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테이블 위로 서훈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초대장을 민석에게 건넸다. 이건 또 뭐냐는 표정이 그의 얼굴로 떠올랐지만, 그가 더 빨랐다.
“약혼식이다, 초대장.”
이제 막 봉투를 열던 민석이 손을 딱 멈춘 채, 곧장 서훈에게 시선을 던졌다.
“드디어 하냐?”
“날짜랑 장소는 거기 나와 있고.”
“그 정도는 안다, 나도.”
누굴 아마추어 취급하냐며 민석이 건네받은 초대장을 열어 보지도 않고 그대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어쩐지 할 말이 꽤 많아 보였다.
말없이 손에 쥔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서훈은 그가 무언가 말을 꺼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일로 가운데서 가장 들볶인 사람도, 고생한 것도 민석이 아닌가. 누구보다 서훈이 잘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고마웠지만, 머리로는 아는데 그 한마디가 입으로 쉽게 뱉어지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을 티격태격하며 지낸 탓일지도.
“하아, 그래. 우선은 축하한다.”
“그래.”
“새끼야, 축하한다고.”
“…고, 맙다…….”
어렵사리 그 한마디를 뱉어 낸 뒤, 서훈이 겸연쩍은 듯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그런데 유진이는 어디 가고 혼자야?”
“다른 일정이 좀 잡혀 있어서.”
“무슨 일정인데 못 나와?”
“어머니랑 약혼식 때 입을 드레스 보러 갔어.”
서훈이 쓰게 웃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게 민석에게는 마냥 좋게만 들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뭐야, 벌써 시집살이야?”
“그런 거 아냐. 진이가 먼저 말 꺼냈던 거고.”
“서유진이 직접? 좀 의외인데.”
비슷한 생각이라는 듯 서훈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 올렸다.
“마찬가지야, 나도 좀 의문이라서.”
“흐음, 너도 몰라?”
“어머니가 편하대. 물어봐도 자꾸 얼렁뚱땅 넘어가기만 하고.”
“하긴 그 녀석이 뭔가 독특하긴 하지.”
수긍한다는 듯 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끌려다니는 분위기면 적당히 끊어 주겠는데.”
“그것도 전혀 아닌 거잖아?”
“오히려 어머니를 진이가 불러내더라고.”
무슨 바람이 불어, 하루가 멀게 어머니와 돌아다니는지는 그도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예상하는 바는 있었다.
아마도 그날, 약혼을 입에 올리며 장난치듯 프러포즈를 운운하던 때가 시작인가 싶었다.
뭐가 됐든 사이가 나쁜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홀로 그때의 일을 곱씹는데 돌연, 민석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하여간 하네, 진짜 징한 것들.”
“일부러 시비 거냐?”
가만히 듣던 서훈이 와락 인상을 썼다.
“진저리나서 그런다, 아주.”
“네가 왜.”
“너희는 그렇게 쇼를 하고도 이제 약혼이냐?”
게다가 이건 또 뭐냐며 민석이 테이블에 놓인 초대장을 손가락 사이에 낀 채 들어 올렸다. 팔랑거리는 초대장을 보며 서훈이 미간을 팍 구겼다.
“적당히 해라, 나민석.”
“너네만 보면 아주 속이 터져.”
그 말을 듣던 서훈은 무언가를 더 받아치는 대신 한숨 섞인 변명을 툭 뱉었다.
“부모님이 완강하셔서 방법이 없더라.”
딱히 받아칠 말도 없고, 저게 나민석 스타일의 축하라는 것도 모를 리 없었다.
평소와 달리 얌전한 서훈의 태도가 만석도 영 적응이 되지 않는 듯했다. 괜히 겸연쩍어진 그가 슬그머니 초대장을 도로 내렸다.
“혹시 서준 형님 때문이야?”
“사실 그 탓도 없진 않고.”
“그 미친 여자가 좀 설치고 다녔어야지.”
그제야 잠시 머리에서 지운 주하린이 떠올랐는지 민석이 오만상을 썼다. 그러다 생각난 듯 서준의 일을 넌지시 물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그 인간이 작정하고 덤볐는데.”
“하긴 형님이 보통내기는 아니지.”
그 얘기는 더 하기도 싫다는 듯 넘기는 서훈에게 민석도 더는 주하린에 관해서 캐묻지 않았다.
매번 티격태격하는 것치고 두 사람이 자란 환경은 꽤 비슷했고, 서로를 이해하는 폭도 꽤 넓은 편이었다.
어쩌면 그게, 유진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된 계기인지도 모르겠지만.
* * *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샌가 약혼식 당일이었다.
확실히 정신없긴 했다. 호텔 측에서 마련해준 예비 신부 대기실로 서훈을 따라 들어가면서도 유진은 약간 어리벙벙한 상태였다.
“진아, 너 괜찮아?”
“어? 으응, 그냥 좀 긴장해서…….”
바짝 얼어붙은 유진을 보며 서훈이 걱정스럽게 미간을 찡그렸다.
“나가서 커피라도 좀 사다 줘?”
“그럼 나 아이스로.”
“알았어. 금방 민석이 올 테니까, 쉬고 있어.”
수긍하듯 끄덕이며 한숨을 내쉰 유진의 시선이 대기실을 나가는 서훈에게로 향했다.
“뭐야, 나만 긴장한 줄 알았더니.”
그가 잡았던 손을 내려다보며 유진이 나직하게 웃었다. 짧게 마주 잡은 손이 땀으로 꽤 축축해져 있었다.
혼자만 긴장한 게 아니라는 생각 때문일까. 괜히 긴장으로 멍한 정신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며 어색하게 걸친 드레스를 툭툭 건드리는데 재차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끼―익.
슬쩍 고개를 치켜드니, 깔끔한 슈트 차림의 민석이었다. 유진을 본 그가 짓궂게도 씩 웃었다.
“서유진 맞아? 여자의 변신은 무죄냐?”
“넌 왜 얼굴 보자마자 시비야?”
“예뻐서 그런다, 칭찬이려니 웃어넘겨라.”
평소처럼 장난을 치며 다가서는 민석에게 그녀는 삐딱하게 눈을 흘겼다.
“됐거든, 칭찬이면 예쁘다고 한마디만 하던가.”
“그래, 그래. 예쁘다, 됐지?”
알겠다며 민석이 말을 바꿨지만, 엎드려서 받는 절이 썩 반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좋은 날이 아닌가. 대강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민석과 몇 마디 하는 사이, 커피를 사러 간 서훈이 돌아왔다.
“넌 그새를 못 참고 나갔냐?”
“유진이 커피 사러 간 거야, 내 손 보면서 몰라?”
“옆에서 긴장을 풀어줘야지.”
커피를 마시는 사이, 서훈은 다시 또 민석과 언제나처럼 틱틱거렸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참 변한 것도 없다며 소리죽여 웃었다.
긴장이 풀린 유진을 보며 그는 꽤 안심한 눈치였다. 확실히 나민석의 등장으로 남은 긴장이 사라진 것 같았다. 본인은 별로 안 반가운 눈치였지만.
그래서인지 서훈과 티격태격하던 민석은 시간을 확인한 뒤, 먼저 들어간다며 쌩하니 대기실을 나가 버렸다.
“우리도 그만 들어갈까?”
“먼저 가. 마지막으로 점검 좀 하고.”
“충분히 예쁜데.”
슬슬 약혼식이 코앞이었다.
같이 나가자는 서훈을 기어이 먼저 보낸 뒤, 유진이 거울 속의 낯선 제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옅은 핑크빛의 실크 드레스를 걸친 채, 거울을 주시하는 얼굴이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꼭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처럼.
“나도 못 알아볼 만큼 예쁘긴 하네.”
괜히 투덜거리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거울을 확인한 뒤, 유진은 나직하게 숨을 뱉어 냈다.
‘괜찮아, 말이 약혼이지 그냥 밥이나 한 끼 먹는 거야.’
어쩐지 어머니한테 속은 기분인데. 그 한마디를 떠올리다가 유진은 그냥 실없이 웃고 말았다.
사실 그 밥 한 끼가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단지 그 밥 한 끼의 범위가 그녀의 예상치를 훌쩍 웃돌았던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그 집안에선 밥 한 끼일 수도 있겠네. 재차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홀로 중얼거리며 유진이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3년을 거슬러온 미래는 해피엔딩이었다. 그거면 된 거다. 가볍게 정리를 끝낸 뒤, 그녀가 대기실과 홀 사이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하지만 그때, 급하게 걷다 실수로 누군가와 어깨를 살짝 부딪쳤다. 놀란 유진이 휙 고개를 돌려 사과했지만.
“앗!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보다 오늘 좋은 날인가 봐요?”
“네? 아, 네. 약혼식이라…….”
“행복한 날이네요, 저 앞의 홀에서 하는 거죠?”
무심히 어딘가를 가리키며 남자가 되물었다. 그 손끝을 따라 넘어간 시선엔 자신이 막 들어가려는 약혼식장이 보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혹시 저희 손님이세요?”
뒤늦게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공손하게 물었지만 남자는 모호하게 웃을 뿐이었다.
금세 유진은 난감해졌다. 약혼식이라고 하나, 어느 정도 가까운 손님에게는 초대장을 돌렸기 때문이다.
눈앞의 이 남자가 시댁 어른들의 손님이면 어쩌지. 불쑥 차오르는 걱정으로 유진이 급히 말문을 열었다.
“이제 곧 시작하는데 같이 들어가세요.”
“괜찮아요. 금방 돌아가야 하니까.”
남자는 함께 들어가자는 유진에게 미안한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따로 줄 물건이 있다면서 재킷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받아요, 별건 아니겠지만.”
“이건 드림캐처?”
앞으로 내민 남자의 손바닥에는 열쇠고리처럼 작은 크기의 드림캐처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왜 저한테 이런 걸…….”
조금 독특한 모양의 드림캐처를 보며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커다란 깃털을 잘라 만든 것처럼 보였다.
“당신한테 주는 내 선물이에요.”
“네? 굳이 약혼 선물까지 안 주셔도 되는데.”
“받아 둬요, 앞으로는 좋은 꿈만 꾸게 해 줄 테니까.”
남자는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묘한 그 한 마디가 이상하리만치 유진은 뇌리에 콱 박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다시 누구냐고 물으려던 찰나, 멀리서 서훈이 그녀를 불렀다.
“진아, 거기서 안 오고 뭐 해?”
“어? 그게 이분이 우리 손님이신 것 같아서.”
“우리 손님이라니, 누구?”
“누구냐니 당연히 내 앞에 있는 이 남자분… 어? 어디 가셨지?”
남자가 서 있는 앞을 가리키며 고개를 돌린 유진이 당황한 듯 두리번거렸다. 몇 초 전까지 대화하던 상대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이상하다, 헛것을 봤을 리도 없는데.’
당황한 그녀가 자신의 손바닥을 보자 남자에게서 받은 드림캐처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난감하게 웃는 서훈을 보며 유진은 포기한 듯 드림캐처를 꼭 쥐었다. 어쨌거나 당장 중요한 건, 그들의 약혼식이었다.
“이제 들어가자, 안 늦었지?”
“괜찮아. 원래 주인공은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야.”
“뭐, 오늘의 주인공이 맞긴 하니까.”
더는 서훈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엔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년 만에 찾아오는 만족감을 유진은 있는 그대로 즐기기로 했다.
꼬박 3년을 헤맨 의문이 풀린 뒤, 찾아온 안정감이었다. 이제야 온전히 그를 마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너를 앓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