.”

그런 두 사람이 보기 싫었던지 불현 듯 뒤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크게 흘러나왔다.

그제야 뒤에 있을 민석의 존재를 다시 깨달았다는 듯 유진이 뻔뻔하게 휙 고개를 돌렸다.

“맞다, 너 있었지?”

“그만해라, 아주 무서워죽겠다.”

“내가 뭘. 그래서 왜 왔다고?”

카스테라를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으며 유진이 알면서도 재차 물었다.

“괜찮아졌다니, 이놈 몰골이나 보러왔지.”

“…네네, 그러시겠죠.”

퍽이나 고맙다는 듯 유진이 눈을 흘겼다. 의외인 듯 보여도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진 않았다.

“제법 건강해 보이네.”

“예쁘게 좀 말해 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남자끼리 예쁘게는 무슨.”

말은 저렇게 해도 자신만큼이나 서훈을 걱정했을 민석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지낸 세월이 까마득한데 그 속내를 짓궂게 감춘다고 모를 리가 없었다.

그냥 서훈이 좋아졌나, 걱정이 돼서 왔다고 하면 누가 잡아가기라도 하나. 하여간 솔직하지도 못해선.

“그래서 문병 온 거라고? 믿어도 돼?”

“당연하지. 그런데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또 뭐가.”

“문병 왔다고 구박하는 경우가 어딨냐, 사람 서럽게.”

느릿하게 기댄 상체를 곧게 세우며 민석이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쳐다보는 유진의 시선으로 황당함이 차올랐다.

사람이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나민석이 분위기 풀자고 일부러 저리 애를 쓰는 꼴도 다 보고. 뻔히 보이는 속내를 모르는 척 유진은 그 장난에 동참하기로 했다.

“훈아, 쟤 지금 쇼하는 거지?”

“글쎄다.”

물론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었지만.

“딱 봐도 우리 앞에서 불쌍한 척하고 있잖아.”

“저런 걸 또 굳이 쇼라고 할 것까지는…….”

“에이, 그러지 말고 잘 봐 봐.”

“뭐, 보기에 따라 약간 그렇게 보이기는 하네.”

어쩔 수 없다는 듯 서훈이 쓰게 웃었다. 스치듯 닿은 둘 사이의 시선엔 무언가를 교환하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달라졌다, 저 둘의 느낌이.

유진이 그걸 깨달은 것도 며칠 전이었다. 서훈과 잠깐 민석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 묘하게 반응이 예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지금껏 나민석이 먼저 찾아오지 않았으니,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 * *

꼬박 몇 주를 더 병원에서 보낸 뒤에야 서훈은 겨우 도민에게 통원 치료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

물론, 설득하는 일도 쉽진 않았다.

만약이라는 사태를 염두에 둔 도민이 쉽게 서훈을 퇴원시키려고 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입장의 차이였다.

기적이란 말을 쓸 만큼 서훈이 확 좋아진 건 사실이었지만, 심장까지 멈춘 전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진 몰래 서훈이 자꾸 퇴원을 요구하자 도민도 나중에는 반 포기 상태로 뒤바뀌었다.

“하아, 퇴원해라. 퇴원해.”

“정말이죠? 선배 나중에 말 바꾸지 말고.”

“됐으니까, 내일 당장 가.”

얼른 가 버리라며 도민이 진저리를 치자 오히려 놀란 사람은 유진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어제까지도 퇴원은 아직 안 된다고 못을 박았던 의사의 달라진 태도가 의외였으리라.

유진은 동그래진 눈으로 서훈과 건너편의 도민을 번갈아 봤다.

“퇴원이 아니라 쫓아내는 말투네.”

“네놈이 오죽 들들 볶았어야지. 피곤해 죽겠다.”

이제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그는 서훈을 노려보며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그래도 병원은 꼬박꼬박 와.”

“예, 그래야죠.”

“유진 씨가 통원 올 때마다 감시 좀 해 주세요.”

“걱정 마세요, 절대 안 빠지게 확인할게요.”

걱정 말라며 유진이 씩 웃었다. 그나마 서훈보다는 믿음이 가는지 은근히 신경질적이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저 녀석이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어서.”

“…본인 앞에 두고서 그게 할 소립니까?”

“내가 어디 틀린 말이라도 했냐? 구구절절 맞는 말인데.”

가만히 듣던 서훈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유진에게 친절한 의사처럼 드러낸 미소를 도민이 일순 싹 굳힌 채 서훈을 삐딱하게 주시했다.

“너도 찔리기는 하냐?”

“그런 말은 안했습니다만, 게다가 매주 통원도 좀 과하고.”

“퇴원시키는 것도 고맙게 생각해라.”

도민은 그가 퇴원하는 순간까지도 불안한 듯 통원 얘기를 몇 번이나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처방 약을 굳이 일주일 단위로 줄 필요가 없는데도 그 이상은 안 된다며 딱 잘라 거절한 것도, 증상이 악화될 우려 때문이었다.

“어쨌든 퇴원 잘하고.”

“오전에 나가도 상관없는 거죠?”

“마음대로 해라, 새끼야.”

어쨌거나 도민이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바쁜 와중에도 퇴원 얘기를 하러 후배라고 병실로 잠시 들렀을 테니 말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억누르며 유진은 병실에서 둘이 남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정말로 짬을 내서 온 건지 도민은 대화하는 내내 습관처럼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기를 반복했다.

“주서훈, 너 혹시 퇴원시켜 달라고 졸랐어?”

도민이 병실을 나서자마자 유진이 그에게로 휙 고개를 돌렸다.

“어? 진아, 그게…….”

“꼬마도 아니고 의사한테 그게 조를 일이야?”

이미 질문을 던진 얼굴에는 그 답까지 예상한 눈치였지만, 서훈은 수긍하기가 난감했다.

“의사들도 갑자기 확 좋아진 원인을 모른다잖아.”

“그러다 덜컥 나빠지면 어쩌려고.”

“절대 그럴 일 없어, 이번엔 거짓말 안 할 테니까.”

그러니 믿어 보라며 서훈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마주 선 그가 부드럽게 뺨을 어루만지자 치켜 올라간 유진의 눈매가 그나마 한층 부드럽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서훈을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이미 아픈 걸 숨기고 사라진 전적이 있지 않은가.

도대체 어딜 봐서 믿으라고.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유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한테 말이라도 해 주면 좋았잖아.”

“걱정하는 게 싫어서.”

“아직도 그런 말이지, 주서훈 혼이 덜 났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쓰며 유진이 불쑥 서훈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윽, 진아 좀 아픈데.”

“다행이네, 아프라고 잡았는데.”

“좀 봐줘, 나 아직 입원 중인 환자거든?”

“웃기지 마, 내일 퇴원하신다면서요.”

기적.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지 모를 기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유진이었다. 남들은 믿지 못할 시간을 뛰어넘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래, 서훈도 자신에게는 말하지 못할 비밀을 감추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서훈과 함께 돌아온 집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나름대로 서훈 모르게 올 때마다 치웠는데도 별 소용없는 모양이다.

거실로 들어선 직후, 얼굴로 훅 끼쳐 들어오는 공기가 좋지 않았다. 그동안 집에 올 땐 정신없어서 느끼지 못한 듯했다.

“어쩌지, 따로 청소를 안 해서 어지럽다.”

서훈이 거실 소파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유진이 베란다로 쪼르르 갔다. 그러고는 사방을 다 가린 커튼을 열고, 거실이며 베란다의 문까지 활짝 열었다.

날이 꽤 좋았다. 코끝으로 스치는 바람 남새가 반가울 만큼.

“우선 환기부터 시키자.”

“천천히 해, 진아.”

“공기가 영 탁하잖아. 이런 건 바로바로 해야지.”

피곤한지 상체를 뒤로 푹 기댔다. 금세 고개까지 느슨하게 반쯤 기울이는 서훈을 보는 유진의 눈이 기분 좋게 착 접혔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깨끗하네, 집이.”

“놀리지 마, 개판인 거 나도 인정하니까.”

“괜찮은데, 왜. 미리 청소라도 했어?”

주인의 부재를 알려 주듯 집이 어수선한데도 서훈은 마냥 돌아온 집이 반가운 모양이다.

다행히 컨디션도 꽤 좋아 보였다. 다시 거실로 들어온 유진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

금세 고개를 빼꼼히 내민 그녀가 서훈을 확인하듯 보며 작게 웃었다. 이대로 모든 게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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