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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25화 (25/173)

〈 25화 〉 늑대 ­ 4

* * *

메케한 흙먼지가 사방에 가득하다.

들이마셔서 좋을 것 없으니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완전히 무너져 내린 미완공 건물의 잔해가 처참한 형태로 쌓여 있었다. 흙먼지의 대부분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공사 파업 중이라서 사람이 없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저렇게 무너진 잔해 속에서 멀쩡할 수 있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래. 인간은 말이다.

콰앙!!

쌓여있는 잔해 중 한 곳이 터져나갔다. 그곳에서 몸을 일으킨 그림자가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레아. 이 풍경을 만들어낸 장본이었다.

철컹.

레아가 아무 일도 없던 듯 담담히 내게 다가오는 걸 하나의 대검이 제지한다.

레반의 검이었다.

“그 이상 다가오지 마라.”

“뭐야? 너도 한 번 해보려고?”

“조금 전 절벽가슴처럼 쉽게 당하진 않을 거다, 더벅머리.”

“내가 보기엔 너나 그 은발녀나 거기서 거기 같은데. 그리고 누구더러 더벅머리래? 뒤진다?”

레반의 말이 거슬렸는지 흉흉한 기세로 걸음을 내딛는 레아.

그러나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발을 멈추고 고개를 틀었다.

파앙!!

레아의 뒤편에서 부러진 철근 하나가 공기를 꿰뚫으며 날아왔다. 허나 이미 간파당한 통에 레아의 머리카락 몇 올만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 망할년 손대지마. 내 사냥감이니까.”

무너진 잔해를 치워내며 레테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먼지에 뒤덮여 더러워졌고, 옷이 여러 군데 찢어졌으며,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그 모습은 보기에도 썩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레테라의 안광은 전에 없이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레아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끝장내겠다는 듯.

“이미 졌으면 그냥 빠져 있어.”

“아직 안 졌거든? 그리고 저 망할년, 나더러 허접하다고 했다고.”

“허접한 거 맞잖아.”

“오케이. 거기서 목내밀고 기다려, 근육돼지. 너부터 죽여줄게.”

흉흉한 기세의 레테라가 레반으로 표적을 바꾸려고 할 때, 문뜩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리고 저 여자, ‘너희들’이라고 했으니까 너까지 포함해서 허접이라고 말한 거잖아.”

“뭐?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냐?”

따지듯 레아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레반.

레아는 뭐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서 내가 아까 거기서 거기라고 말했잖아. 저쪽 은발녀는 눈치라도 있지, 갈색머리 넌 아예 지능이 없구나? 말로만 듣던 뇌근육이라는 거야?”

“좋아. 절벽가슴 넌 빠져. 저 더벅머리는 내가 족친다.”

“난 천연 웨이브지 더벅머리가 아니라고. 너 진짜 뒤지고 싶은가 보구나?”

“더벅머리든 뇌근육이든 알게 뭐야. 그냥 둘 다 죽여줄게.”

레아, 레반, 레테라.

서부극의 한 장면처럼 이 세 사람이 거리를 두고 대치한다.

살기와 투기가 흙먼지에 뒤섞여 모래바람처럼 휘몰아치며, 그 영역 안에 있는 건 야성을 주체하지 못하는 맹수들뿐이었다.

……그런 그들의 사이로 내가 걸어갔다.

“그쯤 해둬.”

“……! 형님!”

“오라버니!”

“…….”

레반과 레테라는 놀라며 기세를 거두어들였다. 눈매를 좁히며 나를 노려보는 레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끼어듬으로서 소강상태에 접어든 그들을 보며 말했다.

“건물이 주저앉는 대형사태가 일어났다고.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릴 거야.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떠야해.”

“음…….”

“……칫.”

내 말에 동조한 건지 레반은 내밀어진 대검을 거두어들였고, 레테라는 잠시 레아를 노려보다가 마찬가지로 무기를 거뒀다.

그러나 무기 하나 없이 맨손인 레아는 아직도 투기가 흉흉하다. 당장이라도 레반과 레테라에게 달려들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그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아. 너도 같이 가자.”

“…….”

척.

레아는 내 말에 대한 대답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 야, 저 년 저거 어디서 배웠어?

현실에서 지낸 기간이 레반, 레테라와 비슷한 주제에 어느새 욕까지 학습한 레아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그녀가 말했다.

“난 너에게 안 돌아가. 네가 그 녀석과 화해할 때까지 절대.”

“레아.”

그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이미 설명했지만 그녀는 아직 납득하지 못한 모양이다.

다시 한 번 말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레아가 사전에 차단했다.

“시끄러! 몇 년이나 방치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명령하지 마!”

“윽…….”

아픈 부분을 찌르니 할 말이 없어진다.

내 입을 다물게 만든 그녀는 팔짱을 끼고 다른 두 사람을 둘러보았다.

레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의문이었다.

“그리고 너희는 왜 저 인간의 말을 듣는 거지? 저쪽 세계에서와 달리 이젠 우리를 억압하는 제약 따윈 없는데.”

“……!”

말은 두 사람을 향해 있었지만, 그 말이 가장 심상치 않게 느껴진 건 나였다.

더 이상 제약 따윈 없다고?

확실히 그렇다.

여긴 더 이상 게임이 아니다. 내가 저 두 사람은 물론 레아에게까지 개입할 여지는 그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레아는 내 말을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은 아무리 감정이 격해지더라도 내 말을 우선해주었는데 그녀는 아니었다.

그런데 만약 저 두 사람도 레아처럼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좋지 않은 결과가 머리를 스치려할 때, 레반과 레테라가 입을 열었다.

“별로 우리가 억지로 형님의 말을 따르는 건 아니다.”

“따르고 싶으니까 따른다. 그 외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다는 거야?”

그들은 아주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 당당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의지에 눈썹을 찌푸리는 건 레아 쪽이었다.

“……아, 그래? 좋겠네, 망할 아버지. 충성스러운 애완동물이 생겨서.”

“저 두 사람은 애완동물이 아니야. ……그리고 너도.”

“……흥.”

레아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더는 느끼지 못한 걸까, 아니면 점차 사고 현장에 가까워지는 사람들의 기척을 느낀 걸까.

레아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인간을 초월한 각력으로 땅에 균열을 남긴 그녀는 한순간의 돌풍만 남기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느 한 곳을 바라보는 레반과 레테라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점이 되어서 사라지는 레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형님?”

“붙잡아 올까요?”

멀어지는 레아의 모습을 가리키며 두 사람이 물어온다.

말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튀어나가서 그녀와 싸울 것처럼 보였다.

“……됐어.”

억지로 붙잡으려 해봤자 감정의 골만 깊어질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셋 다 많은 피를 흘릴 테고.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참 SoR를 즐기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게임에서 만난 것에 불과하지만, 정말 즐겁게 대화하고, 모험하고, 승리를 경축하고, 결국은 사이가 틀어져서 헤어졌던 친구의 존재를 떠오른다.

“넌 진짜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날 피곤하게 하는구나.”

레아가 사라져버린 하늘을 바라보며 옛친구를 향해 중얼거렸다.

레반과 레테라는 내 말에 담긴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함부로 건들지 않고 묵묵히 바라만 봐주었다.

***

[파업 진행 중이던 공사장 건물, 원인 모를 대붕괴! 공사 관계자는 부실공사는 없었다 주장하고 있으며, 다행이도 인명피해는 0명…….]

“……후우.”

휴대폰 인터넷 기사를 통해 어제 일어난 대붕괴 사건을 찾아본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디에서도 수상한 인물을 목격했다 등의 내용은 없었다.

기물 파손만 이번이 세 번째건만,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과연 운이 좋은 일인지는 따져봐야 하겠지만…….

툭.

휴대폰을 한 곳에 던져두고 나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동네 구석진 곳에 있는 여관이었다.

노인 한 분이 홀로 운영하시는 곳으로 싼 숙박비에 비해 제법 쾌적했다. 살 곳이 없고, 방을 구할 돈도 없으니 잠시 동안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부자리를 깔만 한 자리를 제외하고도 방은 세 사람이 지내기에 알맞을 만큼 컸다.

바닥에 누운 채 곁눈질로 한쪽을 바라본다.

레반과 레테라가 방 한구석에서 무기를 손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인벤토리를 쓸 수 없는 지금 여분 무기가 없으니 지금 쓰는 무기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말이었다.

특히 레아에게 크게 한 번 당한 레테라는 언제가 될지 모를 복수전을 준비하듯 섬뜩한 기세로 칼을 갈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있으니 어제 레아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더 이상 게임 세상과 같은 제약이 자신들에게 없다던 그녀의 말.

거기에 자신의 의지로 나를 따른다고 말한 두 사람이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들에게도 더 이상 제약이 없다고 스스로 증명하는 소리였다.

‘만약 레반과 레테라가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들이 자신의 의지로 나를 따라준다고 하는 건 고마웠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레아와 같이 모종의 이유로 사이가 틀어져 내게 반항적으로 바뀐다면?

그것 때문에 누군가에게 큰 피해를 입혀도 아무런 제지도 할 수 없게 된다면?

강한 힘은 든든하지만, 그게 통제할 수 없는 힘이라면 무서운 법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같다.

“오라버니?”

움찔.

상념에 빠져있을 때 나를 부르는 레테라의 목소리에 눈을 뜬다.

고개를 돌려보니 레반과 레테라가 내 쪽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입니다, 형님.”

“어어……. 오늘은 컨디션이 좀 별로네. 좀 자야겠어.”

그들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눕는다.

그래. 지금 걱정해서 뭐하겠는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을 걱정하는 것만큼 기력 낭비는 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정말 일어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라면 더욱.

이럴 땐 자자.

한숨 자고 나면 쓸데없는 걱정들도 좀 잠잠해지겠지. 그 이후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거다.

“…….”

“…….”

그렇게 돌아서 누운 난, 그때 두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

보글보글…….

“……?”

물이 끓는 소리. 묘하게 구수한 냄새에 잠결에 의식을 붙잡았다.

뭐지, 이 냄새?

낯설지 않은 냄새에 집중하고 있으려니 레반과 레테라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물 조절을 잘못했다고 말했잖아, 멍청아!”

“분명 조리법에는 세 큰 컵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큰 컵이 양동이는 아닐 거 아냐! 됐어! 이럴 땐 양념을 더 넣어서 어떻게든 비율을 맞추면 돼!”

“야, 그 양념장 아냐! 옆에 있는 거라고!”

‘…….’

뭔 짓거리를 저지르는 거야, 이 녀석들?

슬쩍 눈을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기 전까진 무기를 손질하고 있던 그들이 이번엔 한쪽 구석에 등을 돌린 채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뭔가 의견이 맞지 않은지 둘이 티격태격 대고, 그들의 머리 위로 뿌연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뭐해, 늬들?”

“허억, 형님?!”

“죄송해요! 시끄러워서 깨셨군요!”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이 돌아보자, 그들의 사이로 활활 타오르는 가스레인지와 그 위에 얹어진 냄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뚜껑열린 냄비 안으로 보이는 갈색 액체는 내 눈에 익은 것이었다.

“된장찌개?”

내가 그것을 알아보자 두 사람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전에 드시는 모습을 봤을 때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도서관에서 빌린 조리책을 보며 만들고 있었어요.”

가스레인지와 냄비야 여관 주인 할머니가 빌려주신다 치고, 그렇다면 재료는 어디서 구해왔단 말인가? 이 녀석들에게 용돈을 준 기억은 없고, 지갑은 여전히 내 호주머니에 꽂혀 있는데.

거기서 나는 불길한 상상에 도달했다.

“너희들 설마……!”

“아, 아니요! 훔친 건 아니에요!”

“여관 주인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옮기는 걸 도와드리고 받은 수고비로 사온 겁니다!”

다행이 정당한 수단으로 사온 건 모양이다. 안심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의외기도 했다.

장을 봐온다니, 이들이 이렇게 빨리 이쪽 세상에 대해 학습했단 말인가?

예전이었으면 저녁거리로 뒷산으로 달려가 멧돼지를 잡아오고도 남을 녀석들이었기에 더욱 의외였다.

“저희가 사고 칠 때마다 형님이 고생하시는데, 언제까지고 그럴 순 없죠.”

“이 찌개도 오라버니가 기운을 차렸으면 해서 끓인 거예요.”

“…….”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하게 웃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가슴 뭉클해졌다.

뭐지? 날 감동시켜서 함락시키려는 고도의 작전인가? 아주 효과적이라는 것만 말해주마.

피식 웃음을 흘린 난 그들에 옆으로 다가가 국자로 찌개 국물을 한 술 떴다.

“아앗! 형님!”

“아직 완성될 덜 된……!”

바람을 불어 국물을 식히고 한 모금 들이켜 본다.

잠시 눈을 맛을 음미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맛없어.”

“이 근육돼지가 물 조절을 잘못해서 그래요!”

“이 절벽가슴이 양념을 엉망으로 섞어서 그렇습니다!”

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모함한다는 따뜻한 가족애를 보이는 두 사람을 두고, 나는 지갑을 챙기며 일어났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싸우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

잠시 뒤, 길 건너편 편의점에 다녀온 내가 가지고 온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국민 조미료였다.

내가 그것을 된장찌개 위해 솔솔 뿌리는 모습을 레반과 레테라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그건 뭔가요?”

“어떤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변하는 마법의 가루. 자취생 시절에 종종 신세졌지.”

“?”

“한 번 먹어봐.”

마법의 가루로 완성된 된장찌개를 그들에게 건넸다.

국자로 떠서 한 번 씩 맛을 본 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두 눈을 빛냈다.

“오오!”

“신기하네요!”

신세계를 발견한 듯한 그들의 모습에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말했다.

“고맙다.”

“네?”

“뭐가요?”

“아니, 뭐 그냥. 여러 가지로.”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들의 노력 덕분에 내 고민 하나가 해결되었다.

언제나 이렇게 좋은 녀석들로 있어다오.

그래야 언젠가 너희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내 곁을 떠나는 날이 온다고 해도 안심할 수 있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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