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점심은 뭐 먹을까?”
“글쎄, 오랜만에 배달도 괜찮을 것 같은데?”
“주서훈, 너 음식 조절해야 하잖아.”
유진이 잘게 인상을 썼다.
“하루쯤 몰래 먹는다고 큰일 나진 않을걸?”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훈은 이제 다 나았다고 하지만, 그건 스스로의 느낌이 아닌가.
장난처럼 기적이라고 말한 도민도 혹시 모르니, 한동안은 잘 챙기라고 그녀에게 슬쩍 언질을 주긴 했었다.
“선배한테만 입 닫자.”
손을 입가로 가져간 그가 유진을 향해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의사 무서운 줄은 아는 모양이다.
하여간 못 말린다며 유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이번만이야, 알았지?”
“음, 이왕이면 족발하고 보쌈 세트로 해 줘.”
그걸로는 안 된다는 듯 서훈이 대뜸 조건을 추가시켰다. 흔쾌히 허락할 줄 알았던 건지, 덩달아 그가 유진의 기색을 살폈다.
고민하듯 유진이 미간으로 깊은 주름을 만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루니까. 대신 술은 절대로 안 돼.”
“오케이, 나도 양심은 남았으니까.”
“퇴원하자마자 고기 달라면서 양심 운운하기는.”
픽 웃으며 그녀가 다시 거실로 나갔다.
“시간이 애매하긴 한데 시켜 놓을까?”
“좀 있으면 배달 몰릴 시간이잖아. 빠른 게 낫지.”
“하긴 오래 걸리는 것보다야.”
“조금 식은 게 훨씬 낫지.”
유진의 말을 이어 받으며 서훈이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별거 아닐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느긋하게 소파에 뒹구는 서훈이나 그 곁으로 가며 투덜거리는 제 모습도,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하지만 특별하지, 이 자체로.’
두 팔을 벌려 기다리는 연인이 익숙하고도 반가웠다. 유진은 짓궂은 아이처럼 씩 웃으며 그대로 서훈에게 폭 안긴 채, 기분 좋은 미소를 드러냈다.
* * *
퇴원하고 며칠 지났을 무렵, 갑자기 본가에서 두 사람을 찾는 연락이 왔다.
“부모님이 나까지 같이?”
“이번에는 같이 가야 할 것 같다. 신신당부를 하셔서.”
“처음도 아닌데 뭐 어때. 언제쯤?”
“그게, 지금 오라는데.”
가볍게 끄덕이며 날짜를 묻는 유진과 달리 전화를 받은 서훈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아까 핸드폰에서 큰 소리가 들린 것 같기는 한데. 자신이 그 소리를 들을까, 도망치듯 급히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연신 곁눈질로 그를 살피면서도 유진은 섣불리 무슨 일이냐 묻는 대신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어쩌다 듣게 됐나 봐, 가족들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연 서훈은 골치 아픈 듯 미간을 탁 짚었다.
“설마 아픈 거?”
“하아, 조용히 입원했는데 어디서 새어나간 건지 모르겠네.”
“지금까지 숨긴 거였어? 가족한테?”
덩달아 놀란 유진이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연락할 틈도 없이 좋아져서…….”
“그래도 부보님한테는 바로 말했어야지. 이 남자야.”
어쩐지 한 번을 안 오시더라. 혀를 차며 유진이 그를 따라 고민스럽게 한숨을 쏟아 냈다.
이러쿵저러쿵해도 그분들이 보기엔 그와 함께 입을 닫은 것처럼 보일 게 아닌가.
“어머니 화 많이 나셨어?”
“목소리로 봐서는 약간 놀라신 것 같은데.”
서훈도 꽤 당황한 눈치였다.
“얼만큼이나 아신 거야?”
“이미 선배하고 통화까지 끝난 모양이더라.”
“전부 다 들으셨다는 거잖아, 어쩌지.”
서훈보다 더 당황한 듯 유진이 연신 안절부절못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괜찮을 거라 서훈이 다독였지만, 귀에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었다.
한순간에 공범자가 된 거다.
생각해보면 퇴원하는 날까지 그의 가족들이 병원을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함께 지내던 버릇이 남아서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막상 본가로 간 그들에게 복병은 따로 있었다. 부모님이 한동안 회사 운영을 서준에게 대리로 맡기라고 한 것이다.
“잠깐, 잠깐만. 갑자기 형이 대리라뇨.”
“사람이 먼저 살아야지. 지금 회사가 중요하냐.”
“하아, 다 나았다고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그, 도민이라고 했던가.”
“예? 선배는 왜…….”
“아직 통원 중이라고 들었다. 좀 더 지켜봐야 한다던데.”
이미 가족들에게 숨기다 들킨 순간, 서훈의 의견은 더 이상 소용없었다. 예상보다 완강한 제 아버지를 보며 서훈은 낭패라는 듯 인상을 썼다.
“이번엔 네 아버지 말 들어.”
“어머니, 그러지 말고 제 말을 좀…….”
“기적처럼 좋아졌다고 해도 암이잖니, 게다가 말기라며.”
늘 서훈의 편을 들어주던 어머니마저 이번엔 절대 안 된다며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난감하긴 서훈도 마찬가지였다. 이걸 어떻게 설득하나, 고민하며 그는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본의 아니게 중간에서 난감한 사람은 유진이었다.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없었지만, 가족들이 서훈의 설득을 그녀에게 부탁한 것이다.
유진이 자신들 대신 서훈의 곁을 지켰단 이야기를 민석에게 전해 들었고, 그만큼 더 고마워했다. 홀대할 리가 없었다.
처음 한두 번이야, 서훈도 그러려니 넘겼다. 잊을 만하면 전화가 오는 것까지도 그만큼 숨긴 자신의 탓이리라 넘겼다.
주변 모두에게 폐를 끼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콩깍지가 무서운 거다, 서유진이 받을 상처밖에 보이지 않았던 걸 보면.
“형까지 이럴 겁니까? 괜찮다잖아.”
―어머니 말 들어, 내가 싫으면 다른 사람 써도 상관없으니까.
“멀쩡해, 부모님이 지금 과하게 걱정하는 거야.”
“어쩔 수 없다. 부모님한테는 그게 아닐 테니.”
서훈은 며칠 버티지 못하고 슬슬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랐다. 서준까지 그를 설득하려고 연락한 탓이었다.
“나도 몰라, 마음대로 해.”
“생각 잘했다. 그게 부모님 마음도 편할 거다.”
“대신 확실하게 해 줘.”
“알았다. 한두 달 휴가라고 생각하고 쉬어.”
결국, 가족들의 등살에 서훈이 백기를 들었다. 그나마 서준이 흔쾌히 해 주겠다 나선 걸 다행으로 여기면서.
* * *
어쩔 수 없이 서훈은 한 달 가까이 출근을 포기한 채로 지냈다. 나름대로는 두 사람 모두에게 괜찮은 시간이었다.
한 번 쉬어 가는 터닝 포인트로도 좋았고, 서훈을 간병하느라 유진도 일을 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여유는 서훈의 어머니가 유진에게 연락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머니, 어쩐 일이세요?’
‘그냥 생각나서 걸었어. 혹시 바쁘니?’
‘아뇨, 바쁘기는요. 곧 점심인데 식사는 하셨어요?’
‘슬슬 먹어야지. 너희도 식사는 잘 챙기지? 굶지 말고.’
‘네, 잘 챙겨 먹을게요.’
처음 한두 번은 유진도 별생각이 없었다. 걱정이 많은 어머니의 노파심이려니 넘겼었다.
전화가 와도 귀찮은 내색 없이 반갑게 받았고, 유진을 생각해서라도 좋은 건 받고 보자며 서훈도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뭐든 좋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닌가.
유진은 이틀 만에 또 걸려 온 예비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으며 애써 차오르는 부담을 삼켰지만.
“네? 지금 아파트 근처예요?”
―잠깐 근처 왔다가 들렀다. 잠깐 나올 수 있니?
애써 놀란 기색을 감추며 유진은 어디쯤이시냐 넌지시 물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그녀가 잘 아는 카페였다.
“어머니가 이 앞 카페에?”
“일 보러 나오셨대. 근처 지나는 중이셨나 봐.”
“못 나간다고 하지, 뭐하려고.”
역시나 그는 얘기를 듣자마자 피곤한 듯 인상을 썼다.
“말이 쉽지, 입장이 너랑 다르잖아.”
“미안해, 어머니가 통 말을 안 들으시네.”
최근 들어서 잦아지는 어머니의 연락을 서훈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가운데서 말리는 듯했지만 별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괜히 서훈이 스트레스라도 받을까, 유진이 괜찮다며 가볍게 제 손을 내저었지만.
“만나면 또 약혼 얘기하실 텐데.”
“생각해 본다고 했으니까, 안 그러실걸.”
“모르지. 나 아픈 거 알고 다들 너한테 넘어간 분위기던데.”
“그래서 나랑 약혼하기 싫다고?”
세모꼴로 눈을 치켜뜨며 유진이 그를 빤히 주시했다.
반쯤은 장난인데도 서훈은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기겁하며 펄쩍 뛰었다.
슬쩍 기분이 상하려던 유진은 그 반응을 보며 입꼬리를 부드럽게 휘어 올렸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 좋았다.
“어쨌든 너도 각오해.”
“무슨 각오?”
“그게 뭐겠어? 우리 두 사람 약혼이지.”
이럴 땐 어디다 눈치를 갖다 버리는 거야. 투덜거리며 유진은 갸웃거리는 서훈의 뺨을 손으로 꾹 찔렀다.
“약혼 말이야, 약혼.”
“아…….”
재차 약혼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유진은 멋진 프러포즈 없이 결혼까진 절대 안 해 줄 거라 덧붙인 뒤, 금세 다녀온다며 현관을 나섰다.
“어머니 많이 기다리셨죠?”
“신경 쓸 것 없어, 그보다 서훈이는 뭐라 안 하디?”
“괜찮아요. 잠깐 들르신 건데요, 뭘.”
“그 녀석 챙기느라 고생이다. 네가 병이라도 날까 걱정이야.”
그렇게 말한 어머니는 테이블에 놓인 유진의 손을 잡고, 살갑게 토닥였다. 그 진심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서훈의 일을 뒤늦게 알게 된 뒤로 그녀는 서훈만큼이나 유진을 예뻐했다. 자신이 못한 부분을 곁에서 살뜰히 챙겨 준 그 고마움이리라.
“아, 그리고 잊을 뻔했는데.”
“…네?”
“비서 통해서 보약 좀 보냈으니 오면 받아 둬.”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던 유진은 이어지는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제 보약을 왜…….”
서훈이 아닌 자신의 보약이란다, 놀랄 수밖에.
“이미 넌 내 며느리잖아. 서훈이 간호하느라 고생 많았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녀는 토닥이는 손길로 유진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고생은요, 훈이가 치료하느라…….”
“원래 환자보다 옆에서 하는 간병이 더 힘든 법이야.”
“아녜요,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먹어, 절대 서훈이 주지 말고 너 혼자.”
그러면서 가끔 딸 가진 부모들이 부러웠다 투덜거리며 그녀는 지금껏 유진에게 쌓아 둔 벽을 완전히 다 허물어 버렸다.
그제야 유진은 제 안에서 조금 남았던 갈등마저 깨끗이 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 저번에 말씀하신 거요.”
“무슨 말… 아, 너희 약혼하자는 얘기?”
“네, 그거 슬슬 날 잡을까 하는데.”
결심한 순간, 입 밖으로 뱉기까지는 금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