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일상 붕괴의 직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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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신요현. 만 20세.
평범하고 조용한 삶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날 역시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고 자부한다.
행복하기 그지없는 원룸 자취 생활.
오늘은 마침 대학교 강의도 없고 알바도 없어서 마음껏 집에서 뒹굴 수 있었다.
더군다나 밖에는 비가 오고 있다.
음습하고 축축한 외부와 단절한 채 쾌적한 집안에서 뒹굴다니, 이만한 사치가 또 어디 있으랴.
지금 만큼은 호화스러움에 빠져 사는 부자들이 부럽지 않았다.
그렇게 한가하게 뒹굴 거리는 건 좋은데, 남아도는 시간에 뭘 하는지가 문제다.
“뭐긴 뭐야, 게임이지!”
나는 당연한 듯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켰다.
취직 활동? 친구들과 청춘 만끽? 다 엿이나 까먹으라지.
취직 원서는 내봤지만 세 군데 다 떨어졌고, 같이 술 마실 친구 하나 없는 아싸의 인생을 살아온 게 바로 나다.
이런 험난한 세상살이지만, 무언가 열정을 쏟아 부울 만한 취미 한두 가지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건전한 운동일 수도 있었고, 혹은 얌전한 수집일 수 있었다.
내 경우는 그게 게임이었다.
3년 전에 우연히 접하게 된 온라인 게임에 맛 들리고 난 뒤로 줄곧 플레이 해왔다.
『소울즈 오브 라그나로크(Souls of Ragnarok)』
화려한 이펙트나 배경 화면도 없이 그저 그 글자만 떡하니 모니터 떠오르며 플레이어의 로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이야 하는 사람만 하는 비주류 게임이 되었지만 출시 당시만 해도 상당한 화제를 모았던 게임이다.
긴 시간 몸에 익은 움직임으로 빠르게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며 내 계정으로 게임에 접속한다.
접속하자마자 보이는 건 당연히 캐릭터 선택화면이다.
이 게임은 한 계정 당 최대 세 개의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캐릭터란은 세 개 다 채워진 상태였다.
“…….”
무심코 첫 번째 캐릭터란에 시선이 갔다.
직사각형 캐릭터란 오른쪽 아래에는 마지막으로 플레이한 날짜가 나와 있었다.
[마지막으로 플레이한 날짜: 2년 전]
2년 전…….
어제까지만 해도 이곳엔 1년 전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것이 바뀌었다는 건, 내가 이 녀석을 플레이하지 않은 게 오늘로 2년째라는 뜻이겠지.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첫 번째 캐릭터란을 클릭했다.
멋들어진 글씨가 적힌 창 하나가 떠오른다.
[이 캐릭터로 플레이하시겠습니까?]
[예/아니요]
나는 복잡함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마우스에 얹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누르는 것은 ‘예’가 아닌 ‘아니오’ 버튼이었다. 선택창이 무미건조하게 지워지듯 사라져 버렸다.
“……하아.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진다고.”
변명하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첫 번째 캐릭터에게서 시선을 뗐다.
안 좋은 기억만 떠올랐기에 어서 털어버리고 싶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캐릭터란 사이에서 마우스 커서를 오가며 고민한다.
이 둘은 최근까지도 번갈아 하며 플레이하고 있는 캐릭터였다.
내가 두 번째로 만든 캐릭터는 건장한 남성 캐릭터다.
단단한 육체와 화려하진 않지만 실전성 높은 갑옷, 어깨의 짊어진 투 핸드 소드가 투박한 예기를 발한다.
야성적으로 뻗어 있는 황갈색 머리카락이 전장 위에 선 사나운 사자를 연상시켰다.
두 번째가 전사라는 이미지라면 세 번째는 모험가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해서 만들었다.
늘씬하면서도 건강미가 넘치는 여성 캐릭터였다.
방어보단 움직임을 좀 더 중시하는 경장을 입었고, 한 손 검과 방패를 양손에 찼다.
하나로 묶은 은발의 머리카락이 꼬리처럼 보여 귀여운 느낌이지만, 예리하게 빛나는 금안과 어울리니 영리한 여우를 연상시켰다.
난 게임 캐릭터를 만들 때 제법 정성을 쏟으며 만드는 타입이다.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서 캐릭터를 만드니 어색함 하나 없이 자연스러운 사람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별나 보일 수 있지만, 본디 ‘롤플레잉 게임(Role Playing Game)’ 자체가 하나의 역할놀이가 아니겠는가.
자신을 대신해 모험할 캐릭터를 만들고 정성을 쏟아 붓는 것이 게임을 더 감미롭게 만든다.
두 캐릭터를 보며 오늘은 어느 것으로 할까 고민하던 나는 세 번째를 선택했다.
이제 곧 레벨 업을 앞둔 캐릭터였기에 이번에 레벨 업 시키기로 한 것이다.
“오늘도 신나게 게임 하나에 청춘을 쏟아 부어 볼까?”
화면이 로딩 되는 동안 신체를 풀며 태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확히 20분 뒤에 터질 대형사건을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채…….
***
소울즈 오브 라그나로크(Souls of Ragnarok).
통칭 SoR이라 불리는 이것은 이상한 게임이다.
아니, 이상함을 넘어 괴상한 게임이다.
다른 여타 게임이 하얀 백조라면, SoR는 그 백조 사이에서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새까만 까마귀에 비유될 정도다.
처음엔 그 독특함에 끌리던 사람들도 너무 심한 이질감을 느꼈는지 금세 떠나버리곤 했다.
그 이질감 중 하나가 게임 난이도다.
보통의 온라인 게임이라 하면 쉬운 유저 유입을 위해 캐주얼한 난이도로 맞추는 게 보통이다. 유저들이 보다 쉽게 게임에 익숙해지고 즐길 거리를 찾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게임에선 그딴 거 없다.
조작 가이드라곤 시작하자마자 바닥에 글 몇 자 던져주는 게 전부.
튜토리얼 도중 보스 앞에 떨구는 것은 기본이요, 보스든 잡몹이든 만만치 않게 강하여 방심하는 순간 골로 가는 건 순식간이다.
이 기가 차는 난이도 때문에 호기심에 접해본 유저들은 대부분 떠나갔다.
하지만 의외로 남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나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자고로 모험이란 무엇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 너머에 있는 과실을 취하는 여정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고난을 이겨내고 숨겨진 무언가를 찾았을 때의 환희와 성취감이 그 본질 아니던가?
SoR은 그러한 모험의 본질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적은 너무나도 강대하고 두려우며, 세상은 여전히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다. 그렇기에 쓰러뜨리는 보람이 있고, 개척하는 즐거움이 있다.
이것은 모험을 하는 게임이다.
장비 강화에만 눈이 돌아가고, 운빨 놀음을 종용하고, 노가다만 강요하고, 노가다가 싫다면 들이미는 것이 현질 유도인 게임들에 지친 유저들에게 SoR은 새로운 바람이었다.
어렵긴 해도 근성만 있다면 충분히 깰 수 있는 몹과 보스들.
특정 조건을 만족할 때마다 새로운 지역이 개방되며 히든 보스가 출현한다.
단서는 게임 속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어 추리하고 알아내는 재미마저 있다. 비밀이 밝혀지고 새로운 지역이 열릴 때마다 게임 속 세계는 확장되어 간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괴물도 그런 식으로 최근에 드러난 히든 보스 중 하나였다.
[보스 ‘검은 골짜기의 불길한 맹수’가 나타났습니다.]
검은 불꽃처럼 넘실거리는 털을 휘날리며 사족보행의 괴물이 내 캐릭터의 앞을 막아섰다.
캬아아아아아아악!!!
“오우 쉣! 생김새도 그렇고, 울음소리까지 소름 끼치도록 잘도 구현해놨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리얼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팔을 문질렀다.
모니터 너머의 괴물이건만, 마치 실제로 눈앞에 살기를 드러낸 것 같은 압박이 느껴졌다.
어쩌면 다른 것에서 비롯된 압박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한쪽 구석에 있는 캐릭터에 경험치를 살폈다.
“경험치 99.9%…….”
레벨 업 직전이다.
캐릭터가 사망하게 되면 페널티로 그동안 쌓였던 경험치가 한 번에 소멸되어버린다.
워낙 어려워서 캐릭터가 허구한 날 죽는 게임의 마지막 자비인 것인지 사망시 레벨 다운 같은 일은 없지만, 이 점은 가차 없었다.
어느 게임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고레벨일수록 레벨 업은 어려워진다. 그건 SoR도 마찬가지다.
특히 레벨 100 이후부터는 경험치 쌓이는 속도가 답답할 정도로 느려지며 레벨 120 이후부터는 거의 멈추듯 움직이지 않는다.
때문에 SoR에선 레벨 120을 만렙으로 취급한다.
진정한 게임 폐인 중에는 레벨 130을 넘어가는 녀석도 있다고 들었지만, 대부분 실력 좀 된다는 유저들의 캐릭터는 120에서 머물러 있었다.
그럼 내 캐릭터는?
레벨 120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레벨 120의 벽을 깰지 모르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반면 눈앞에 있는 보스 몬스터는 출현 조건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싸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런 상태에서 어떤 흉악한 패턴을 쓸지 모르는 녀석을 상대하는 건 위험부담이 컸다.
차라리 안전하게 레벨 업 한 다음 도전하는 게 훨씬 나은 방법이었다.
전진이냐, 후퇴냐.
생각할 거 뭐 있냐는 듯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전진이다!”
내가 이 게임을 플레이한 지 3년을 넘는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중간에 공백기가 있었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3년은 꾸준히 게임 하나에만 매달렸다.
게임에 큰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 세월에 녹아든 경험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개 같은 난이도의 게임인 만큼 별의별 난관이 있었다. 실패하면 절망하고 성공하면 희열을 느꼈다.
경험치 손실 정도의 리스크는 아주 약과였다.
오히려 그 너머에 있는, 이 만한 리스크를 이겨내고 레벨 업이라는 과실이 더 탐스럽게 보였다.
3년 된 서당 개가 풍월 읊을 때가 왔다.
“흐흐! 맛있게 먹어 치우자꾸나.”
손가락을 꺾으며 긴장을 풀어낸 뒤 마우스와 키보드를 잡는다. 동시에 모니터 안에 내 캐릭터를 응원하듯 중얼거렸다.
기분 탓이었을까.
검과 방패를 쥔 채 보스 몬스터를 향해 달려가던 캐릭터가 내 말에 호응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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